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이니라 

어제는 정말 하늘에 구멍이 나지 않았는가 생각을 했습니다. 화요 성경공부를 위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하여 신링동으로 향하였습니다.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 가는 길이라 걸어야 할 길은 불과 15분 정도였습니다만 바처든 우산이 민망스러울 정도로 입은 옷이 물 속에 잠긴 듯 하였습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이 석규집사님 댁에 들어서니 이미 김교수님이 와 계셨습니다, 

이 집사님의 작은 아들의 반바지를 빌려 입으며 나는 내 허리가 그렇게 큰지 새삼스럽게 놀랐습니다. 우리는 방권사님께서 맛있게 무처 놓은 잡채를 게눈 감추듯이 입에 넣고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가정에서 갖는 채플은 특별한 별미가 있어서 더욱 좋습니다. 방권사님 솜씨 때문에 내 허리가 걱정입니다. 

최근 누가복음 강해를 올리면서 게시판 설정이 잘못되어 가입회원들에게 모두 이멜로 전달이 된 것 같습니다. 쏟아지는 이멜로 머리 아프신 분들께서는 탈퇴 소동이 일어났었습니단 말씀을 사모하는 분들에게는 10간의 여유로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접할 기회를 상실하지 마시기를 권면합니다. 

오늘은 고린도후서 3장입니다. 바울은 서두에서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의미심장한 질문입니다. 그 당시는 교회가 막 탄생된 시기라서 이방지역에는 많은 사역자들의 다녔습니다. 그들은 유대에서 내려 온 사람들로 그들은 추천장을 들고 다녔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우리의 편지로서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읽은 바라고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바울은 문필가였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이니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석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마음판) 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2장에서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들과 자신의 관계를 하나님의 영으로 마음에 쓴 심비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온전한 영과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에만이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말입니다. 아마 사랑하는 부부간에는 이러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능히 알 수 있겠지요.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과거의 사역자 즉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 모세의 율법으로 다스려 지던 시대에 있어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설명하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친히 돌에 쓰신 율법을 들고 내려 왔습니다. 

모세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로 말미암아 그의 얼굴을 바라 보지 못하였고 할 수 없어서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쓰고 그들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모세에게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곧 없어질 모세의 얼굴의 광체에 마음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한다"기록하였습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다"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너희가 무엇을 보아야 마땅하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영으로 잠시 빛나던 그 광체가 중요하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중요하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돌에 써서 새긴 죽게하는 의문(기록문서)의 직분도 영광이 잇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반문하였습니다. 

사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은 지키지 못하면 죽는 법이였습니다. 물론 그 율법을 지키면 의인으로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지만 오늘날 간단한 교통법규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지킬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백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의문(기록된 율법의 문서)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 말하며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일군을 세우셨음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이 이러한 내용의 글을 써야만 했을까요? 

우리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유대로부터 내려온 형제들이 안디옥 교회에서 잘못된 교리를 가르쳐 크게 문제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제사장들이나 율법학자 그리고 바리새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편입되었었습니다(행15:1, 5 참조). 그들은 나름대로 유대의 얼굴이었고 나름대로 학문과 견문을 가춘 유대의 유지들이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께서는 이들을 택하지 않고 12사도를 세우시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에게 맡기셨고 성령세례라는 특별한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필요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고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오병이어에 감추어져 있는 비유처럼 유대인들이 한 소년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사도들을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받아드리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트로 자처하며 혈맥과 학력 그리고 인맥을 중심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사람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틀 속으로 들어 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나타나기를 원하고 자신의 지식을 펼쳐내려는 습성이 있어서 자신의 몸담은 그 씨스템으로부터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정치세력 간에도 당권 싸움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교회도 분열을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이미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포도주가 좋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 하셨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저 내려 오는 문제로서 각 교파간의 교리가 좁혀지지 않고 계속 다투는 이유는 만약 자신들의 그 주장을 부인하게 되면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내노라하는 유대의 얼굴들이 얼굴도 이름도 듣도 못하던 보통 사람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아마 채면에 관계된 일이였을 것입니다. 이 체면이란 것이 정말 사람을 곤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명분과 체면으로 조직을 이끌어 가려고 하기 때문에 조직은 금방 더러워지고 사분오열하고 맙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11장에서 정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사람을 자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입지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여타 사정으로 명문 신학교를 나오지 못하고 군소 신학을 나와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바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아니 우리 갈보리채플은 어떻습니까? 또다시 모세의 얼굴에 덮었던 수건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렇다면 추천장이 없는 이요나가 골치거리랍니다. 

성경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어서 썩어질 냄새나는 육체들입니다. 오직 주의 말씀과 영으로 거룩하게 될 뿐입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