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경이로운 삶 
( 출 16:13-18, 눅 11:2-4 ) 
 
 
 
 
  
제가 처음 군에 입대하여 부대에 전입한 다음 한 주간의 자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휴가를 얻었습니다. 그 때 처음 휴가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휴가를 얻어 집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을 하면 가장 보람 있는 첫 휴가가 될까?” 혼자서 생각해보니 할 일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만나야 할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그 모든 일, 모든 사람을 다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차피 다 할 수 없다면 가장 중요한 것만 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부모님께 인사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오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가서 부모님께 훈련을 잘 마치고 왔노라고 인사하고 곧장 기도원에 갔습니다. 가서 며칠을 기도하며 찬송하며 지냅니다. 그 때 하늘을 봐도 신비롭고, 나뭇잎을 봐도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물소리는 어쩜 그리 아름다운지 모든 것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하나님의 창조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원에서 내려와 부모님께 인사하고 부대에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매일 보는 것이 경이롭고 재미 있습니까? 매일 접하는 일들이 정말 재미 있고 신비롭게 다가옵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의 일과가 기대되고 가슴이 뜁니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활기가 있습니까? 내 삶이 생각만 해도 은혜롭고 즐겁습니까? 우리의 삶은 우리의 생각의 차이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합니다. 존 템플턴은 “마음 속에서 일어난 생각은 그 속성상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고 하였습니다. 80-20법칙에 의하면 20%의 생각은 80%의 삶을 좌우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은 우리의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 못합니다. 좋은 생각과 행동은 결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없습니다. 나쁜 생각과 행동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생각은 우리의 손과 발을, 우리의 행동을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의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눈으로 매일의 삶을 경이로운 삶을 만들어야 합니다. 

마음이 그렇지 못하면 하다못해 하늘을 바라보세요. 하늘에는 희망이 있고, 새 힘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면서 어떤이는 침울하고 지겨운 삶을 삽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삶이지만 어떤이는 유쾌하고 희망찬 삶을 삽니다. 최근에 리더십 전문가 존 맥스웰이 쓴 ‘생각의 법칙’(Thinking for Change)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전체의 내용은 생각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식 같은 말이지만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적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아침에 땅에 내린 만나를 보고 경이롭고 신비했습니다. 매일 똑같은 음식이며 똑같은 날이지만 이 경이와 신비가 40년을 계속했다고 했습니다. 매일 경이로운 삶입니다. 매일 신비로운 삶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도 매일 경이와 신비가 가득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백성들은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녁과 아침에 각각의 양식을 공급합니다. 저녁 메뉴와 아침 메뉴가 달랐습니다. 그들이 매일의 양식에 싫증이 날까봐 하나님이 배려하신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양식은 매일 내리는 양식입니다. 하루에 적절하게 먹게 하신 양식입니다. 어떤 날은 많이 먹고 어떤 날은 적게 먹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으로 많이 거두어 먹고 남으면 벌레가 생겨 먹지 못하고 버렸습니다. 이것도 신비로운 일입니다. 안식일애는 거두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먹을 양식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것도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들이 매일을 수고하지 않고 먹는게 신비의 연속이었습니다. 만나는 신비한 음식입니다. 먹을 때마다 맛이 있는 음식입니다. 40년을 똑같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고 그들은 “오늘 뭐 좀 다른 것 없어?”라고 하지 않고 매일 아침 신비롭게 먹었습니다. 아이들을 보세요. 며칠만 똑같은 반찬을 먹어도 “우리는 왜 매일 이것만 먹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40년을 먹어도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 40년 내내 경이롭고 신비한 음식이 만나였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3년 동안 매끼를 다른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궁중 요리사들이 각 집의 온갖 음식을 다 동원하여 중국의 음식 종류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요리 책에 있는 요리 가지 수만 하더라도 3천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음식 까다롭습니다. 자기 입맛이 없는 것은 모르고, 며느리 손재주만 타박하는 시어머니가 있다고 합니다. 입맛이 없으면 아무리 맛있어도 맛있는 음식이겠어요? 날마다 감사하면 맛없는 음식이 없습니다. 수도원의 음식은 최소한의 음식입니다.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입니다. 매일 거의 똑같은 음식입니다. 밀가루 빵과 콩 삶은 것과 올리브가 전부입니다. 그런데도 감사하니 맛이 있어요. 하나님의 신비가 있으면 매일 경이로와요. 매일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매일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에 따라 매일 똑같은 지겨운 삶을 살기도 하고, 매일 다른 신비로운 삶도 삽니다. 

