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 주시는 하나님”(왕상 17:8-16)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와 똑같이 절망의 시대에 살았던 참으로 불행한 여인 사르밧 과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의 시대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가뭄의 때에도 이 여인은 3년 6개월 동안 차고 넘치는 축복을 받으면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사르밧 과부에게 나타났던 기적은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필요를 따라 풍성하게 채워주시고 계십니다. ▶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채워주시는 복은 아무에게나 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나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복은 행함으로 받고, 상급은 헌신으로 받습니다. 

그렇다면 사르밧 과부는 어떻게 하여 채워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선지자를 정성으로 공궤했기 때문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를 대접함으로 채워주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성도에게 복을 주시는데, 혹 헌신하고자 하지만 부족할 때에 그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그 모자람을 채워주십니다. 여러분이 뭔가를 하려 할 때, 그리고 교회가 뭔가를 하려 할 때 모자라는 것은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어떤 여건 가운데서도 모자라는 빈 지갑이 채워지고 양식 통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처럼 다른 사람들을 공궤하고, 대접하는 자에게 채워주시는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눅 6:38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 제기)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나의 형편에 어떻게 다른 사람을 대접하고 공궤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결코 넉넉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공궤할 만한 형편에서 엘리야를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사르밧 과부가 살았던 시대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위기 상황을 맞고 있었습니다. 
① 정치적으로 혼란(混亂)의 시대였습니다. 당시에는 타락한 아합과 이세벨이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왕상 16:30) 
② 신앙적, 도의적(道義的)으로 극도로 부패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③ 경제적으로 최대의 공항을 겪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온 천지는 메말라 기갈과 기근이 극에 달하여 백성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던 때입니다. 난항 중의 난항이요, 불경기 중의 불경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아와 굶주림으로 체력은 허약해지고,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시대였습니다. 
④ 사회적으로 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불안과 초조가 민족의 마음을 뒤흔들던 때이었습니다.  의식주(衣食住)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의식주의 문제가 난항에 부딪쳤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불안과 초조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렇다면 이러한 민족적인 위기 상황 중에 사르밧 과부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① '사르밧에 사는 여인'이라고 하였습니다(8절). 사르밧은 시돈에 속한 한 성으로서 이스라엘 지경밖에 있었습니다. 이 시돈은 왕후 이세벨의 고향이며 사르밧은 바알우상을 이스라엘에 첫 수출한 장소입니다. 시돈은 죄악이 시작된 곳이요, 죄악이 관영한 도성입니다. 
② '사르밧의 여인은 과부였다'고 하였습니다(9절). 의지할 곳 없는 과부, 위로해 주는 이 없는 고독한 과부입니다. 
③ "사르밧 여인의 형편이 가난하다"고 하였습니다(12절). 과부인 것만 해도 서러운데 게다가 찢어지게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뭄의 시대에서도 3년 6개월 동안 밀가루 통과 기름통에 차고 넘치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르밧 과부에게는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채워주심의 축복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사르밧 과부가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엘리야 선지자를 공궤함으로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다른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은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행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돕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워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극한 위기를 성공과 축복의 삶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르밧 과부가 살았던 시대처럼 극심한 가뭄의 시기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나라 경제가 힘듭니다. 따라서 사업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직장생활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할지라도 사르밧 과부처럼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귀하게 섬기십시오. 특히 민족의 명절 추석을 맞이하여 우리 주변에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접하는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공궤하는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빈 곳을 채워주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빈곳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만들었을까요? 오늘 하나님은 이 본문 말씀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행동할 때에 빈 그릇이 채워집니다.(8절)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ꡒ너는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ꡓ(8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피할 장소를 예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돈에 사는 사르밧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ꡐ시돈에 속한 사르밧'이란 곳은 어떤 곳입니까? 그 곳은 아합의 왕비 이세벨의 고향이요, 바알 숭배의 본거지(本據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야가 그곳에 숨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의심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에게 가장 안전한 피난처를 예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과부에게 명하여 공궤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역사입니다. 우선은 엘리야 선지자에게는 안전한 피난처를 예비해 주시는 것이고, 사르밧 과부에게는 극심한 가뭄 속에서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기회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 선지자를 대접하는 것은 시험 중에 큰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공궤하게 하심은 골탕을 먹이시고, 힘들게 하심이 아니라  채워주시는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엘리야 선지자에게나 사르밧 과부에게 채워주시는 복이 예비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피할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0:13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바치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ꡒ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을 잡지 마라. 내가 너를 위해서 한 수양을 예비했다." 그리고 창세기 22장 12절에서 ꡒ…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바칠 때,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과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 대신에 수양을 예비하시고 그 수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여호와 이레”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단계에 올라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채워주시는 복을 받을 만한 수준에 있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축복의 기회를 주어도 그것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무모한 분이 아니십니다.