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빛을 발하라”(사 60:1-3) 

인간은 실존적인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동물과 사람이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숙한 성도라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깨닫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본문의 말씀은 침울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사명 의식을 갖게 하는 이정표(里程標)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열방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침울과 우울, 그리고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다시금 새로운 사명을 주셨는데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을 치료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마음과 육체가 병들어 가고 있는 세상을 치료하시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진 사명만이 아니라 그 사명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릴 축복도 아울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이사야 60장에는 영적 승리를 주실 소망과 영광이 가득차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곧 장차 오실 여호와의 영광의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온 곧 교회와 그의 백성들 곧 성도들의 구원 성취를 예언한 말씀이지만 좁은 의미로는 지금은 비록 바벨론의 포로 생활로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장차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하나님을 섬길 것을 약속하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단순히 회복될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한 사건의 내용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임할 최후의 영광(榮光)을 예표하고 있다는데 큰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진 세상에서 죽음과 절망의 고뇌 속에 시달리고 있는 인생들에게 산 소망을 주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명령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로 하여금 점점 더 짙어 가고 있는 어두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실 만큼 어지러웠던 노아 시대, 죄악이 관영하여 멸망받 을 수밖에 없었던 소돔과 고모라 같은 시대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입니다. 어두움을 몰아낼 수 있는 작은 불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악에 취해 먹고 마시면서 죽어 가는 심령들에게 누가 일어나 이 생명의 빛을 발해야 할 사명을 받은 자가 사명을 받은 자가 바로 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의 자녀인 우리들로 하여금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 빛을 발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는 많은 영혼들에게 일어나 생명의 빛을 전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가 왜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까?(빛을 발할 이유)
본문 1절에 보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일어나야 합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1절 상)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그 시대를 사는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빛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요일1:5) 하나님은 햇빛보다 더 밝은 영광의 빛을 가지고 계십니다.(계21:23) 달이 해의 빛을 받아 비추듯이, 성도는 하나님의 빛을 받아 어둠을 비추어야 합니다. 성도의 역할은 빛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둘째로 빛이 성도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1절 하반 절)
본문 1절 중반 절에서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빛이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이것에 대해서 표현하기를 “for your light has come = 너를 위한 빛이 이르렀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고”(1절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임한 것입니다. 바울과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 말할 수 없이 포악했던 죄인이며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고 그들은 인류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심령은 죄를 지어 암흑(暗黑)천지(天地)가 되었습니다. 죄 많은 인간은 빛이 없는 흑암에서 방황하며 헤매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랑 많으신 하나님은 때가 차매 빛 되신 그리스도를 어두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사람들의 빛이라'(요1:4)고 증거 했습니다. 그러나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를 못했습니다.(요1:5) 이런 중에도 빛 되신 주님을 나의 주(主), 나의 하나님으로 모셔 들인 사람이 있는데 그가 곧 그리스도인이요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잃었던 빛을 다시 찾은 사람입니다. 성도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 들인 성도는 당연히 그의 영광스러운 빛을 받고 빛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빛을 받은 성도는 세상에 그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두움을 몰아내야 합니다. 어두움을 물리치는 것이 빛 된 성도의 사명입니다. 빛의 열매는 착한 행실과 의로운 삶과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다.(엡 5:9) 성도는 불법과 불의를 몰아내야 합니다. 성도는 어두움을 몰아내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 등대의 불을 켜서 어두운 세상 구석구석을 환히 밝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어두움에 의해 지배를 받았지만 이제는 어두움을 물리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8-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의 자녀답게(엡 5:8) 참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셋째로 세상이 죄악으로 어두워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2절 상)
