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오신 구세주

누가복음 2:8-14
설교자 : 김형준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 누가복음 2장 8절~14절 - 

우리가 사람을 찾아간다고 할 때, 그냥 가면 되는 줄 알지만 우리가 분류해서 분석해 보면,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갈 수 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내가 옮기고 싶어도 마음대로 옮길 수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갈 수가 없습니다. 갈 수 있는 만큼 나에게 물질과 건강과 여건이 허락되어야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신 것은 오고자 하는 마음과, 올 수 있는 건강함이 있었기 때문에 올 수가 있었던 것 입니다. 그 조건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마음이 있어도, 능력이 되도 오지 못합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요건은 환경의 문제 입니다. 우리가 북한에 고향을 두고, 사랑하는 사람을 두었지만, 북한에 가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환경이 뒷받침 되지 않습니다. 멀고 험하고 막혀있고, 이러면 아무리 가고 싶고 마음이 있고, 여건이 되어도 가지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건은 상대방에게 달려있습니다. 만나보고 싶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면 우리가 힘들어도 환경의 문제나 내 상황의 문제를 조금은 더 양보하면서 갈 수 있지만, 실패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어떤 관점에서 사람을 주로 사귀는가 하면, 이 사람이 나에게 얼마큼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가 없는가입니다.  실패한 사람. 기대할 것 없는 사람, 얻을 소득이 없는 사람에게 찾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것보다 더 힘든 것은 바로 배반한 사람을 찾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배반하는 사람을 복수하기 위해서 찾아가는 것은 있지만, 사랑하기 위해서 찾아가는 경우는 이 땅 위에서  참 드믄 일입니다.

오늘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이 그렇게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올 수 없는 곳에 오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는 그런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돼지우리에 들어가서 돼지와 함께 생활하기 위해 오는 것과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낮고 천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이 땅 자체가 타락하고 죄와 저주와 허무함이 가득한 이 땅에 나의 소유가 있으므로 행복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희망이 없고 소망이 없고 빛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18세기는 계몽주의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죽임을 당했고, 19세기에는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경멸의 대상이 되었으며, 20세기에는 하나님을 버린 자들의 손에 의해서 인간은 죽어가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서 중국의 모택동과 마오쩌둥은 30년간 7200만 명을 죽였습니다. 스탈린은 4000만 명을 죽였고, 히틀러는 1500만 명을 죽이면서 1억2700만 명이 독재들의 손에 의해서 지난 세기 동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1년에 7000만 명의 태아가 인공유산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공식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만 1년에 150~200만 명 인데, 얼만큼 일지는 모릅니다. 세상의 빛도 보기 전에 이 아이들은 부모에 의해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구를 60으로 본다면 오늘 전 인구의 1/6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태아로 죽어가는 이 땅, 통계적으로만 우리가 이야기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주변에서 우리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상처와 문제의 연속인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분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도전합니다. 여러분은 이 지구에서 평화롭고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조그만 땅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성이 존중되고, 아이들과 노인들이 보호 받고, 태아마저 인권이 보장되는 조그마한 땅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희망이 없고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도 우리는 기쁨과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제가 지구촌 교회에서 이동원 목사님을 대신해서 강단을 지킬 때에, 한 주 한 주가 살얼음판을 걷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 주 설교에 따라 다음주에 700~800명의 성도가 왔다 갔다 합니다. 한 주 한 주 두려움에서 하는데다가 교단이 다른 교역자들 40여명등과 교회를 운영하다 보니까 굉장히 힘들었는지, 한 번은 집에 들어가니까 집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루 종일 기다려서 남편을 맞이하면, 그 때부터 문을 열자마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잘 때까지 한다고  합니다.  아내는 문을 반갑데 열었다가 쓰레기 더미를 받는 느낌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그런 줄을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까 정말 그러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  일평생 헌신하겠다고 한 목사가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가지고 주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고 섬기는 데도 그 속에서도 갈등과 상처와 아픔을 매일매일 겪고 자기도 모르게 가정에 와서 쏟아 놓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그런 줄 몰랐다고 사과하며 하는 말이 “그런데, 우리 교회에 6여전도회에 있는 집사님들에게 나한테 하루에 30분만 시간을 달라고 하면 줄 것 같은데, 내가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 집사님들을 매일매일 만나서 30분 동안 내 속상한 이야기를 다 하고, 집에 와서 좋은 이야기만 할께요” 라고 하자 아내가 설거지를 하다가 그냥 집에 와서 이야기를 다 하라고 하며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이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이라고 했지만, 가정 안에서 받는 상처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가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기쁨을 준다고 하지만, 교회 안에서 받는 상처는 얼마나 깊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는 정말로 희망과 꿈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5장 11절을 보니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오늘 우리의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신 그 주님으로부터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운명에 처한 이 땅. 피조물이 고통당하는 이 땅에 주님께서 오셔서 참 평강을 주시고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주신 그 기쁨의 소식들을 우리가 함께 누리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째로 우리가 오늘 기뻐해야 할 이유입니다. 