어떤 분의 가게에 심방을 갔습니다. 가서 근황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분이 제게 “우리야 매일 똑같지요. 아침에 나와서 가게 문 열고, 저녁에 들어가고, 집에 들어가서 정리하고 잠자고 또 아침이면 나오곤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오늘 돈 얼마나 벌었어요?” 그 분이 얼마를 벌었답니다. “어제는 얼마를 벌었어요?” 어제는 얼마를 벌었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 보세요. 어제 보다 오늘이 조금 더 벌었네요. 매일 조금 수입도 차이가 나고, 오는 사람도 다르고, 다른 얘기하는데 왜 똑같다고 그럽니까? 매일 다른 삶이지요.” 우리의 생각에 따라서 얼마든지 매일 다르고, 신비롭고, 재미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하기야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사람 만나고, 가르치고, 설교 준비하고, 심방하고 그리고 주일이면 설교하고, 또 사람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매일 다른 삶이지요. 매번 다른 사람 만나지요. 대화의 내용이 다르지요. 설교할 때마다 다른 설교하지요. 결혼 주례할 때면 매번 다른 사람이지요. 장례식 가면 매번 다른 사람이 돌아가시지요. 얼마나 재미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은 매일 “이것이 뭐냐”라고 경탄하는 신비로운 삶의 연속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그대가 하루 하루 그대의 생활의 기적에서 나오는 경이를 그대 마음에 간직한다면 그대 고통도 기쁨 못지않게 놀라움을 보이게 되리. 그리하여 그대 슬픔의 계절들은 평온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을”이라고 하였습니다. 매일 기대감이 넘치고, 경이로운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즐거움도, 놀라움도, 감사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입니다. 삶을 신비로 볼 때에만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신비로 본다는 것은 내가 아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아는 것을 내려놓고 모르는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둘째,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양식입니다. 
만나는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은 음식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어떤 사람은 경이롭고, 어떤 사람은 경이롭지 않은 음식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경이로운 음식입니다. 모두에게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면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정당한 요구입니까? 당시에는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경제 생활이란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당시의 상황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잘 난타납니다. 아마 구약 시대는 이런 음식에 대한 갈급함이 더 했을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감히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은 엄청난 사실입니다. 모자람이 없는 삶은 여호와가 목자일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목자는 모자람도 남음도 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신명기 8:2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왜 만나를 주셨습니까?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하십니다. “마침내”란 말을 묵상해 보세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마구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통하여 낮추시고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면 마침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근거는 만나입니다. 하루에만 넉넉한 양식이 하나님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은 양식을 먹고 남고 버리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최근에 인디언들의 삶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옵니다. 제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을 주문하여 보고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욕심 없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땅을 침범한 백인들이 땅을 차지한 자격지심으로 포악한 사람, 몽매한 사람으로 매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인디언에 대한 바른 평가를 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자연에 대한 지혜가 넘칩니다. 그 책에는 “백인들은 그들의 끝없는 욕심은 대지를 다 먹어치우는 것도 모자라 끝내 황량한 사막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고 합니다. 인간의 욕심이란 모든 바닷물을 다 삼키고도 모자랍니다. 오마하족의 격언에는 “훔친 음식은 결코 배고픔을 채워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고 대지와 친화하고 가지는 것보다 베푸는데 의미 둘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일용할 양식이 신비로와질 것입니다. 만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삶의 경이로움, 신비로움은 욕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셋째, 경이로운 삶은 40년을 계속됩니다. 
