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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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6:1)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면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린도후서 6장은 5장20절부터 그 문맥을 연결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바울이 이 그을 쓸때에는 몇장과 절로 나눈 것이 아니라 편지로 기록한 것입니다. 또 바울서신이 수집된 것은 주후 90년이후이기 때문에 그 편집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어디에 있다고 해서 서신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고린도후서 6장은 크게 셋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로 10절까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으로서의 입장을 설명하였고 11절부터 13절까지는 사역에 대하여 고린도교회의 보다 넒은 수용을 촉구하였으며 14절부터 믿는 자들의 생활 규범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5장 끝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화목의 직책은 그리스도의 사신된 새언약의 일군들의 역활임을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면하노니 하나님의 은! 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6:1)고 엄중히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본장의 내용은 바울의 권면이며 그리스도의 권면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도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말하여 우리의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음 것임과 그 때가 우리 앞에 와 있음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것은 바울이 지금이 은혜를 받을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 말하지만 그 말의 중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에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너무 소홀히 생각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고 죽으시고 자기를 믿는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알고 있고 우리는 그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는 영원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다만 복음이 우리에게 이르러 우리가 예수 그? ?볕돛?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할 때 우리는 복음의 빚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한 복음은 수많은 피의 보상을 치루고 우리에게 이르렀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5장 20절에서 지금 구원을 위한 주의 은혜를 위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이 '사신'이란 헬라어 원어는 '프레스뷰테스'로서 라틴어로 '레가터스'입니다. 이 말은 로마시대의 정치적 용어로서 로마 황제의 대리인 또는 로마 원로원의 사신이라는 의미를 모두 수용합니다.
그 당시 로마는 두가지 정치 체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로마의 지역은 원로원에서 관할 하였지만 새로운 점령국가나 위험지역은 황제가 친위대를 통하여 친히 통치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지역에 황제가 임명한 사신이 나가게 되는데 그를'프레스뷰테스'라 불렀습니다.
또 흥미로운 것은 로마군대가 어느 지역을 점령하였을 때 원로원에서는 10명의 사신을 파송하여 그 정부와 평화협정! 을 체결하게 되는데 그들을 '프레스뷰테스'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 여기서 말하는 '사신'이란 한 국가의 대사로서 그 국가의 주권을 갖고 행사하므로 대사의 말은 바로 그를 파송한 국가의 왕의 말이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신'이란 그리스도의 주권을 행사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들의 말은 곧 그리스도의 말이 됩니다.
바울이 구차하게 이런 설명을 하는 것은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일군들이 전한 복음의 위치와 권세가 어디에 있으며 복음의 사신들의 위치가 얼마나 막중한 것임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또한 복음의 일군들이 자신의 위치의 막중함을 깨달아 그 모든 일과 행동에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우리가 이 직책을 훼방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꺼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스스로 천거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위대한 선언입니다. 아무에게도 꺼리끼지 않게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그 살아 가는 삶에서 많은 제한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 '사신'된 자들의 삶이 먼저 '견딤'으로 시작됨을 언급하였습니다. 견딤이란 모든 환경으로부터의 초월된 믿음을 말하며 그것은 의로움을 이루는 기초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온전한 견딤을 이루기 위한 환경적 설정을 먼저 환난과 궁핍과 곤란을 통한 내적투쟁을 언급하였습니다.
'환난'(들립시스)는 근본적으로 육체적 압박을 말한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육체적 환난은 우리의 심령을 압박해 옵니다. 또한 '궁핍'은 문자 그대로 삶의 필요를 말하는 것이니다, 주님은 이를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였고 바울은 자급자족하기를 권면했습니다. 세번째로 언급한 '곤란'은 입지적인 조건을 말합니다. 피할 수도 도망갈 곳도 없는 처지를 당한 사람의 곤란함은 격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외적인 문제를 언급하여 '매맞음' 갇힘' '요란한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일군들이 그 나라와 사회적 씨스템과 관련되어 받아야할 고난을 언급한 것입니다. 여기서 '요란한 것'이란 무지몽매한 자들로부터 겪어야 하는 우격다짐은 마치 포호하는 바닷물소리와 같습니다.