저주 받은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에 평강의 땅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그 땅에서 살아갈 때에 그 땅에서 누리는 고통과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부산가는 열차를 타면 그 안에서 배가 아프고 멀미를 해도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서 약속 안에 사는 우리 백성들은 고달프고 지치지만, 우리의 삶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뻐해야 할 그리고 또 감사해야 할 성탄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이 기쁨이 되는 이유는 찾아올 가치가 없는 나에게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 베드로를 찾아가십니다. 그 베드로는 배신자와 실패자 입니다. 자기 직업과 자기 리더쉽에 있어서 자신의 관계 속에서도 다 실패한 사람입니다. 이름값도 못하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장 어려울 때 예수님을 배신했던 그 제자 베드로를 예수님은 찾아가셔서 그를 다시 쓰시는 것을 봅니다. 

오늘 그 주님은 이 높고 높은 곳에서 이 낮고 천한 곳에 골짜기를 넘어서 올 수 없는 환경을 넘어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오셨듯이, 넘어져 있고, 지쳐있고, 쓰러져 있는 나를 향해서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나를 잊어버리는 이 세상 속에 그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잊어버리지 않고 그 약속대로 나를 찾아오심은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말 구원 받을 수 없는 죄로 말미암아 허무와 저주 가운데 죽어갈 영원히 멸망할 우리 자신들을 주님은 자신의 아들 독생자를 죽여서까지라도 구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따라서 아들까지 죽이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하지만, 아들을 보내는 그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아들이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인데, 그것도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을 것인데, 죄의 저주를 뒤집어쓰고 죽을 것인데, 그 아들을 보내는 하나님의 마음은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운 날이라는 것을 우리는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 상영되고 있는 나니아 연대기라는 영화의 원작자인 c.s 루이스 (20세기 최고의 지성을 하나님이 주셔서 지성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가 종교 토론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무엇이 다르냐는 토론이 있을 때에 자기들끼리의 토론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부활이 있고, 성육신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종교에도 부활도 성육신의 개념은 다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가 C.S 루이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기독교의 독특함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That's easy. It's Grace. 그것은 쉽습니다. 바로 은총입니다. 」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은총입니다. 우리가 죄와 그리고 사망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 당할 그 저주스러운 그 저주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에게 받을 수 없는 자녀의 반열에 세워주셔서 그 자녀가 받는 그 축복을 우리에게 오늘도 변함없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총. 이유없이 선물로 주신 그 은총이야 말로 기독교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안이 편안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 잘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저주 속에서 살아야 하고, 죄 가운데 멸망 가운데 살아야 할 운명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의 아들 독생자에게 돌리시고 우리는 죄인이 받아야 할 그 죄 대신에 하나님의 자녀가 받을 상상하지 못할 은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는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절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8~9절에서는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 받을 수 없는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누군 인지  잘 모릅니다. 