출애굽기 16:35에는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사람 사는 땅”을 “가나안 지경”이라 합니다. 광야는 사람 사는 곳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사람이 살 데가 못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 살 만한 곳도 못되는 척박한 곳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가장 은혜롭게, 풍부하게,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놀라는 경이로운 40년의 삶을 살았습니다. 신명기 2:17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고 합니다. 날마다 경이로움, 신비로움, 놀라움, 새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움이 매일 계속되는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난안에 들어갈 때까지 이 경이로움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은총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지금도 주시는 은총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생각을 가다듬고 보세요. 뜨는 해와 스치는 사람, 호흡하게 하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경이로움과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신령한 가나안인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매일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감탄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마다 “하나님 무엇을 주시렵니까?”(창 15:2)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무엇인가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면 수지 맞습니다. 매일 하나님께 “무엇을 주시렵니까?”라고 하는 신비한 기대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이 불행한 어린이를 부모는 아주 어렵게 키웠습니다. 의술의 발달로 15세쯤 되는 해에 수술을 하여 어린이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눈을 뜨고 보는 이 세상은 신비롭다 못해 이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어느날 이 소년을 아룸다운 대자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지 15년만에 보는 자연의 세계는 너무나 아름다왔습니다. 소년은 어머니에게 원망했습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가 이 땅 위에 있음을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그때 어머니는 울먹이며 “난들 왜 말해주고 싶지 않았겠느냐. 말해 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내가 설명을 한다 해도 네가 알아들을 수 있었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름답고 신령한 세계를 우리가 아무리 설명을 잘 듣는다 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 소년과 같은 원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경이로운 삶을 주셔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합니다. 마음이 둔해 깨닫지 못합니다. 날마다 경이로운 삶을 보고도 경이로울게 없다고 합니다. “왜 나에게는 감격도, 기쁨도, 경이로움도 안 주십니까?”라고 어리석은 불평을 할 수 있습니다. 눈을 떠 보세요. 온통 하나님의 신비로 가득찬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매일 주시는 것은 경이로음과 신비함 그 자체입니다. 어니 젤린스키는 말했습니다. “어제는 역사, 내일은 신비, 그리고 오늘은 선물이다”(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mystery, today is a gift).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제도 신비, 오늘도 신비, 내일도 신비이다”. 정말 우리의 삶이 경이로움의 연속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경이감과 열정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세계가 온통 경이로움입니다. 그래서 아기들은 말을 배우면 “이게 뭐야?”로 시작합니다. 보는 것마다 “이게 뭐야?”라고 묻습니다. 아기들은 매일 만나를 경험하는 삶을 삽니다. 어른이 되면 “이게 뭐야?”가 끊어집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이 우리 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만나의 경이로움이 매일 똑같이 반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온통 신비입니다. 온통 경이로움입니다. 사람의 몸은 생체의 경이로움 덩어리입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경이로움의 현장입니다. 우리의 삶은 경이로움의 경험입니다. 미국에서는 그런답니다. 아무리 봐도 한국은 망해야 되고, 재무구조나 노사문제나 모든 문제를 보면 안돼야 하는데 되고 있어서 이상한 나라라고 합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니 지난 달에는 수출이 172억 달라로 월간 기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습니다. 부산항의 크랜인이 태풍에 무너져 망해야 하는데 망하기는커녕 더 잘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국은 참 경이로운 나라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것이 무엇이냐”하고 신비롭게 살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매일매일 경이로움의 연속으로 삽시다. 우리의 사는 날이 앞으로 40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하루하루의 남은 날동안 날마나 “이것이 무엇이냐”, 아침마다 경이롭고, 밤마다 감사가 넘치는 감동의 연속으로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