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시 13:1-6)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언제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다고 느껴질 때입니다. 바로 이 때에 우리는 종종 극심한 고통과 영적 상실감을 느껴집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는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는 참으로 힘이 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즐겁게 해야 하는데 기도하여도 응답이 없다면 목소리를 높여서 기도하지 쉽지 않습니다. 어려운 중에 헌신하고 봉사하면 축복은 아닐지라도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느낌이 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에 우리는 딜레마에 빠집니까? 내가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내가 계속해서 기도생활을 하는가?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우리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저자 다윗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가운데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6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탄식의 소리가 4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비탄시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선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기 자신을 조롱하고 능멸하는 원수들이 날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계시며 침묵하고 있는 것과 같은 답답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오랜 방랑 생활을 하는 중에 그 영혼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기록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은 결코 탄식과 절망의 단계에서 머물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세 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탄식과 절망의 단계에서 기도의 단계, 찬양의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순서적이고 점진적입니다. 좌절 중에 오래 빠져 있던 사람이 드디어 기도의 자리로 옮기게 되고 기도의 자리에 들어간 사람이 드디어 찬양의 고지에 올라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습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본문은 비록 짧은 시이지만 본시를 끝까지 읽는 이들로 하여금 극심한 고통 중에서의 애끊는 절규가 어떻게 거친 파도 후의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한 평화로 변할 수 있는 지를 감동 깊게 전해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까? 다윗처럼 탄식과 절망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기도의 자리로 올라섰습니까? 아니면 찬양의 고지를 정복하고 서 있습니까? 가장 이상적인 현주소는 찬양의 고지에 오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고 절망에 있던 사람이 기도의 자리로, 기도에 자리에 있던 사람이 찬양의 자리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높이 찬양하며 영광 돌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1. 절망과 탄식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1-2절) 
본문 1-2절에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 절망과 탄식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 다윗도 절망과 탄식하였습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라는 절규를 네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좌절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망감(絶望感)보다 무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절망감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고난당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일평생 고난이 없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사실을 누구나 잘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왕 당하게 되는 고난이지만 비껴가기를 기대하는 바램들이 다 있습니다.
 만일 태풍처럼 진로를 바꾸지 않고 정면 대결을 해야 한다면 세력이 좀 완화되어 약하게 오거나 눈 깜짝 할 사이에 재빠르게 통과해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본문 1-2절에서 반복적으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때로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 중에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춥고, 배고프고, 일이 안 풀리고, 몸 아픈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사랑을 기대했던 사람으로부터 까닭 없는 오해와 배신을 당하는 일일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그의 장인 사울 왕이나 친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고난을 당하고 충성스런 부하들이 자기를 떠나 적장의 편에 붙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배신을 당하던 그런 상황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인간들로부터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하게 될 때 마지막 도피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 같은 고난을 피하거나 아니면 아픔이 덜 고통스럽게 되기를 원하는 소원과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그와 같은 기회도 차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신앙의 사람을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환경이나 사람 때문에 시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와 같은 고통 중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보지만 마치 하나님이 외면하시거나 버리신 것처럼 침묵만 하시는 것처럼 생각될 때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지금 그러한 처지에서 고민하며 답답한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러나 알고 보면 그와 같은 고통은 나만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이기에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할지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며, 옳은 일만 하시고, 사람들을 사랑하기만 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과 버림을 당하시고, 마지막 십자가에서는 하나님께마저 버림을 당하셨던 분입니다. 막 15:34에서 “제 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철저하게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실 때가 있으셨습니다. 
 또한 그와 같은 고난을 당한 사람을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 중에서 손꼽는 다면 바로 오늘 시편 기자 다윗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부부와 친구가 서로를 버리는 배신과 버림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는 시대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마저 인간들처럼 이해관계나 자존심이나 감정 때문에 사랑하는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시고 몰인정하게 버리는 분이실까요?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지나친 기대와 성급함이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상 12:22에서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시편 기자 다윗도 그와 같은 시험에 빠져 인생살이가 힘들다고 해서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잊어버리시고, 외면하시고, 버리셨다고 생각하면 절망적인 탄식의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말씀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나만 그러한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앞서간 신앙의 선진들의 모습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고 난 다음 무려 십 삼년 동안 아브라함과의 교제가 단절된 상태에서 침묵하셨고, 이삭은 결혼하여 이십년 동안 기도를 했어도 응답이 없었고, 동방 제일가는 믿음의 사람 욥은 소중한 십남매 자녀들과 재산과 건강을 다 잃었어도 하나님이 침묵하신 채 묵묵부답이셨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 다윗에게도 성경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무려 십년 동안 하나님이 침묵 하신 채 응답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러나 문제는 절망적인 환경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침묵하실지라도 믿음의 사람은 그 기간을 이겨내야 합니다. 기도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혹시라도 절망과 탄식 가운데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도의 단계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2.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3-4절) 
