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네시보로의 신앙가정”(딤후 1:15-18) 

본문의 말씀은 오네시보로의 가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서신으로 하나님 앞에 전도자가 갖추어야 할 개인적인 영성과 인품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디모데후서는 순교의 제물로서 죽음을 눈앞에 둔 사도 바울의 회고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사실을 깨닫고 디모데의 소심한 성격과 연약한 육체를 염려하면서 그에게 맡겨진 복음전도자의 사명을 다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본문에서 디모데에게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디모데가 본 받아야 할 대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목회 결산은 다른 사람들이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성공적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자기 정열을, 아니 인생 전부를 그리스도께 드려 헌신한 것만 보아도 우리는 쉽게 그런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자로서, 선교사로서 그는 지칠 줄 모르고 복음을 위하여 달음질쳤습니다. 그의 목회 생활 속에는 바울을 위해 눈이라도 빼어줄 만한 신실한 동역자들이 있었고, 바울을 돕기 위해 물질도 아끼지 않았던 성도들과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눅눅하고 음침한 감옥에서 이제 순교의 제물로서 생(生)을 마감할 것을 내다보면서 도무지 자기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한 사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자기를 배반하고, 복음을 등지고 떠나는 아픔도 경험하였지만, 그래도 바울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며 노(老) 사도를 상쾌하게 했던 신앙의 동지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오네시보로'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짧은 구절 속에서 그의 신앙과 아름다운 인격을 우리는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그의 이름값을 하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유익을 가져오는 자'인데 그는 전도자 바울에게 유익을 자져다 주는 충성스러운 동역자였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성격과 고상한 행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모습임을 쉽게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오네시보로의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은헤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주의 종을 버리지 않은 가정입니다.(15절) 
본문 15-16절 상반 절에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원컨대 주게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오네시보로는 주의 종을 버리지 않은 가정이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희비애락(喜悲哀樂)이 엇갈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비애와 기쁨이 엇갈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바울을 잘 따르고 섬기다가 도중에 바울을 버리고 배반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끝까지 바울을 돕고 잘 섬긴 가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① 그런데 바울을 버린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그 이름이 거명된 두 사람이 있는데,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로마 옥에 갇히게 되자 바울을 외면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찾아보지도 않고 돌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특별히 바울을 섭섭하게 했고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한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한때는 바울을 환영하고 잘 돌보고 도와준 성도들이었으나 바울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래서 성도들의 기도와 보살핌과 도움이 더욱 필요할 때 바울을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한 일은 바울을 버린 일 밖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가정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런데 기억할 것은 예수님께서도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일 때에는 많은 사라들이 그를 환영하고 따랐으나 예수님이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니 예수님을 다 버리고 떠났던 것을 볼 때에 시종여일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따르며 충성한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무 고마워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손을 위해서 울라”고 하시면서 위로해 주시고 축복된 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② 이와 같이 바울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배반하는 가운데 “오네시보로의 가정”은 바울을 버리지 않았고 끝까지 변함없이 잘 돕고 보살펴주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그의 이름의 뜻과 같이 바울에게 유익한 자로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라고 축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가정이 얼마나 축복된 가정입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이 부류의 가정 중에서 어떤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성경 자체가 벌써 그 해답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오네시보로의 가정처럼 주의 종을 버리지 않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가정을 통하여 답게 런데 기억할 것은 예수님께서도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일 때에는 많은 사라들이 그를 환영하고 따랐으나 예수님이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니 예수님을 다 버리고 떠났던 것을 볼 때에 

2. 주의 종을 유쾌하게 한 가정입니다.(16절 중) 