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하시고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시고, 그 계획에 의해서, 그 풍성하신 예비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 걱정, 근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하나님을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풍성하게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갖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 6:31~33에서 ꡒ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異邦人)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사르밧 과부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에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을 아시고, 예비하신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르밧 과부처럼 비록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극심한 가뭄 가운데 있을지라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좋은 형편 속에서 감당하는 복된 모습이지만 사르밧 과부처럼 극심한 가뭄 속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한다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만약 지금 여러분에게 크게 마음 속에 감동은 되었는데, 자신의 형편을 바라보면서 머뭇거리는 분이 계시다면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홍해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열렸습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예비해 주시고 계시는데, 머뭇거린다는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히 11:1,6) 하나님의 일은 수학공식에 의해서 되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세상의 속셈법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속셈법으로는 5+2=7이 되지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속셈법으로는 5+2=3,000이 되고, 6,000이 될 수 있고, 20,000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주시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2.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약속의 하나님을 붙게 믿고 행동으로 옮길 때에 빈 그릇이 채워집니다.(13-14절)
먹을 것이 모자라는 사르밧 과부에게 떡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말한 엘리야는 이런 축복을 선포합니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地面)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14절)
본문의 말씀이 도저히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조건 축복의 씨앗만을 심기만을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분명한 약속을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고 약속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서 ꡒ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나님께서 축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의 선포를 하나님의 약속으로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15절) 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놀라운 채워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 물론 사르밧 과부처럼 산다는 것은 용이한 모습은 아닙니다.
살기가 어려워지면 불신풍조가 만연합니다. 좀처럼 믿지 않습니다.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은 더욱더 믿기 어렵습니다. 사르밧 과부처럼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놀라운 축복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 사르밧 과부가 뿌린 축복의 씨앗은 겨우 떡 한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떡 한 덩어리가 아닙니다. ① 그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 전부였습니다. 그녀의 가정이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였습니다. 그녀의 집에 먹을 것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약속의 하나님을 굳게 믿고 축복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② 그것은 생명과 직결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과 아들의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약속의 하나님을 굳게 믿고 축복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③ 그것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 드린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는 가난한 형편 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난한 형편 속에서도 그는 축복의 씨앗을 뿌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많은 가운데 뿌린 것이 아니라, 없는 가운데 뿌린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복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사르밧 과부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축복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예화) 옛날 중국 농촌에 들어갔던 선교사가 중국 농민들이 큰 감자는 먹고 작은 감자는 씨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그들에게 미국의 농사와 다릅니다. 미국에서는 큰 감자를 씨로 사용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중국 농민들이 이 서양 사람의 말대로 큰 감자를 씨로 심었더니 비교적 큰 감자가 많이 열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가장 귀하고 큰 것을 바쳐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길 때 큰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감자가 아니라, 큰 감자를 드려서 큰 복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수 있는 것은 꼭 큰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소아시아 교회 가운데 책망만 받지 않고 오직 칭찬만 받은 서머나교회와 같이 주님에게 책망은 받지 않고 칭찬만 받았습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으로 배반하지 아니했다”(계 3:8)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성도들은 가난 속에서도 풍부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를 공궤한 사르밧 과부에게 복을 주신 이야기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굶기지 않으신다는 것과 주의 종들을 보살펴주는 성도들에게는 결코 복을 잊지 않으신다는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요즈음 같이 어려운 시대에 내 가정도 먹고 살아가기가 어려운 시대에는 교회의 헌금도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주변에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암울한 현실 속에 있다고 할지라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채워주심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되 살아계신 하나님의 온전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사르밧 과부처럼 채워주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은 환경을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환경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은 다니엘처럼,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에스더처럼 어려운 환경을 극복함으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담대히 믿음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행하실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재산, 자기가 가진 것, 자기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실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 영적 상태도 포로와 같은 생활을 그들을 향하여  41장 10절에서  ꡒ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두렵고 놀라게 하던 것이 다 떠나고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물론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의심 많은 도마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지 못하고 의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 사도가 요일 4:18에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만 있으면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믿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ꡒ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믿음이 적으면 적게 역사하시고, 믿음이 크면 크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믿음을 쫓아내는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치고 반석 같은 믿음,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통하여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어떻게 두려움과 공포를 쫓아냅니까.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공포를 쫓아내야 합니다(시 34:4).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두려움과 공포를 쫓아내고(잠 1:33), 감사와 찬송과 기쁨을 통해서 두려움을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깃들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3. 순종하는 자에게 채워주시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행동으로 옮길 때에 빈 그릇이 채워집니다.(15절) 