본문 3-4절에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은 절망과 탄식의 단계에서 머물지 않고 기도의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과 거짓믿음을 가진 사람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처음에는 좌절하고 항의도 하지만 얼마 후에는 진지하게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탄식에서 기도로 돌아서는 것은 고통 속에서 가장 먼저 체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기도 시간을 통해서 드디어 ‘내게 무슨 죄가 있나’,‘내가 무엇을 회개하지 않았는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합니다(3절). 이 기도에는 육신의 병을 치료해 달라는 것뿐만 아니라 병 때문에 영혼이 몹시 어두워져 있으니 영혼을 밝게 해 달라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육(靈肉)간에 사망의 잠을 자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잘 믿는는 다윗이 비참하게 죽어버리면 하나님을 안 믿는 원수들이 기뻐하며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매 앞에 장사가 없다는 속담처럼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고난 앞에 약해지는 법입니다. 다윗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고난이 극심해질수록 주변에 신뢰하였던 사람들이 떠나가고 원수들은 기세가 등등하여 압박의 수위를 더하고 있는데 하나님마저 침묵하실 때 그 마음이 얼마나 고민이 심하였었는가 하는 심정이 오늘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2절에서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라는 말씀에서 ‘경영하고’라는 말은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회의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고난 중에서 시편 기자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가를 짐작케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지막 도피처는 물론 하나님뿐이시며, 도피 방법은 기도뿐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하나님 또한 그렇게 하면 구원하여 주실 것을 성경에 약속하셨기 때문에 고난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 50:15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은 성경의 약속을 믿고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너무 견디기 힘들고 어려워도 참아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믿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오늘 성경의 시편 기자처럼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몇 가지 옵션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끝이 보일 때까지 참고 기다리느냐 아니면 더 이상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일을 포기해 버리고 신앙과 상관없는 세상적인 방식대로 자포자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게 하면 문제가 해결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더 악화될 우려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다윗은 견디기 어려운 절망적인 환경에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할지라도 하나님이 묵묵부답 침묵만 하고 계실 때 그의 고민과 기도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음을 그의 적극적인 기도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이 영적 나태함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자신이 낙심하고 좌절하여 영적으로 사망의 잠을 자게 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시편기자처럼 너무 고난이 오래 지속되고 끝이 보이지 않고 그것을 견뎌낼 힘이 없어지게 되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시력을 상실하므로 인해 사망의 잠에 빠지게 될 우려에 대한 염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지만 기도의 응답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고 고난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지면서 마치 불이 꺼진 등대처럼 영적인 어두움에 빠져 좌초하기 쉬운 법입니다. 

잠은 피곤한 육신을 쉬게 하고 재충전하여 다음 날 아침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나 미루었던 일을 힘차게 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추위에 길을 잃은 조난객이나 침상에서 호흡을 몰아쉬고 있는 중환자에게 잠은 곧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기 때문에 뺨을 때리며, 눈을 뜨라고 소리를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정치와 경제의 불황으로 인해 나라가 어렵고 계속되는 불경기와 취업난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도 예외는 아니며 그 고난의 한 가운데 함께 무리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고 생각하다가도 너무나 되는 일이 없고 일이 꼬여만 갈 때 시편 기자와 같이 신앙의 잠이 바로 사망의 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생활을 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시편 기자처럼 온갖 배신을 다 당하시고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지새우며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응답은 찾아 볼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사망의 잠에 빠져 잠을 자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깨어서 응답이 없는 기도를 세 번씩이나 거듭하시면서 절망의 어두움을 몰아내셨을 때 마침내 천사가 예수님을 도왔을 때 예수님이 하신 일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신 일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더욱 뜨겁게 기도하신 일이었습니다.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눅 22:43-4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지금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바로 사망의 잠을 자지 않고 깨어서 십자가를 바라 볼 수 있는 눈, 천국을 바라 볼 수 있는 눈, 나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달라는 성숙한 기도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청되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전 5:5-6에서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을까 염려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4절)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를 막론하고 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무엇을 더 걱정하고, 염려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과 소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견디기 어려운 고난 중에서 무엇보다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으실까 하는 염려와 더불어 또 하나 크게 염려한 것은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하는 성숙한 기도였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본문 4절에서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시 문화는 전쟁을 하더라도 아군과 적군의 싸움이 아니라 아군의 신과 적군의 신과의 싸움으로 간주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이기는 것은 상대방이 믿는 신을 이기는 것이며, 아군이 지는 것은 내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패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개개인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번영과 실패의 원인이 각자가 믿는 신의 섭리로 말미암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실패가 내가 믿는 신의 영광과 직결되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이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은 자신의 고난으로 인해 주변에 원수들이 자기를 버렸다고 하는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과 더불어 원수들의 신이 자기가 의뢰하는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할 것에 대한 염려였습니다.