바울은 계? 覃臼?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켜야 할 의무를 언급하여 '수고로움'과 자지못?과 '먹지못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스스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이러한 외적투쟁으로부터 온전한 견딘다는 것은 정말로 얼마나 위대한 힘입니까?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뮌습?위하여 우리 육체가 감당하여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보다 견디기 힘든 정신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깨끗함'을 언급하였습니다. 깨끗함이란 신 앞에서의 자신의 의로움를 표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한 '지식'은 자신이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알게 하는 영적인 길잡이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오래 참음'과 '자비함' 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없는 사랑'을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서 많은 실패를 하기 쉽습니다. 사람을 용납하고 인내하지 못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책망을 쌓을 때가 많습니다. '자비'란 엄격함과 반대어로 다른 사람을 향한 동정적인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이 많은 지식과 도에 이르면 엄격해지기 마련인데 자비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바울이 말한 '성령의 감화'란 '성령' 그 자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진 우리 삶의 거룩성과 의로움을 말한 것입니다. 또한 '거짓없는 사랑'이란 위선적인 사랑이 나타나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최근 많은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방하여 위선적인 행동들을 일삼고 있음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은 육체적으로 이기고 정신적으로 극복해 나가면 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신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바울은 복음의 사신이 되기 위한 세번째 단계를 언급하였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안에 있어 의의 병기를 좌우하고"(7절).
'진리의 말씀'이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 본체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에게 이것이 빠진다면 다른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예수께서는 이것을 전하기 위하여 오셨고 또 이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그의 사신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자신의 공로를 말할 수 없게 하는 하나님의 배려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의의 병기를 ? 쩔?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병기란 전쟁에 임한 무기를 말합니다. 좌우에 들었다는 것은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가추어야 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의로움'만이 우리를 모든 악에서 지키고 또 악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무기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를 나타냄으로 복음의 완성을 그리치고 사단에게 넘어지고 있습니다.
8절에서 바울은 서로 대칭되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사신된 명예로운 삶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먼저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라 말하여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누림을 언급하였습니다. 여기서 '욕됨'은 로마의 시민권의 박탈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마친 후에 영광된 하늘의 시민권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노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한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거론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복음의 일을 하다가 돌아 선 악한 이름들을 봅니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자신의 행위로 영광을 구하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도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 가운데서 받는 '그리스도의 사신'들의 처우와 하늘에 대한 우리의 실상을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자랑하여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10절)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쁘듯하고 넉넉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속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 오르지 않습니까? 이제 바울은 고린도성도들에게 가슴을 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라"(12절) 여기서 '심정'이란 단어는 킹제임스 성경에 '창자'(bowels)라 기록되었습니다. 이 단어를 확장하면 우리 몸 속에 있는 오장육부 기능을 의미합니다. 이 기능들은 우리의 생명을 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이며 독립기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기관들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율기관이 아닙니다.
아마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바울의 엄중한 가르침을 들으며 말로는 율법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의 주권적 교회라고 하면서 여러가지 규범을 준다면 도대체 복음의 자유는 무엇이냐고 ? 留??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사신된 자들로서 더욱 좁은 문안에 있음을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갈보리채플에서 설교를 듣는 어떤 사람들은 요즘 세상에 어떻게 성경에 기록된대로 살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뛰쳐 나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좁은 문을 통과하면 거룩함과 의로움의 평화가 우리를 영원한 자유를 누리며 우리는 그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14절부터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힘들어했던 문제를 다시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14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5장9절에서 음행과 관련하여 언급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의 일부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는 본질적으로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여 발생된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을 바로잡은 후 그 후유증으로 발생된 문제들을 아프터 서비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들의 사신된 사역적 위치와 입장을 ? 낯灼構? 그들 가운데 가장 대두되었던 문제들을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본질적으로 결혼과 관계된 말입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자들과 결혼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 삶의 자세가 바르게되고 온전한 직업을 갖게되자 많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호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이슈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혼의 기준을 그가 하나님을 아느냐 그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 온자인가를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인물과 학력과 직업과 가문을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믿음이 좋으니 결혼을 해서 그 가정을 전도하는 역활을 하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믿음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오직 믿음의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만이 지켜질 수 있는 성도의 거룩함입니다.
나는 믿지 않는 자들과 결혼하여 실족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또 아직 믿음생활을 하고 ! 있다고 해도 그가 격는 믿음의 방해와 고통은 마치 폭풍속에서 길을 잃고 사경을 헤메는 배와도 같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힘을 잃게 되고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마음은 강팍해지고 결국 그들은 믿음생활을 정리하고 세상으로 돌아가버리고 맙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말하였습니다. '벨리알'이란 '불량자'를 의미하며, 사단의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 믿지 않는 자들의 불량한 모습은 정말 보기조차 민망스럽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과의 삶의 관계를 언급한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같은 사업을 하며 오직 돈버는 일에 미친 불량자가 되고 있습니다.
