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무릎을 꿇자”(시 95:1-11)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禮拜)」로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라는 특별한 초대장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히브리서에서 인용된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시95:7절, 히4:7)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배로 초청하시고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불순종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폐지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현재도 유효(有效)할 뿐만 아니라 영원까지 유효한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과거뿐 아니라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영원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통하여 우리에게 광야에서 불순종하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 28:45과 47절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네게 명하신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너를 따르고 네게 미쳐서 필경 너를 멸하리니,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광야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도 자주 불평했고 투덜거렸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최종 목적지에 들어가지 못하는 대가를 치루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울의 경우를 통해 부분적인 순종 역시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하고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폐지가 되거나 폐기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순종의 영을 받은 사람들을 좇아서 살 것이라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순종의 영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 6절에서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겸손하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가 초청을 받았다고 해서 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은 아닙니다. 롬 1장 23절에서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복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아무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경배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나아서 온전히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너무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다. 세상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습니다. 아굴이 잠언 30장 9절 상반 절에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할까 하오며...”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배부르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의 부요한 자뿐만 아니라 물질에도 부요한 자로 살기를 원하시지만, 보통 사람이 물질적으로 부요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보다는 물질을 더 가까이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부자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물질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간절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하나님께 나아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까?  

1. 여호와 하나님은 찬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 말씀에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기에 “구원의 반석”이란 말씀은  "피난처"라는 뜻으로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보증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하되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또한 여기의“즐거이 부르자”라는 말씀은 “소리로 귀가 먹게 하다, 놀라거나 기뻐서 소리치다, 나팔 소리를 내다”라는 뜻으로 고대의 왕들이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할 때에 찬양대와 악대가 큰 소리로 노래할 때에 사용된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하되 아주 웅장하고 거룩하게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가 있는 성도는 찬송할 때에 목소리를 높여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가식이 없는 진실한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하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우리가 왜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지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본문 2절에서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즐겁게 찬양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아는 성도라면 감사의 찬양이 넘쳐야 합니다. 찬양을 하되 즐겁고 기쁨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롬 1:21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감사치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되 감사함으로 찬양하고, 기쁨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느 8:10 하반 절에서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찬양할 때에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기쁨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환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때로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할 때에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사울에게 악신이 물러갔던 것처럼 찬양은 정말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내는 힘이 있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고, 왕 중에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에서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시고 왕 중에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다른 신과 비교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다른 신의 존재와 대조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위에는 다른 신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사람도 신격화시키고 금수도 우상화하고 심지어는 버러지 형상도 신으로 섬깁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에도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드리며 예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크신 분으로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모든 왕 중에 왕이 되심을 믿지 못할 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되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고, 모든 왕 중의 왕이 되심을 온전히 인정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복잡하게 사변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저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철학적(哲學的), 문학적(文學的) 심지어 신학적으로 접근해도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크신 분이시고, 모든 왕 중에 왕이 되심을 온전히 믿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크신 하나님은 어떤 왕이십니까?
본문 4절부터 5절에서  “[4]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창조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거인 같은 산봉우리와 웅장한 기암괴석(奇巖怪石)과 깎아지른 절벽과 뛰쳐나온 돌산들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대서양, 태평양, 지중해, 북극해 등과 같은 거대한 대양을 비롯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뻗어있는 강과 하천들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망망대해에 솟아있는 섬과 대평원과 고원 지대와 울퉁불퉁한 산지와 거대한 산맥 등 육지라 부르는 모든 것 역시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권리와 지배권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의 운명 또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요 발등상입니다. 조금만 주의해 관찰한다면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주장에 어떤 반론도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냉철한 이성으로 추론해 본다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연히 세상이 만들어지고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꼭 기억할 것은 크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나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거민들 가운데서 나를 거룩하고 특별한 소유 곧 보물로 선택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의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속하신 것같이, 우리도 주님께 속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가서 2:16 하반 절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다"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우리를 하나님에게 속한 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나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6절에서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허리를 굽혀 하나님을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신 다음에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만물과 인간을 지금도 섭리하시며 통치하십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조물주가 세상을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세상이 진화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창조 진화론」을 말하는 자들입니다. 또 어떤 자들은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하나님께서 우주의 주재자이심을 알지 못하고 나무를 목신으로, 돌을 석신으로, 바다를 해신으로, 산을 산신으로 섬기고 경배합니다. 그 만물을 지으신 자는 보지 못하고 그 만드신 피조물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하여 경배합니다. 바로 우상 숭배자요, 영적 간음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자들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만 크신 왕으로 경배하며 그 통치에 순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크신 분이시고, 왕 중에 왕이 되심을 온전히 믿고서 허리를 굽혀 그 앞에서 겸손히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합니다. 결코 롯의 사위들처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농담으로 그 말씀을 희롱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자초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에서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의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입니다. 그의 기르시는 백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만약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짐승에 잡혀 생명을 잃게 됩니다.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서로의 목소리를 인식하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양은 목자를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그 음성을 전적으로 믿고 따를 때에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를 받게 됩니다. 