본문 15절에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빈 그릇이 채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세요.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를 찾아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가져 오라" 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여호와의 말씀이 있었기에 전한 것입니다. 왕상17:8~9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사르밧 과부가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섬기게 되자 하나님이 그릇을 채워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나 이방여자인 사르밧 과부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귀히 여기고 말씀대로 섬길 때 놀라운 복이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와 생각과 감정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말씀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본문 9절에 보니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이방 땅 사르밧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종이 이방 여인에게 공궤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심(自尊心)이 상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말씀을 순종하고 갔습니다. 또 사르밧 과부도 엘리야를 통해 주어진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합니다. 결국 그들은 밀씀에 순종함으로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만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사는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이 명하는 대로 말씀을 섬겨나가면 하나님은 놀랍게 여러분을 채워 나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4:12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세 무궁토록 살아있습니다. 그 말씀은 쇠하지 않고 시들지 않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세상 것은 다 변해도 말씀은 언제나 살아있는 것이기에 살아있는 말씀을 섬기는 것은 잘되는 길이요 진리로 사는 길이요 행복하게 사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회복의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 2:9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잠 3:4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섬기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모든 것이 채워진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①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지만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었더니 그 병이 고침을 받고(왕하 5:14), 어린 아이와 같은 피부로 회복되었습니다. ② 베드로가 밤새도록 수고하여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을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눅 5:5) ③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지만 말씀에 순종할 때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요 2:9) 이처럼 순종하는 자는 정말 신기한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채워주시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에 양식의 그릇도, 마음의 그릇도, 신앙의 그릇도, 이 모든 것이 다 채워집니다. 그러기에 죽을 각오로 말씀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사르밧 과부가 죽을 각오로 그 말씀에 순종했더니 빈 그릇에 채워주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처럼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결코 패망할 밖에 없습니다. 

▶ 그래서 신 28장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순종하는 자는 상상할 초월하는 복을 받습니다.(1-14절)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는 상상할 초월할 정도의 저주를 받습니다.(15-24절) 여러분이 복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순종하는 자가 되십시오. 순종 없는 복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순종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통해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적으로 받게 하는 조건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칼뱅(Jean Calvin)은 ꡒ믿음이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고 무조건 따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믿음이란 눈을 감고 무조건 따르는 것입니다. 또한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ꡒ신앙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믿음도 신앙도 다 순종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합니다. 믿음을 갖습니다. 헌신합니다. 충성합니다. 하나님께서 ꡐ하라'고 하시면 하고, ꡐ하지 말라'고 하시면 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믿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 삽니다.  기독교 신앙이 무엇입니까. 첫째도 순종이요, 둘째도 순종이요, 셋째도 순종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내 시간이나 내 재물이나 내 재능이나 무엇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적은 일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더 큰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은 나라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정성으로 순종하며 심은 자에게 사르밧 과부처럼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히13:8)

4. 어려운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알고 돌아보고 대접할 때에 빈 그릇이 채워집니다. (15절 중) 
사르밧 과는 가난 속에서도 줄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르밧 과는 아주 처참한 가난 속에도 남을 대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름다움 마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울 때 손님 접대를 잘하면 복을 받습니다. 본문 15절 중반 절의 말씀대로 사르밧 과부가 어려움에 처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선지자를 대접하고 공궤할 때에 그릇이 채워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사르밧 과부는 엄청나게 어려운 극빈자였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과 함께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배불리려 하는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런 과부에게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였으니 이 얼마나 받아드리기 어려운 명령입니까? 그러나 엘리야는 과부에게 이르되 "두려워말고 가서 내 말대로 하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열왕기상17:15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떡을 가져다 드린다는 것은 자신과 아들이 죽는 것을 의미하므로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박살내고 엘리야를 섬깁니다. 