본문 2절 상반 절에서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이 죄악으로 너무 어두워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은 너무 어둡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지나갈수록 어둠의 농도가 짙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향락의 밤이 깊어가고 죄악의 구름이 더욱더 두꺼워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를 먹고 마시며 권력과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미움과 증오가 팽배하고 있으며 부정과 부패로 타락해 가는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일어나 빛을 발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들은 세속주의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거나 도피주의적 삶을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너무 심하게 어두워 가고 이 세상을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어두움을 몰아내고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지금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암흑기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빛을 발하기 원하는 우리 자신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죄악의 장소, 절망의 장소, 사망의 장소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 절망과 사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낙심과 원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병들어 있으면 일어나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우리 영혼이 건강하지 못하면 일어나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악에 주저앉아 있으면서 일어나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3:26,52:2) 여호와의 빛이 우리에게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악의 장소, 절망의 장소, 사망의 장소에서 일어나라고 임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하기 전에 죄악으로 황폐해진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치유의 빛, 구원의 빛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두움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우리는 빛을 가진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타락한 육신과 심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인간은 스스로 빛을 발할 힘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치료의 광선을 받지 아니하고는 결코 일어나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말 4:2에서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성도들에게 치료의 광선을 발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외양간에 나온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 위하여,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요 1:5절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강팍하였으면 직접 빛을 보면서도 빛으로 인식하지 못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 8:12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이제 주 안에서 생명의 빛을 얻은 자입니다. 그러기에 빛의 자녀답게 행하며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롬13:12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했습니다. 갑옷은 전쟁에서 나가 싸울 때 적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는 소중한 장비입니다. 우리는 모두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사단과 싸우는 영적 전투에서 우리의 생명과 몸을 보호하는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빛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일어나 빛을 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할 수 없는 것은 치료의 광선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를 힘입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 빛을 발하기커녕 우리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기에 급급합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악의 장소, 절망의 장소, 사망의 장소에서 주저앉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일어나 빛을 발하기 원하신다면 치료의 광선을 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의 아버지시며 빛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5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이 빛에는 어떤 어두움도 통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빛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그 어두움은 세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절망과 사망이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부활의 능력 앞에 사망은 이제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생명과 영광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분은 여호와의 영광의 빛이요, 이 빛이 비췸으로 시온(교회)과 그의 백성들이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9절에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치료의 광선을 발하시는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받은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빛을 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빛을 반사하는 것입니다. 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죄로부터의 철저한 분리를 요구됩니다.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죄악의 장소, 절망의 장소, 사망의 장소에 앉아거나 누워있지 말고 일어나 활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빛을 반사시켜 이 빛을 증거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 야곱 - 야곱은 세겜에 장막을 치고 살다가 딸이 강간을 당하는 아픔을 당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세겜 남자들을 속이고 그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야곱이 어리벙벙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오셔서 “네가 살 곳은 여기가 아니고 벧엘이니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35:1) 이에 야곱은 그동안 식구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방신상을 버리고, 식구들을 정결케 하고 식구들이 입었던 이방 사람들의 옷을 바꾸어 입고 신앙을 개혁하고 벧엘로 일어나 떠났습니다. 

