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7:1) 자신을 깨끗히 하자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과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하자" 

A. 하나님의 약속 
바울은 오늘 7장 서두에서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약속'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 '이 약속'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이 말씀은 문맥상 6장14절 이하의 말씀으로부터 이어져햐 할 것입니다. 바울은 6장17절에서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6:17)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중요한 원리이며 또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론의 자손들을 성별하시고 제사장 직분을 주실 때 거룩한 직책의 막중함을 들어 "내가 저의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출29:45) 말씀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근거로 "믿지않는 자와 멍에를 메지 말라 하였고 또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삶에서 조화되지 말며, 믿지 않는 자들과 상관(동화)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고후6:14-16 참조). 

그러나 이 약속은 오직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것으로 우리는 율법에 의한 언약의 백성이 아니라 새언약의 백성들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미 "저가 또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군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말한 바 있습니다. 

1. 새 언약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성찬을 베푸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또 이와 같이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나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고전11:24)말씀 하셨습니다. 새 언약이라 하셨은즉 과거의 언약은 시효가 끝난 것이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살리라"(요6:57) 하셨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첫 시작이며 토대입니다. 이 언약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으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2. 두번째 약속 
하나님의 두번째 약속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하리라"(요14:23)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보혜사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두번째 언약은 첫번째 언약에 들어 온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로서 첫번째 언약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토대이라면 두번째 약속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바울은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이치심을 받았으니"(엡1:13) 기록하였고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말하며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말하였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과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 

3. 세번째 약속 
오늘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세번째 약속은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후6:18)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원리이면서도 믿지 않는 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어떻게 사람도 아니고 보이지도 않는 신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고 의심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 자신들은 이미 자신들의 신들과 그러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4)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영광을 영광께 돌립니다(요8:47). 

B.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 
이러한 까닭으로 바울은 우리에게 "이러한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켜야할 수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두려워함 
바울은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감각과 지식을 말합니다. 잠언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기록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감각과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요14:17)하였습니다. 

2. 온전한 거룩함 
바울은 두번째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하였습니다. 거룩함이란 정말 어려운 단어 입니다. 구약의 히브리어의 어원을 따르면 종교적 언어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기 위하여 세속적인 것을 '잘라낸다'(성별)는 의미로서 헬라어 '하기오스'로 번역되면서 '완전히 다르게 구별하다'로 이해되었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공의, 그리스도의 신격과 관련하여 성도의 성별과 품격을 나타내며, 성도의 윤리적 신실함과 도덕적 정결함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3. 육과 영의 깨끗함 
세번째로 바울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히 하라'명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어서 거룩한 성도라는 의식은 있는데 육체의 더러움에서는 세상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조건을 '영과 육의 더러움에서의 탈출'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노릇이겠습니까? 

오늘 바울은 같은 탄식을 하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자기들을 증거하여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뻬앗은 일이 없노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무에게도'라는 말은 인간관계를 말하는 것이며, '불의'란 종교적 용어로서 잘못된 길로 이끌지 않은 것을 말하며 '해롭게'라는 말은 부패하지 않은 도덕성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이 말을 하게 된 동기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함이라"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사역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불의하고 해롭게하고 속여 빼앗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 "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말하고 있습니다. 

C.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4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그 무엇도 꺼리김 없고 당당할 때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이처럼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가 과연 사단의 유혹에서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능히 이길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러나 바울은 자기 입으로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5) 시인하여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랴?"(롬7:24) 고 탄식하였습니다. 

1. 사모하는 제자 
사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발생된 모든 문제를 놓고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일들을 바로 잡기 위해 장문의 편지 즉 오늘날 우리가 보는 고린도전서를 보내고 그 편지를 받은 그들의 반응을 알고 싶어서 디도가 돌아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고후2:12,13 참조). 마치 잘못된 자녀를 책망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부모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한 중에 그들이 처한 상황은 점점 힘들어져 바울은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5절)라 술회하였습니다. 몸은 쇠약하고 아프며 사방으로 공격을 받았으니 그들이 처한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위로하심 
바울은 그 때의 자신들의 처지를 가리켜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다"(6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업친데 겹친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은 마음의 근심과 사방으로의 우격다짐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근심 가운데 애타게 기다리던 디도가 온 것입니다. 바울은 그 때의 기쁨을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말하였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런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디도를 보내고 자신의 편지로 하여 대적자들에게 디도가 고난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했었습니다. 우리는 이 글 속에서 사랑하는 제자를 사지로 보낸 바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사히 돌아 온 디도를 통하여 고린도 성도들의 회심과 복음을 사모함과 믿음의 열정을 듣고 그는 그동안 쌓였던 모든 근심과 시름들을 내려 놓았습니다. 

3. 세상의 근심 
바울은 여기서 새로운 믿음의 비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10절) 이것은 그리스도 복음으로 환난을 당하는 우리에게 힘을 솟게하는 위대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 그 누가 근심을 좋아 하겠습니까? 근심이란 정말 사람의 가슴을 태우고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가시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중 근심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요즘 신문을 펼치면 지위 높은 위정자들이나 재벌들이나 노동자들이나 또 대형교회 목사들에게 이르기까지 근심 덩어리 투성입니다. 과연 그들이 하는 근심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결국 먹고 마시고 후회 투성인 일을 위한 것이 아닌가요? 

자식을 키우는 사람들은 자식으로 인한 기쁨이 있고 또 근심이 있게마련입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이며 친구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 속에서는 근심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새 언약의 일군들에게도 복음의 사역으로 인한 근심이 있게 마련입니다. 

D. 성령의 탄식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노라"(롬8:2)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하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바울은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과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외친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그리스도의 지체인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히 지킴으로서 우리의 마음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롬8:27) 기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