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에 스스로 물어보라 

(고후4:1-2)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불과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긴 터널을 빠져 나온 듯 합니다. 나의 지루함은 비단 장마와 더위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경망스러워서 진득하지 못하고 더우면 덥다 추우면 춥다 난리들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조짐마저 우리를 딥다 덥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사노라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또 견딜 수 없는 시기와 질투도 일어나며 또 참을 수 없는 분노도 일어 나게 마련이지요, 이것이 세상의 구조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것이 세상 속에서 우리를 성숙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생각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레를 주시리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기업에 참여하였다면 또 우리의 육체의 연약한 것을 강하게 하기 위하여 불세례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 여름 부디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평안한 하루를 만나게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서술하였습니다. 

이 말은 앞에서부터 이어진 것으로 3장 6절에서 말한 '새언약의 일군'의 자세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구약의 시대를 벗어나 그리스도의 시대에 대한 사역적 역활에 대한 설명과 그들이 세상 가운데서 받아야 할 당연한 일들 즉 세상에서의 환난과 고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긍휼'(mercy)이란 원래 이스라엘과의 언약적 사랑에 바탕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사랑의 언약(헤세드)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자비(mercy)와 심판과 구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 가운데 나타나신 긍휼(자비)은 가족은 물론 이웃까지 확산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잠21:10, 욥19:21, 출22:21-22). 

예수께서는 고난당하는 자들과 목자 없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마9:36). 따라서 신약시대에 와서 하하나님의 긍휼(자비)은 언약의 백성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신적 은사로 나타났습니다(롬9:23,엡2:4-5, 딤전1:13).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의 '긍휼'(자비)은 인간의 뜻이나 노력과는 무관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긍휼'(자비)은 복음의 제자들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은사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된 사역자들이지만 참으로 부끄러운 일들을 많았던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가 죄많은 곳에 임하였다고 할 때 택하심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주장할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일이 많던 사람들입니다. 더우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는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기록되었습니다. 

세번째로 바울은 '궤휼' 가운데 행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궤휼'이란 간교한 행동들을 말하는 것으로 남을 넘어뜨리기 위한 간사한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뱀이 하와를 간교한 속임수로 유혹하였습니다, 오늘도 많은 거짓 교사들이 광명한 얼굴로 다가와 간교한 말로서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네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2장 17절에도 언급된 말씀으로 잘못된 복음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근 티비 방송이나 인터넷에 올라 온 설교들을 보면 정말 이들이 이러한 설교를 어디를 근거로 하여 하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설교들을 봅니다. 거창하게 로마 교황청에서나 입을 법한 옷들을 걸치고 성경에 근거도 없는 말들을 이리붙이고 저리 붙이고 하는 것을 볼 때 과연 그들이 덕망있는 목사라고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기이한 일입니다. 

다섯째로 바울은 '진리를 나타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리'란 신뢰와 하나님의 신적 성품인 신실성을 포함하는 말로 긍국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멘'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저들을 악에서 보전하소서'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17:17)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말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새상의 철학이나 학문을 교회에서 가르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학문은 학교에서 가르치고 도덕은 가정에서 가르치면 됩니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연구하고 잘 살펴 하나님의 진리를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세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섯번째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비판을 받을 것이 없이 하나님과 각 사람의 양심에서 조금도 꺼리낌이 없어야 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말한 바로 자신이 판단을 받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신의 양심에 꺼리낌 없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설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최근 다니엘서와 마태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고린도 후서를 강해하면서 저는 이 모든 말씀이 나를 향하신 말씀 같아서 그동안 부끄러운 일들로 하여 정말 고개를 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전에는 성경을 보면서 이 말씀에는 어떤 비밀이 감추어져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마치 보물찾기하듯이 성경을 살폈습니다만 최근에 들어 그 말씀과 함께 살아가던 그 사역자들의 삶을 살피게 됩니다. 

그들이 천사들을 만나고 또 하나님과 사람들 가운데서 칭송을 받으며 지혜의 삶을 살아갔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발견할 때 우리 모두가 그 무엇도 자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를 입은 사람들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그것은 우리를 모든 것에서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지식에 이르는 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진리의 지식이 이 땅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