또 '상관'이란 단어는 '모임과 교제'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직장 생활 속에서 믿지 않는 자의 모임과 교제에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여러분 서울 갈보리채플에서 주관하는 인터넷 카페 '크리스챤 펠로우쉽'의 친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결혼(육)과 사회적 관계(혼적관계)가 다음 단계에서는 영적 단계인 우상으로 되어감을 설명하였습니다. 성전이 우상의 전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얼마나 단호한 결단의 말씀이며 위대한 선언입니까? 우리는 전능자의 아들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말씀은 그 전능자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부디 자신을 성별하여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지키십시요, 7장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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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6장은 5장20절부터 그 문맥을 연결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바울이 이 그을 쓸때에는 몇장과 절로 나눈 것이 아니라 편지로 기록한 것입니다. 또 바울서신이 수집된 것은 주후 90년이후이기 때문에 그 편집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어디에 있다고 해서 서신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고린도후서 6장은 크게 셋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로 10절까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으로서의 입장을 설명하였고 11절부터 13절까지는 사역에 대하여 고린도교회의 보다 넒은 수용을 촉구하였으며 14절부터 믿는 자들의 생활 규범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5장 끝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화목의 직책은 그리스도의 사신된 새언약의 일군들의 역활임을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면하노니 하나님의 은! 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6:1)고 엄중히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본장의 내용은 바울의 권면이며 그리스도의 권면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도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말하여 우리의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음 것임과 그 때가 우리 앞에 와 있음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것은 바울이 지금이 은혜를 받을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 말하지만 그 말의 중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에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너무 소홀히 생각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고 죽으시고 자기를 믿는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알고 있고 우리는 그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는 영원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다만 복음이 우리에게 이르러 우리가 예수 그? ?볕돛?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할 때 우리는 복음의 빚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한 복음은 수많은 피의 보상을 치루고 우리에게 이르렀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5장 20절에서 지금 구원을 위한 주의 은혜를 위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이 '사신'이란 헬라어 원어는 '프레스뷰테스'로서 라틴어로 '레가터스'입니다. 이 말은 로마시대의 정치적 용어로서 로마 황제의 대리인 또는 로마 원로원의 사신이라는 의미를 모두 수용합니다.
그 당시 로마는 두가지 정치 체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로마의 지역은 원로원에서 관할 하였지만 새로운 점령국가나 위험지역은 황제가 친위대를 통하여 친히 통치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지역에 황제가 임명한 사신이 나가게 되는데 그를'프레스뷰테스'라 불렀습니다.
또 흥미로운 것은 로마군대가 어느 지역을 점령하였을 때 원로원에서는 10명의 사신을 파송하여 그 정부와 평화협정! 을 체결하게 되는데 그들을 '프레스뷰테스'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 여기서 말하는 '사신'이란 한 국가의 대사로서 그 국가의 주권을 갖고 행사하므로 대사의 말은 바로 그를 파송한 국가의 왕의 말이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신'이란 그리스도의 주권을 행사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들의 말은 곧 그리스도의 말이 됩니다.
바울이 구차하게 이런 설명을 하는 것은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일군들이 전한 복음의 위치와 권세가 어디에 있으며 복음의 사신들의 위치가 얼마나 막중한 것임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또한 복음의 일군들이 자신의 위치의 막중함을 깨달아 그 모든 일과 행동에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우리가 이 직책을 훼방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꺼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스스로 천거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위대한 선언입니다. 아무에게도 꺼리끼지 않게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그 살아 가는 삶에서 많은 제한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 '사신'된 자들의 삶이 먼저 '견딤'으로 시작됨을 언급하였습니다. 견딤이란 모든 환경으로부터의 초월된 믿음을 말하며 그것은 의로움을 이루는 기초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온전한 견딤을 이루기 위한 환경적 설정을 먼저 환난과 궁핍과 곤란을 통한 내적투쟁을 언급하였습니다.
'환난'(들립시스)는 근본적으로 육체적 압박을 말한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육체적 환난은 우리의 심령을 압박해 옵니다. 또한 '궁핍'은 문자 그대로 삶의 필요를 말하는 것이니다, 주님은 이를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였고 바울은 자급자족하기를 권면했습니다. 세번째로 언급한 '곤란'은 입지적인 조건을 말합니다. 피할 수도 도망갈 곳도 없는 처지를 당한 사람의 곤란함은 격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외적인 문제를 언급하여 '매맞음' 갇힘' '요란한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일군들이 그 나라와 사회적 씨스템과 관련되어 받아야할 고난을 언급한 것입니다. 여기서 '요란한 것'이란 무지몽매한 자들로부터 겪어야 하는 우격다짐은 마치 포호하는 바닷물소리와 같습니다.
바울은 계? 覃臼?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켜야 할 의무를 언급하여 '수고로움'과 자지못?과 '먹지못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스스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이러한 외적투쟁으로부터 온전한 견딘다는 것은 정말로 얼마나 위대한 힘입니까?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뮌습?위하여 우리 육체가 감당하여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보다 견디기 힘든 정신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깨끗함'을 언급하였습니다. 깨끗함이란 신 앞에서의 자신의 의로움를 표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한 '지식'은 자신이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알게 하는 영적인 길잡이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오래 참음'과 '자비함' 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없는 사랑'을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서 많은 실패를 하기 쉽습니다. 사람을 용납하고 인내하지 못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책망을 쌓을 때가 많습니다. '자비'란 엄격함과 반대어로 다른 사람을 향한 동정적인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이 많은 지식과 도에 이르면 엄격해지기 마련인데 자비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바울이 말한 '성령의 감화'란 '성령' 그 자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진 우리 삶의 거룩성과 의로움을 말한 것입니다. 또한 '거짓없는 사랑'이란 위선적인 사랑이 나타나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최근 많은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방하여 위선적인 행동들을 일삼고 있음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은 육체적으로 이기고 정신적으로 극복해 나가면 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신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바울은 복음의 사신이 되기 위한 세번째 단계를 언급하였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안에 있어 의의 병기를 좌우하고"(7절).
