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을 주시는 하나님”(히 11:6)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다시금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분명한 두 가지을 인식하며 살아갑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달려 갈 길을 다 달려가는 이유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생에게는 종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 9:27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오는 것은 순서가 있습니다만 가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우리가 장수를 한다고 해야 보편적으로 팔십 인생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시편 90:10에서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시한부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가장 가까이 있는 죽음 앞에서 나는 언제든지 떠날 채비가 하고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이 모습 이대로 주님을 뵈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부르신다면 나는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장차 어떤 상을 받게 될 것인지는 관심 밖이야.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는 없어. 치사하게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상급을 얻기 위해서 열심을 내라하는 것은 말도 안돼!" 

물론 이 말은 언뜻 들으면 설득력 있는 옳은 말 같습니다. 그러나 전혀 비 성경적인 인본적인 생각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 편에서 시작하셨고, 또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인도를 받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그럴듯한 이야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이유에 대하여 밝히 말씀하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요. 사도 바울은 골 3:24에서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를 섬기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유업의 상을 약속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상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 날에 주께서 주실 상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해도 과언이 압니다. 하늘나라의 상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정작 상에 관심없는 사람들이 아니고, 보이는 세상적인 것에는 지나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요 5:24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는 절대로 영벌의 지옥을 선언 받는 심판은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요. 성도에게만 있는 상급의 심판대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상급을 사모하고 바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모세를 내세우시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또한 마 16:27에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고 있고, 고전 3:8에서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갈 6:7-10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그렇다면 상(賞)이란 무엇입니까? 
① 당장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보상에 연연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성도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②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지만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복음 때문에, 할 말을 다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변명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축복을 빌어주는 손해보고, 져주면서 사는 성도들, 복음을 위해서 의를 행하다가 세상에서 핍박을 받은 성도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2. 우리가 어떻게 해야 상을 받습니까?
상을 받으려면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만, 상급은 우리의 행위로 얻습니다. 구원은 믿음을 통하여 얻습니다. 믿음으로 영생의 구원을 받게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도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에베소서 2:8-9) 그러나 이제 구원을 얻은 자로서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10:31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②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엡 2:10에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딛 3:8에서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데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③ 착한 행실을 보이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 5:16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착한 행실을 보이며 살아야 합니다.  

④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고전 10:32-33에서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로서의 사명과 우리에게 각자에게 주시는 직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푯대를 향해서만 나아가야 합니다. 사명 때문에 흘리는 눈물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오늘, 지금의 우리의 삶에 새로운 가능성과 능력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은 과거에 잡혀서 살지 않습니다. 언제나 꿈과 비전을 갖고 날마다 새 사람으로 새 날을 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 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선언 받으며 날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기대를 걸머진 성도는 절대로 뒤 돌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를 말아야 합니다. 
물론 베세메스로 가는 젖나는 암소처럼, 한번도 멍에를 메어본 적이 없어서 힘겹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도 벗어 던지거나, 메지 않겠다고 뛰지 않아야 한답니다. 젖 먹는 아기 송아지가 뒤에서 엄마를 찾아도 정에 끌리는 바 없이 목표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사명을 앞세워야 하겠기에 정을 끊고 돌아서는 길이지만 흐르는 눈물이야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 이 사명 때문에 흘리는 기가 막힌 그 눈물을 주님께서는 하늘의 빛나는 별과 같이 귀한 상급으로 갚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어떤 상급을 주십니까? 
① 자랑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이는 영혼을 구하는 성도에게 주시는 전도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 4:1)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나 빌립보교회의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 날에는 그의 자랑의 면류관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자랑의 면류관은 곧 전도하는 성도에게 약속된 면류관입니다. 모든 성도는 이 자랑의 면류관을 얻도록 초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성도의 마땅한 본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의무요, 하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②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이는 시험과 유혹,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끝내 굴하지 않고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약 1:12에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있고,  계 2:10에서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환난을 당하고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급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뛰어드는 숱한 문제들은 우리를 불평과 불만과 무기력과 무능력으로 밀고 갑니다. 우리의 입에서 찬양과 감사를 빼앗아 갑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등지도록 유혹 당합니다. 마치 욥의 아내가 갑자기 닥친 엄청난 환란 앞에서 자신을 가누지 못하여 남편을 향하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하는 자리에 서듯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보이는 사람들, 이를 위해서 사자 굴에 던져져도, 풀무 불에 던져져도, 눈에 보암직하던 모든 것이 다 끊어지고 결국 자신의 몸마저 악창으로 살 소망이 없어진다 해도 마지막 죽기를 마다않고 바라고 참고 견디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생명의 면류관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2) 예수 이름으로 당하는 시험과 환란과 고통은 분명히 아름다운 결말이 약속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연약한 육체를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이기에 힘겨운 나머지 차라리 이 믿음을 포기하고 편하게 살아볼까 하는 유혹을 받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믿음의 주가 되시고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잘 이겨내야 합니다.(히 12:2,3) 

③ 썩지 아니 할 면류관을 주십니다. 
이는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는 성도에게 주시는 상급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9:24-27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몸을 쳐 복종하는 성도에게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고전 10:23-29)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하지만,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어 믿음의 길에서 떨어져 나간다고 하면 기꺼이 그 일을 포기할 수 있다는 성도에게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주는 것입니다. 나 한사람이 희생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만 있다면 기꺼이 나의 자유와 권리를 버릴 수 있다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는 기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절제의 능력을 구하여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이 자기부인(自己否認)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눅 9:23) 

④ 영광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이는 양 무리를 치는 성도에게 주십니다. 벧전 5:2-4에서 “너희 중에 있는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 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양무리를 담당하는 목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그렇다고 목사나 전도사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목자로서 부름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들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가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서 제자를 삼도록 명령받고 있음을 보십시요. 명령이란 하면 좋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닙니까 ?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군사들로 부름 받았다고 합니다. 군인에게 있어서 용서되지 않는 죄로서 전시에는 그 자리에서 사살할 수 있는 것이 항명죄, 즉 명령 불복종입니다. 우리는 제자를 삼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합니다.  
⑤ 의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이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딤후 4:8에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면류관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는 가운데 살았던 성도들에게 주어진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주의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성도답게, 우리의 모든 삶을 투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 지금 이 시간에 주님께서 재림하신다고 할 때 과연 부끄러움 없이 마라나다 !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 라고 고백할 수 있으십니까 ? 바로 그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상급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결산할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끄러운 구원이 되지 않도록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불 심판을 통해서 금,은,보석 같은 삶을 살아온 성도는 불 시험을 통해 오히려 더 빛날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 풀, 짚처럼 살아온 성도는 불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쉽게 불에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이름은 있었으나 하나님 앞에 내 놓을 것이 없는 성도가 되어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고전 3:9-15)  
이를 위해서 말씀 안에서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딤후 2:5)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의를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마 6:1) 상급을 빼앗기지 않도록 굳게 잡아야 합니다.(계 3:11) 온전한 상을 얻도록 힘써야 합니다.(요이 8)  
간절히 바라기는 룻기 2:12에서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상을 받도록 부끄럽지 아니한 성도가 됩시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