본문 16절 중반 절에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오네시보로는 주의 종을 유쾌하게 한 가정이었습니다. 여기 '유쾌하게'라는 말은 '새로운 바람을 받는다', ‘새 정신이 든다'는 뜻입니다. 즉 이것은 곧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찾아와 위로하고 즐겁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기분을 좋게 바꾸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신자들 중에는 바울을 불쾌하게 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상쾌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는 잠언 25장 13절에서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의 말씀처럼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바울을 어떻게 상쾌하게 해 주었는지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아마 성도들의 좋은 소식과 여러 교회들의 소식 그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제공함으로써 바울의 마음이 상쾌하게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주목 할 것은 몇 번 정도는 다른 사람을 유쾌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의 가정은 몇 번 정도가 아니라 “자주 유쾌하게 한 가정”이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그 가정은 자녀들까지도 어버이의 신앙을 본받아서 모두가 주의 종 바울을 유쾌하게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그 가정 식구들은 하나님이 보낸 사자들을 달려 나가서 영접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5절)하고 잘 대접해 보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장 창세기 19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조차 룻도 하나님의 사자들이 소돔에 찾아갔을 때 아브라함처럼 그들을 유쾌하게 해 드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배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들은 우리 자손들에게 좋은 신앙의 전통을 남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자녀들이 좋은 신앙의 전통을 본받게 되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오네시보로와 그 가정 식구들이 바울 사도를 유쾌하게 해 드린 것은 상대방에게만의 축복이 아니라 그와 그 가정에게 먼저 축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본문 16절 중반 절에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하게 하고”라는 말씀대신에 “저가 나를 자주 불쾌하게 하고”라고 기록되었다면 복이 되어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기록되었다면 그 누가 그와 그 가정을 우러러볼 것이며, 신앙의 가정이라고 추앙할 것이며, 그 가정을 본 받으라고 말하겠습니까? 이것은 히 13:17 이하에서 “너희는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한 말씀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 18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보낸 사자들을 쾌활케 한 다음에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창 18:10에서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후사에 대한 소식을 알려주셨습니다. 둘째는 창 18:18에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니라”는 장차 이루어질 축복에 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세 번째는 창 18:20-21에서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비밀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주의 선대하는 자에게 복을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주의 종에게 섭섭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주의 종에게 근심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헌신과 충성스러운 모습 때문에 제 자신이 상쾌해지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 때문에 우리 주님의 마음이 너무 좋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일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3. 주의 종의 어려움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했던 가정이었습니다.(16절 하) 
본문 16절 하 반절에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오네시보로의 가정은 복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했던 가정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사슬'이란 “극악한 죄수들을 억압하기 위해 결박하는 도구”입니다. 
물론 바울은 죄수 아닌 죄수이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사슬로 결박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 전파로 말미암아 당하는 모든 수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롬1:16).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서도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바울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그런데 바울이 복음으로 말미암는 수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오네시보로도 바울이 지금 당하고 있는 불명예스러운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세인들은 바울을 정치범으로, 사상범으로 오인하고 처단하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복음 때문에 사슬에 매인 것이 부끄럽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의 당당한 그러한 모습이 오히려 그에게는 영광스럽게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해보셨습니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조롱과 핍박과 억울함을 당해보셨습니까? 예수 때문에 받는 수치는 결코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은 우리에게 부끄러움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신자의 영광임을 여러분은 믿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9:26). 

4. 주의 종을 부지런히 찾아온 가정이었습니다.(17절) 
본문 17절에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오네시보로는 주의 종을 부지런히 찾아온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가정입니까? 교통도 불편한 때에 소사아시아 지방(수도 에베소)에서 바다를 건너서 로마까지 면회를 간다는 것은 보통 신앙과 정성이 아닙니다. 많은 정력과 수고와 경비가 드는 일입니다. 더욱이 십자가에 정죄 받아 죽으신 십자가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전하다가 죄인의 된 바울을 여러 번 찾아 만났다는 것은 그와 더불어 고난을 같이함은 물론이고 생사를 같이하는 정신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마 25:36)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재차 투옥되자 그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로마에까지 찾아와서 바울을 섬겼습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포함된 아시아(소아시아의 서쪽 끝에 위치한 로마 제국의 한 도(道)로 디모데가 거주한 에베소가 수도임)에 있는 모든 사람(문자적인 의미보다 바울의 서운함을 강조하는 표현)이 바울을 버린(15절) 슬픈 기록도 있지만 오네시보로는 부지런히 바울을 찾았습니다. 그가 로마의 길을 알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바울의 투옥 장소가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지런히 바울을 찾았습니다. 그는 어떠한 수고도 아끼지 않고 전도자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당시 세계의 수도인 로마의 감옥에 그것도 정치범으로, 사상범으로 오인을 받고 수감된 바울을 찾아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죄인을 계속 방문한다는 것은 그의 신변에도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네시보로는 계속해서 바울을 찾아 만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방문이야말로 바울을 유쾌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네시보로와 같은 믿음의 성도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바울은 비록 옥중생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얻어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같은 옥중서신을 서신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네시보로의 가정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라는 말씀을 실천한 신앙인 이었습니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여러 가지 일로 목회자를 찾아 상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성도와 목회자만이 가지는 특권입니다. 오네시보로는 이 특권을 누리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5. 주의 종을 잘 섬기었던 가정이었습니다.(18절) 