'진리의 말씀'이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 본체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에게 이것이 빠진다면 다른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예수께서는 이것을 전하기 위하여 오셨고 또 이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그의 사신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자신의 공로를 말할 수 없게 하는 하나님의 배려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의의 병기를 ? 쩔?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병기란 전쟁에 임한 무기를 말합니다. 좌우에 들었다는 것은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가추어야 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의로움'만이 우리를 모든 악에서 지키고 또 악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무기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를 나타냄으로 복음의 완성을 그리치고 사단에게 넘어지고 있습니다.
8절에서 바울은 서로 대칭되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사신된 명예로운 삶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먼저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라 말하여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누림을 언급하였습니다. 여기서 '욕됨'은 로마의 시민권의 박탈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마친 후에 영광된 하늘의 시민권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노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한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거론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복음의 일을 하다가 돌아 선 악한 이름들을 봅니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자신의 행위로 영광을 구하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도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 가운데서 받는 '그리스도의 사신'들의 처우와 하늘에 대한 우리의 실상을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자랑하여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10절)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쁘듯하고 넉넉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속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 오르지 않습니까? 이제 바울은 고린도성도들에게 가슴을 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라"(12절) 여기서 '심정'이란 단어는 킹제임스 성경에 '창자'(bowels)라 기록되었습니다. 이 단어를 확장하면 우리 몸 속에 있는 오장육부 기능을 의미합니다. 이 기능들은 우리의 생명을 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이며 독립기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기관들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율기관이 아닙니다.
아마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바울의 엄중한 가르침을 들으며 말로는 율법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의 주권적 교회라고 하면서 여러가지 규범을 준다면 도대체 복음의 자유는 무엇이냐고 ? 留??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사신된 자들로서 더욱 좁은 문안에 있음을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갈보리채플에서 설교를 듣는 어떤 사람들은 요즘 세상에 어떻게 성경에 기록된대로 살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뛰쳐 나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좁은 문을 통과하면 거룩함과 의로움의 평화가 우리를 영원한 자유를 누리며 우리는 그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14절부터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힘들어했던 문제를 다시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14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5장9절에서 음행과 관련하여 언급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의 일부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는 본질적으로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여 발생된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을 바로잡은 후 그 후유증으로 발생된 문제들을 아프터 서비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들의 사신된 사역적 위치와 입장을 ? 낯灼構? 그들 가운데 가장 대두되었던 문제들을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본질적으로 결혼과 관계된 말입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자들과 결혼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 삶의 자세가 바르게되고 온전한 직업을 갖게되자 많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호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이슈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혼의 기준을 그가 하나님을 아느냐 그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 온자인가를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인물과 학력과 직업과 가문을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믿음이 좋으니 결혼을 해서 그 가정을 전도하는 역활을 하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믿음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오직 믿음의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만이 지켜질 수 있는 성도의 거룩함입니다.
나는 믿지 않는 자들과 결혼하여 실족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또 아직 믿음생활을 하고 ! 있다고 해도 그가 격는 믿음의 방해와 고통은 마치 폭풍속에서 길을 잃고 사경을 헤메는 배와도 같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힘을 잃게 되고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마음은 강팍해지고 결국 그들은 믿음생활을 정리하고 세상으로 돌아가버리고 맙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말하였습니다. '벨리알'이란 '불량자'를 의미하며, 사단의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 믿지 않는 자들의 불량한 모습은 정말 보기조차 민망스럽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과의 삶의 관계를 언급한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같은 사업을 하며 오직 돈버는 일에 미친 불량자가 되고 있습니다.
또 '상관'이란 단어는 '모임과 교제'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직장 생활 속에서 믿지 않는 자의 모임과 교제에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여러분 서울 갈보리채플에서 주관하는 인터넷 카페 '크리스챤 펠로우쉽'의 친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결혼(육)과 사회적 관계(혼적관계)가 다음 단계에서는 영적 단계인 우상으로 되어감을 설명하였습니다. 성전이 우상의 전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얼마나 단호한 결단의 말씀이며 위대한 선언입니까? 우리는 전능자의 아들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말씀은 그 전능자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부디 자신을 성별하여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지키십시요, 7장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