목자는 양의 울음을 들을 때에 양의 아픔이나 위험을 알아차립니다. 반면에 양들은 목자의 피리 소리를 들으며 지금이 풀과 물을 먹을 때인지, 아니면 위기가 닥쳐온 때인지, 아니면 목자를 따라 나서야 할 때인지를 알아차립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마치 양같이 하나님의 말씀 곧 그의 음성을 이해하고 순종합니다.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할 때에는 큰 울음소리로 목자에게 알리듯이 믿음의 백성들도 위기에 처할 때에는 큰 소리로 목자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양이 절도와 강도의 위험에 처할 때에 삯군 목자들은 도망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목숨을 희생하시면서 그 양들을 이리와 사나운 짐승 떼들로부터 구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께서는 예수님은 우리들의 “큰 목자”라고 하셨습니다(벧전 2:25, 히13:20 상)

그렇다면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그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본문 8절-9절에서 “[8]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한때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귀머거리가 되어갔습니다. 그것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요 10:27 상)는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참 양떼가 아니라는 증거였습니다. 

출17:7절에 보면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맛사"는 "시험 또는 유혹"을, "므리바"는 "다툼 또는 논쟁"을 뜻합니다. 또 "시험하여"라는 말은 "시도하다, 꾀하다, 감히 시험하다"등의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대적하였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당신의 신실하심에 대한 결정적 증거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해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통해 매일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반석에서 솟구치는 샘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완악했습니다. 끊임없이 미혹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면서도 고집스럽게 패역한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광야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물이 없는 곳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자신들 가운데 계신 분인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 분인지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불신앙과 패역함을 고스란히 드러냈습니다. 사십 년 동안이나 그렇게 하나님을 근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므리바와 맛사에서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음성을 듣기를 거절하는 교만했던 강퍅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온순한 마음을 가지고 목자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고, 그 음성에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처럼 결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시면 목자가 되신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본문 10절에서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가 되신 하나님을 음성을 듣지 않음으로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근심되게 한 것처럼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러한 행동을 반복한다면 그 사람은 사단에게 미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단에게 미혹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싫어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길의 결국은 사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에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40년동안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배회한 결과 여호수아와 갈렙은 제외한 나머지 아무도 하나님께서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분명하게 경고하심과 그들은 결국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 4:1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십니까? 찬양하십니까? 그런 우리의 삶은 세상에 도전을 줄만합니까?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까? 아직까지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온 세상을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크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만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할 뿐 아니라, 크신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고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순종이란 "나를 책임지고 있는 누군가의 현명한 지시를 기쁜 마음으로 즉시 완벽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독생자를 포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당신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선물인 아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순종했습니다. 사람에게 길들여진 낙타는 주인이 타거나 짐을 실을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기다립니다. 

자신을 책임지고 있는 주인의 현명한 지시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히브리서 기자는 히 5:8-9에서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창 7:5에서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遵行)하였다"(창7:5)고 말씀합니다. 
어니스트 라킨(Ernest Larkin)은 "온전한 분별력을 위해서는 단련된 마음,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예민함, 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순종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고 있습니까? 무수히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고, 작은 어려움 앞에 불순종한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가나안, 곧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렵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순종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안식은 물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까지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