본문 18절에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오네시보로의 가정은 주의 종을 잘 섬기었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부터 바울과 복음을 위해 봉사하며 섬겼던 인물이었습니다. 에베소에서의 그의 섬김은 디모데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인정할만한 봉사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떠나도 그는 전도자를 위하여 값진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주의 종을 섬기겠다는 그의 충성은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봉사는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유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베소에 있을 때나 지금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나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변함없이 전도자를 섬겼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바울로 하여금 위안이 되었고 복음 사역에 큰 힘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옥에 갇힐 때에 부지런히 찾아 면회하고 위문하면서 섬기고 봉사한 것만이 아니라 평소 에베소에 있을 때에도 잘 섬겼던 것입니다. 평소에도 잘 섬기고 봉사했기 때문에 어려울 때도 잘 봉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려운 때에도 잘 봉사하고 섬긴 사람이니까 평소에는 더 잘 섬겼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바울을 잘 섬겼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초창기 성도였던 자주 장사 루디아는 하나님도 잘 공경했다고 했고, 바울의 말에 의하면 바울의 말을 잘 청종했으며 “나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 16:14-15) 
그런데 빌립보 교회의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수고했고, 바울과 함께 군사돼어 갇힌 자 된 바울을 돌보며 그의 쓸 것을 도우며 섬기다가 병까지 나게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빌 2:20에서 바울은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의 소유자들입니까? 우리의 가정도 이와 같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의 종에게 큰 힘이 되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6. 주의 종에게 축복받은 가정이었습니다.(16절 상, 18절 상) 
오늘 본문에 보면 오네시보로와 그 가정을 위한 바울의 축복(기원, 축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와 그 가정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 감사, 감격해서 이 편지를 쓰다가 중간중간 “원컨대...”하면서 두 번이나 축복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 축복은 16절 상반 절에서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16절 상)라는 축원입니다. 이 축원은 오네시보로의 가족들을 위한 축복으로서 바울은 자기가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을 때에 이모저모로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 준 오네시보로의 모든 가족들에게 주님께서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도록 축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 속에는 모든 아름다운 축복이 다 들어 있습니다. 

두 번째 축복은 18절 상반 절에서 “원컨대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오네시보로을 위한 축복기도입니다. “주께서 그 날에”란 말은 주님의 재림의 날과 주의 심판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관건은 마지막 심판 앞에서 주님의 긍휼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약 2:13에서 “긍휼을 행치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니라”고 말씀하고 것처럼 마지막 심판에는 긍휼을 받지 못할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에게 온갖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준 오네시보로가 현세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으로 갈리는 최후심판대 앞에서 주의 긍휼을 입은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날에 공력에 따라 상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마태복음서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1-42).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바울의 충성스런 동역자 오네시보로의 가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의 가정은 ① 주의 종을 버리지 않은 가정이었습니다. ② 주의 종을 유쾌하게 한 가정입니다. ③ 주의 종의 어려움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했던 가정이었습니다. ④ 주의 종을 부지런히 찾아온 가정이었습니다. ⑤ 주의 종을 잘 섬기었던 가정이었습니다. ⑥ 주의 종에게 축복받은 가정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오네시보로의 가정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오네시로보의 가정처럼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면 쉽게 등지던 소아시아에 살았던 부겔로와 허모게네 같은 사람이 아니라, 어떠한 형펀과 처지에서도 변절되지 않는 복음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축복받은 교회는 오네시보로와 같은 가정이 많은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함께 할 오네시보로가 우리 교회에 있을 때 그 교회는 축복받은 교회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수치를 모르는 오늘의 오네시보로가 우리 교회에 있다면 그 교회는 행복한 교회일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목회자의 마음은 유쾌하게 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을 유쾌하게 하며, 주님과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고, 주님을 부지런히 찾아와 섬기는 오네시보로가 바로 여러분이라면 우리 교회는 축복 받은 교회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요구하시고, 이 시대가 요구하고, 우리 교회가 요구하는 오늘의 오네시보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죽음을 기다리는 바울이었지만 오네시보로 같은 충성스러운 동역자가 있기에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고, 눅눅하고 음산한 지하 감옥에서도 마음이 상쾌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축복스러운 가정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