● 여호수아 -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인도하였던 모세가 죽자 여호수아는 난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수1:2) 고 하셨습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요단강을 나갈 때에 무사히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호수아처럼 두려움의 자리에서 일어나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여러분의 믿음도, 건강도, 사업도, 경제도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 그런데 만약 여러분 중에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나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면 능히 감당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어나고 싶은 데 연약하거나 힘이 들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성령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 우리가 일어나 발해야 할 빛은 어떤 빛입니까? 
첫째는, 복음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열방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복음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빛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어두움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받은 사명이요, 교회가 받은 사명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받은 복음,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처럼 부득불 해야 할 하나님의 절대명령입니다.(고전 9:16)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매일같이 만나는 직장동료나 친구, 이웃간에 함께 일하고 함께 온갖 이야기를 다 늘어놓고 사는 막역한 사이면서도 왜 다른 것은 다 말하면서도 예수님에 관해선 말을 못하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끄럽기 때문입니까? 사업에 지장이 있을까봐 입니까? 출세에 지장이 있을까봐 입니까? 
주님께서 마 10:32-33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부끄러워하고 복음을 외면하면 마지막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주님도 우리를 부끄러워하고 외면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딤후 4:2) 

둘째로 선한 행실의 빛입니다. 
성도의 생활은 불신자의 생활과는 달라야 합니다. 똑같이 싸우고, 자기 욕심만 앞세우면 생활전도는 실패하게 됩니다. 성도의 삶에는 이기적인 마음이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예수 때문에 참아야 하고, 예수 때문에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너희 착한 행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착한 행실! 이것은 불신자들에게 빛입니다. 우리는 어떤 빛을 발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불신자들에게 보여질 때 과연 저들이 우리에게서 어떤 빛을 볼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진정 복음의 빛을 비추려 한다면 믿음으로 굳게 서서 의로운 행실을 힘쓰므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습니다.(엡5:9).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어두워 갈 것입니다. 이 세상은 세월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의 세력들이, 어두움의 권세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둠의 시대에서 성도의 빛된 삶은 너무나도 요청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설교가이자 학자인 동시에 뛰어난 저술가인 영국의 복음주의 지도자인 존 스토트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전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생명 복음의 빛과 착한 행실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존 스토트 목사는 “전도와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은 사실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빛을 반사해야 합니다. 이 빛을 우리의 입으로 증거하고(전도), 우리의 착한 행실을 가지고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받은 사명이고, 교회가 받은 사명입니다.  

3.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하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결과가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기적들이 나타납니다. 빛을 받은 우리가 이 빛을 발할 때 어떤 결과가 있습니까? 

첫째로, 사람들이 모여온다고 했습니다.
본문 3절과 4절에 보면 너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하고, 교회가 일어나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발할 때 그 결과는 많은 사람들이 이 빛으로 나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둠의 죄악으로 인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고초를 겪던 유다가 돌아올 것을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BC 536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이러한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인 동시에 우리들에게 주신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신약 시대에 예수님에게로 많은 생명이 모여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빛을 발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 올 것을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빛을 비출 때 열방이 네 빛으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유대민족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들 중에서도 예수께로 나올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의 생명의 빛을 보면 돌아올 자가 많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말씀입니다. 내 빛을 통해서 예수 믿게 될 대상이 많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살아야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입술로, 착한 행실로 이 빛을 발함으로 개인적이나 교회적으로나 영적 부흥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물질적 축복입니다.
우리가 빛을 발하기만 하면 여러분 개인이나 교회가 물질적인 축복이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풍성한 복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5절에서 9절을 보시면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오고', '허다한 약대', '금과 유향', '양무리', '은금'이 채워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상인들이 상품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린다고 했습니다. 11절에서도 열방의 재물을 가져올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빛을 받은 열방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에 들어오게 될 때 저들은 가장 가치 있는 모든 것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보고 너는 놀랄 것이라고 했습니다(5절). 여기 “놀란다”라는 말은 “기뻐 약동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화창'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쁨이 팽창함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고 그 빛을 반사하면 이렇게 놀라운 축복들이 비둘기가 보금자리로 날아오듯이 날아오는데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삶의 현실이 역전되는 축복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 왕들이 너를 봉사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는 저들의 죄악으로 이방인들에게 성벽을 헐리고 노예로 끌려가는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빛을 발하면 삶을 역전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생명의 빛을 발하기만 한다면 나를 괴롭히는 자들이 나에게 굴복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빛을 발하기만 하면 지금의 나의 삶이 새롭게 전환된다는 약속입니다.  

넷째로, 번성의 축복입니다.
본문 22절을 보시면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가슴 설레는 말씀입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천을 이루고, 강국으로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축복을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고 보증까지 해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말씀입니다.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하면 개인도, 가정도,교회도 국가도 회복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믿지 않는 자가 문제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이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잠 11:10,11)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명이 있는지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이제 더 이상 빛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에 묻혀 초라한 모습으로 살아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그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의 생명의 빛을 발산하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놀라운 축복을 영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일어나 빛을 발할 때 낙심했던 자, 믿지 않던 식구, 권력을 가진 자, 이웃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교회가 영화롭게 되고 성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더 풍성해 지는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함으로 이러한 풍성한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