정신병원에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자신을 쥐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쥐처럼 엎드리며 쥐 흉내를 내는 정신병 환자였습니다. 그를 치료했습니다. 너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입니다. 치료가 끝나고 치료가 되어서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퇴원하는 날 가족들에게 다가가는데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겁을 내며 도망갑니다. 너는 사람이고 저것은 고양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사람인 것은 아는데, 저 고양이가 나를 정말 사람으로 볼까요?” 라고 하더랍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아직까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고양이가 나를 사람으로 보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여전히 쥐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사람의 모순된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즉 , 내가 조금 소유가 있고 평안하면 내 인생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영원한 멸망과 심판만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오늘 이 땅의 쾌락에 취해서 살아가는  그들에게 주님은 오셔서 너희 삶을 정말 가치 있게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붙드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슴하십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가치 없는 존재입니다. 버림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이 치루어졌기에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입니다.  또한 가장 가치 없는 존재 이면서도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우리를 살리셨으니 우리는 가장 값진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고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 가운에 있다는 것입니다. 

매리라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그냥 취미 삼아 교회를 나가다가 결혼 후에는 나가지도 않고, 사랑했던 남편과의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서 식으면서 둘의 관계는 아주 심각해 졌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TJ라는 5살 난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이는 부모에게 기쁨을 주고, 절망 중에서도 이 부모를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이 아이가 엄마에게 와서 나는 엄마를 가장 사랑해. 하나님 보다는 사랑하지 않지만 엄마를 가장 사랑해라고 했을 때 엄마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아이에게 교회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습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줍니다. 선물을 성탄절에 보기 위해서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 아이는 성탄절 전날 호수에서 놀다가 빠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한 시간 후에 건져냈지만, 이미 숨진 상태였습니다. 그 아들을 부둥켜 안고, 울면서 " I hate you God." “ 하나님! 나는 당신을 저주합니다” 라고 울부짖을 때 문득 자신의 아들이 자기에게 준 성탄절 선물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상자를 가슴에 안고 한참을 흐느끼면서 상자를 열어보았을 때 그 안에는 십자가 목걸이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자기를 찾아오신 그 하나님의 사랑.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눈에 비춰지기 시작하고, 그 부부의 가슴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도 나를 찾아 왔지만 그 사랑을  잊고 살았음을 고백했습니다. 또한 그는 삶의 의미는 내가 부유하고 내가 잘나가는 것에 있는것이 아니며 또한 내 인생의 불행이 내 아들이 죽었다는 것에 있는것이아니라 나를 구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내 인생의 의미가 있음을 깨닫고 TJ ministry를 만들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Through Jesus 예수님을 통해서라는 뜻을 가지고, 자녀를 잃어버린 가정을 돌아보며 위로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주며 그 삶이 결코 헛되지 않고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 인생이 가치를 느낍니다. 사랑을 받을 때 내가 이 땅에 정말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소유가 있어도 사랑을 주거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만큼 이 세상에 고독한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받을 수 없는 그 사랑을 주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그 사실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고, 우리로 하여금 절망과 어두움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편지를 한 장 읽어 드리면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실제 있었던 편지입니다. 