아마도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다 하고 섬겼을 것입니다. 결국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마음으로 떡을 만들어 가져다 드립니다. 그런데 여기 아주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방 여인은 엘리야를 평범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비록 자기도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가운데 있었지만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선지자를 외면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마 25장 40절의 양과 비유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에게만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을 주님에게 한 것으로 여기고 상을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공궤하면 갚아주십니다. 그래서 잠 11:25에서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잠 19:17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빌리신 돈에 대하여 반드시 갚아 주시는 분이시며 그것을 갚되 30배로, 60배로, 100배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도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눅 12:33).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줄 알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극한 상황에 닥치면 오직 자기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르밧 여인처럼 극한 상황 속에서 처했다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그런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어려운 이웃 곧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는 자는 결코 하나님이 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하고많은 사람 중에  엘리야를 사르밧 그 과부에게 보내셨을까요? 그가 그릇의 채움을 받을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가난해도 하나님이 세운 종들과 함께 나누며 섬기시면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도 그렇고 영적인 것을 함께 나눌 때 그 나눔의 섬김이 빈 그릇을 채운다고 교훈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대접하고 공궤하는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불쌍하고 가난한 이웃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는 것은 예수님께서 뜻이고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눅 11:41 상반 절과 12:33 상반 절에서 "너희 소유를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고전 16:2, 고후 8:3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사람들은 없는 가운데서도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나눔의 삶을 살면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은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행 9:36 이하에 보면 욥바에 다비다 곧 도르가라는 여제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평생 선행과 구제에 힘쓰다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욥바에 있는 사람들이 룻다에 있는 베드로를 불렀습니다. 베드로가 달려와서 다비다 앞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 다비다라는 여제자를 살렸습니다. 다비다는 자신이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자신이 입을 것을 입지 않고 어렵고 힘든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올바른 성도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돌려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삶입니까? 다비다는 비록 바느질을 하면서 선행과 구제를 하였지만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면서 잘 감당했습니다. 만약 이 여인이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했다면 1-2년 하다가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비록 병들어 죽을 정도에 이를 정도로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마19:16-22절에 보면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한다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은 잘하였지만, 실상 예수님께서 구제에 대하여 말씀하시니 아무 소리를 하지 못한 채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물질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할 수 있었지만, 부모가 준 상속의 재산과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벌어들인 물질 적인 것은 투자하려고 하니 정말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를 타고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더욱 어렵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눅19:1-10절에 보면 세리장 삭개오가 주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변화된 모습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물질을 모았지만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변화를 갖고 자기가 모아 두었던 재물의 절반을 불쌍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워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물질이 삭개오가 인생의 주인이었지만 이제 예수님께서 인생의 주인이 되신 이후에 그 물질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때의 삭개오의 마음은 참으로 행복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제에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면서 물질을 모을 때와는 비교가 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가 복을 받고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자꾸만 나누는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나누면 무엇을 얼마나 크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크게 엄청나게 나누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음을 나누고 관심을 나누고 가진 것을 나누고 뜻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삶, 그것이 나눔의 생활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기쁨과 행복이 만들어지고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화) 영국수상을 지낸 처칠이 어려서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다고 합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동네친구가 그를 건져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처칠의 아버지가 그 아이를 불렀습니다. 보니 아주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아이는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처칠의 아버지는 그 아이가 의사가 될 때까지 공부를 시켜 마침내 의사가 되도록 안내해 줍니다. 얼마나 향기로운 이야기입니까. 능력이 있으면 꿈은 있으나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의 앞길을 이렇게 열어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일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랜 후에 처칠이 영국의 수상이 됩니다. 그런데 이 처칠이 폐렴에 걸려 위기에 처합니다. 그 당시는 폐렴을 치료할 약이 아직 개발되기 전입니다. 처칠은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물에 빠진 처칠을 구해주었던 친구가 의사가 되었는데, 그의 의사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친구는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 병은 폐렴이야, 그런데 치료할 약이 없어, 내가 지금 폐렴을 고치는 항생제를 연구하고 있기는 한데 아직 실험을 하지 않은 거야, 위험하기는 하지만 자네가 한번 맞아보겠나, 지금은 다른 길이 없네”. 그래서 처칠이 그 항생제를 처음으로 맞고 살아납니다. 그 사람이 항생제 페니실린을 처음 발명한 알렉산더 플레밍이라는 의사입니다. 그가 나중에 그 공로로 노벨상까지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너를 돕게 되는데 그것은 또 결국은 나를 돕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행복을 창조하게 되고 삶의 보람과 뜻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그 속에서 비로소 뜻이나 행복 그리고 기쁨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들까지 느끼고 경험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제 가슴을 오랫동안 뜨겁게 하는 감동을 주는 한 자매가 있습니다. 