 사람들이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할 때 그로 인해 염려하게 될 때 그 염려가 여러 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으로 인해 물질적인 손해를 보지 않을까, 건강을 잃게 되지 않을까, 명예를 놓치지 않을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지 않을까 제각기 염려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중에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비록 억울한 고난을 당해 여러 가지를 다 잃는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질까 전전긍긍하며 염려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만사가 형통하게 될 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앞서간 신앙의 선진들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때는 모진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마지막 순교할 때까지 고난 중에서 주님을 시인하고 자랑하고 증거 할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우리가 처한 고난의 현실이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염려하는 사람들인가를 나타내 보여야 할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그 모범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처럼 기도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찬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5-6절)
본문 5-6절에서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 하나님께 찬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의 기자 다윗도 절망과 탄식에 단계에 있었지만 그 단계에서만 머물지 않고 기도하는 단계로 나아갔고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기도하는 단계에서 하나님께 찬양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중에 다윗은 지금까지 지내온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 온 것을 자신의 완전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도 후대하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반드시 후대하시리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그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찬양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신비스런 현상입니다. 아직 병이 나은 것도 아니고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기도 중에 하나님과 자기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행동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믿음을 갖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찬송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구원과 인자하심을 찬송하게 하는 신비스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나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처지가 좀 어렵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이 부재중이시거나, 자기를 버리신 것처럼 오해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절망과 탄식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덕스런 인간처럼 변심하고 배신하는 분이 아니시며, 한번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사람은 영원불변토록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시편 기자는 고난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잊고 있었기 때문에 절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 49:15-16에서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부정적이고 절망적이던 다윗이 한 순간에 딴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고난 중에서 건져 내셨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의 처지가 일순간에 순경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환경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은혜를 받은 다윗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의 외적인 환경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으나 마치 산모가 산달이 가까워오게 되면 아이가 더욱 자라 마침내 진통 끝에 옥동자를 출산하는 것처럼 고난 중에 참다운 믿음을 키워 마침내 출산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문 6절에서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기도해 보니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후대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후대하신다”라는 말씀의 뜻은 보상한다, 갚아주신다는 말입니다. 비록 다윗이 지금 고난 중에 처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계시지만 그 같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으로 인해 ① 다윗의 잘못된 성품이나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②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③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살게 하시고 ④ 현재 고난을 당한 것만큼 장차 하나님께서 다 보상해 주실 것을 깨닫게 하시는 기회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모세도 시편 90:15-16에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다윗의 믿음대로 시편 기자의 고난은 무한이 계속된 것이 아니라 때가 되니 끝이 났으며 그를 괴롭히던 대적과 원수들은 패배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던 시편기자는 다시 승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가 고난 중에서 어떻게 그 것을 깨닫고 그렇게 변화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전인적인 믿음의 회복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5절의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라는 말씀은 참으로 성숙한 신앙고백입니다.
 여기서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말씀이 바로 히브리어 로 한번 맺으신 사랑을 변치 않으시는 언약적 사랑을 뜻으로 한번 사랑하시기로 언약한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① 하늘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②  이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하시다. ③ 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중심을 보고 계신다. ④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은 연단을 위한 것이며, 유익을 위한 것이다(5절). ⑤ 원수들이 일시적으로 승리하는 것 같아도 그 진노 아래 멸망할 것이다. 
 그러한 믿음의 회복으로 말미암아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이미 받은 구원의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적극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회복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5-6절에서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부모가 손님에게는 따뜻한 밥으로 대접하지만 자식에게는 때로 찬밥을 줄지라도 홀대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오래 지속되어지게 되면 시편 기자처럼 때로는 하나님이 버리신 것처럼 생각이 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믿음 없는 사람처럼 마음에 근심이 가득해지고, 그로 인해 믿음을 포기하거나, 기도를 중단하고 싶은 시험을 받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도 원치 않는 고난이라는 도구는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어집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연단하시는 도구로 보다 더 성숙한 신앙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고난이라는 도구는 사단이 성도들을 시험하여 하나님 사랑을 의심하고 낙심케 하는 도구로도 사용합니다.
 
오늘 다윗이 어느 때가서야 종식될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잊으시며, 숨기신다고 오해를 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러한 상황에서 사단이 의도한대로 낙심하고 좌절하며 하나님을 버리는 어리석은 자리에 빠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윗이 고난 중에 모든 것을 다 잃었을지라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신뢰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힘이었습니다. 그 사랑과 자비는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음을 믿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애가 3:31-33에서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어느 때 끝이 날지 모르는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헛되도다" 라는 악한 생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신뢰하고 믿음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으셔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어느 때 끝날지 모르는 절망적인 환경에 처하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믿음과 값없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였을 때 고난의 현실 속에서 내뱉던 근심과 탄식이 기쁨과 찬송이 회복되어진 것입니다.
IMF 이후 계속되어지는 경제적인 불황과 정권이 바뀌어도 종식되지 않는 정치적인 혼란의 여파로 인해 온 국민이 다 고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우리 믿음의 성도들의 직장이나 사업도 물론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믿음이 약화되거나 구원의 감격을 상실하지 말고 오늘 성경의 시편기자처럼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고 시편 기자처럼 원망과 불평을 감사와 찬송으로 바꾸는 역전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71:14-15절에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며 찬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겪고 있는 오늘의 고난이 믿음을 약화시키는 시험이 아니라 도리어 믿음을 견고케 하는 연단의 기회로 삼는 성숙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어지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에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탄식과 절망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탄식과 절망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로 인하여 다시금 하나님을 찬양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