사랑하는 딸 유민아!
우리 유민이가 항상 동생들을 챙기고,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부족해도 투정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면 엄마는 대견스럽고 안쓰럽단다. 유민아! 1998년 8월은 막내 찬종이가 나온 기쁜 달이었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가족의 머리 위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때였지. 아빠는 직장을 잃었고, 하루하루 늘어나는 빚 때문에 엄마는 우울증에 걸릴 정도였지. 어린 너희들에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한 순간 눈물뿐이었단다. 세상을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고달픈 나날이었지. 그렇지만, 엄마 아빠 무릎에 앉아 눈물을 닦아 주던 유민이와 유희가 있었기에 엄마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단다. 그 때 우리 가족은 뒤덮혀진 먹구름을 걷기 위해서 지금까지 싸워왔지. 엄마는 아빠와 너희들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한단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곁에서 숨쉬는 가족의 체온을 느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단다. 천사 같은 딸 유민아! 엄마가 이 편지 한 장으로 너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빠 엄마는 마음을 다 잡고 다시 일하기 시작했단다. 10여 년을 집에서만 있다가 오전8시부터 밤11시까지 밖에서 일을 하게 돼 엄마는 힘들고 고단했지. 그 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유민이가 큰 힘이 되었단다. 들어와 보면 어린 유민이가 집안을 깔끔하게 정리해 놨지. 양쪽 팔에 유희와 찬종이를 누이고 잠든 유민이를 보고 엄마는 많이 많이 울었단다. 고아 아닌 고아로 자라는 우리 아이들이 하루 빨리 성장하기를 엄마는 매일 기도했지. 아빠한테도 고맙게 생각한단다. 할머니 할아버지께 너무나 귀한 장남인 아빠는 좋은 대학을 나와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살았지. 그런 아빠가 택시 운전사, 족발 장사 등 그때 까지 해 보지 않던 일을 하게 되었단다. 하루아침에 삶이 바뀌긴 했지만, 아빠는 항상 성실하고 끈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지. 유민이가 벌써 중학생이 되었구나. 얼마 전에 담임선생님을 뵈었는데, 유민이가 일기장에 비가 오면 엄마가 더 보고 싶다고 적었다더라. 의젓한 반장 유민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선생님이 궁금해 했더니 종일 엄마가 밖에서 일하신 지가 오래 되었는데, 요즘은 그런 마음이 든다고 유민이가 이야기 했다면서 선생님이 놀랍고 기특하다고 하시더구나. 유민아 엄마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먹구름이 완전히 걷힌 그 날. 우리 가족 모두 1박 2일 짧게라도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 아빠 엄마도 항상 너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단다. 유민아! 지금까지는 유민이가 엄마 아빠의 후원자였지만, 이제는 엄마 아빠가 너를 지키는 버팀목이 되어줄게. 항상 밝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내 딸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엄마가

이 편지를 쓴 사람은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도감례씨 라는 분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절망한 가운데 무릎에 앉아 자기의 눈물을 닦아주던 그 딸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때문에 다시 일어서게 된 이 가정. 어쩌면 눈물이 눈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흐르는 우리의 가슴에 눈물을 우리 주님께서 씻겨 주시고, 난 너를 잊지 않고 난 너를 끝까지 붙들고 너와 함께 하겠다고 오늘도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약속대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우리의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신 그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이 있기에 오늘 우리의 걸음은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걸음을 다시 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를 존귀하게 보시고, 내 인생으로 하여금 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주시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겪으시면서 나의 아픔을 이해하시고 나에게 새로운 사명의 길을 가도록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가장 복된 날 올 수 없는 곳에 오신 주님! 오늘 아무도 올 수 없는 깊은 고독 가운데 있는  여러분의 마음까지 찾아가신 주님! 세상 사람들은 다 나를 잊어가는데, 결코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겠다고 하신 주님. 자신의 태에서 난 아이를  잊어버리는 엄마는 있지만, 나는 너를 기억하겠다고 하시는 주님. 그리고 우리를 삶의 구석까지 찾아오셔서 만나 주신 그 주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걸음은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해맑은 웃음은 우리의 가족 속에서 우리의 얼굴 속에서 다시 번져 나야 합니다. 잃어버린 생을 향한 감사의 언어가 우리 입술을 통해서 터져 나와야 합니다. 눈물과 탄식을 보여준 우리의 삶이 자녀들에게 그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신 그 주님. 죄 많고 허무한 이 땅에 찾아오셔서 화평의 왕이 되어 주시고 평강의 왕이 되신 그 주님을 찬양한 우리의 노래는 중단 되지 않고, 지속되며,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 이웃들에게 그 소망의 노래가 들려지고 외쳐지고 선포되는 그런 성탄절의 삶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