그 자매는 이지선이라는 자매입니다. 서점에 나가면 “지선아 사랑해” 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요즘 이지선이라는 처녀가 한창 인터넷으로 책으로 화제로 뜨고 있습니다. 이 이지선이라는 처녀는 1978년생으로 이대 유아교육과를 졸업했습니다. 아주 예쁘고 발랄한 처녀입니다. 그런데 2000년 7월 30일 날 음주운전자의 운전실수로 6중 추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 사고에서 이지선 양이 전신 3도의 화상을 입게 됩니다. 7개월 동안 입원해서 11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화상으로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손가락은 절단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예쁜 모습은 아주 완전히 일그러졌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얼마나 억울한 일이고 분통터질 일입니까. 자살해 죽어도 시원찮을 원망의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처녀가 11차례 수술을 받는 동안 신앙이 아주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참 묘한 것입니다. 인생도 참 묘한 것입니다.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 처녀가 아주 완숙한 인간이 되고 깊은 신앙인 이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현실을 뛰어넘는 깊이 숨겨져 있던 진정한 행복의 요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 손길,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사고를 당하기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렬한 감격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신앙과 인생의 신비함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녀는 그런 마음을 이렇게 고백하면서 감사했습니다.“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내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리고 내 손이 왼손 보다 오른 손이 짧아졌지만 그 짧은 왼손이라도 남겨놓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손가락을 절단하려고 수술실에 갔다 나오면서 나는 손가락을 더 짧게 자르지 않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다시 한번 감사드렸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면 서울을 나에게 통째로 준다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내게 위로자 하나님이 계셔서 나는 행복합니다. 나의 모습, 이 모습이면 세상에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우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위로자가 될 수 있고, 나는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할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합니다, 지금 내 몸이 엉망으로 망가지고 불편해졌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때로 고난이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이 삶의 기막힌 비밀을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제 얼굴과 짧아진 손가락들 그리고 치료실에서 지낸 수많은 낮과 밤을 통해서 나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옛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나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행복해 지시기를 원하신다면 나눔의 삶을 사세요.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해 보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마음은 행복의 마음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9월 달은 “나눔의 달”입니다. 이제 11일은 민족의 명절인 추석입니다. 매번 명절을 맞이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주변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름다운교회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아서 이웃을 대접하며 나눔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가정에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나눠주는 일에는 앞장 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그것은 축복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금번 명절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① 사르밧 과부처럼 예비하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삽시다. ② 사르밧 과부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삽시다. ③ 사브랏 과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삽시다. ④ 사르밧 과부처럼 어려운 이웃을 대접하며 삽시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빈 통장을, 빈 지갑을, 빈 곡간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내 부족함을 채우시는 은혜를 얼마나 누려보셨습니까? 혹시 나는 왜 채우시지 않는가? 왜 나는 늘 부족하여 허덕이는가? 고민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내가 무엇을 섬겼는가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축복을 기대하며 그리고 믿음으로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채움을 받을까요? 누가 풍족함을 체험할까요? 죽을 각오로 섬기고, 하나님의 사람을 희생의 결단으로 섬기고, 축복의 약속을 믿음으로 섬기면 그 사람이 누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야 해결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기에 삶이라는 형편의 그릇을 보지 말고 말씀과 사람과 축복을 섬김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에게 자손 대대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맛보시기를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