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신앙 결산”(딤후 4:3-8)
   
우리는 “세월이 유수와도 같다”는 말이 실감나는 현실에 서 있습니다. 2003년가 엊그제 시작된 것 같은데 벌써 한해를 한 주간 남겨놓고 있습니다. 금년은 국내외적으로도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였습니다. 무엇인가 안정이 되지 않은 불안한 정국 속에서 한해를 종결(終決)지어야만 하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가슴이 아픈 것은 이러한 안타까움은 신앙생활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금년 한해를 시작할 때에는 이전보다는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결심했고, 이전보다는 주님을 더 사랑하기를 원했지만 지금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또 한번 후회해야 하는 변화 받지 못한 모습으로 한해의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시점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미움과 증오, 비난과 조롱의 마음이 사랑의 마음을 삼키는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보잘 것 없는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는 초라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입술로는 찬양하는 것 같은데 우리 내면 깊은 속에는 참된 기쁨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고 하면서도 통제되지 아니하는 내 감정, 내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의 열매는 없으면서도 우리의 입은 헛된 것을 자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룩한 액션이 없이 말만 풍성한 껍데기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입술로 떠들어 대고, 자기 스스로 진단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말만 앞세우는 빈 수레와 같이 요란한 삶을 살지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 앞에 계산되는 한해의 결산이 어떤 성도에게는 많은 이익을 남겨 주님께 칭찬을 들을만한 착하고 충성된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 자신을 바라볼 때에 참으로 많은 부분들이 부족함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부끄럽기만 하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지난날의 잘못된 생활에 얽매여서 후회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 다시금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삶을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본문의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 도전과 교훈을 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바울의 두 번째 편지입니다. 바울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네로 황제 치세 때에 로마의 감옥에 재차 투옥이 되었고, 이때 디모데후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첫 번째 감금 할 때와는(행28:30) 대조적으로 이제는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사슬에 매인 채(딤후1:6) 겨울옷을 찾을 만큼 그의 육체는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슬픔과 절망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주실 상급을 바라보면서 승리한 성도로서 자신의 현주소를 "관제와 같이 벌써 부음이 되고"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순교의 제물로서 자신의 거룩한 죽음을 내다보며 개선장군(凱旋將軍)의 모습으로 당당히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주목할 사실은 본문 6절에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기약이 가깝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종말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종말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결산할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경 여러 곳에서 “종말(終末)”이나 “때가 가깝다.”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0-11)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1~12)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신앙결산을 왜 잘해야 하며, 어떤 자세로 신앙 결산을 하며, 어떤 부분에게의 신앙결산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까?
그것은 본문 3절 상반 절에서 “때가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말세의 고통 하는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앞장 3장 2-5절에서 종말의 때에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서 당부를 해 놓고 지금 여기에서 또 한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말의 때에는 정말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지 아니하면 결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변질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어떠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첫째로 마지막 때가 되면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변질됩니다.(3절 상) 
본문 3절 상반 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 때가 되면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변질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크리스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크리스천이 어떻게 변질이 됩니까? 바른 교훈을 받지 않게 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기쁘게 들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게 들리며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로 들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복이 없기 때문에 바른 교훈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받지 않는다.”라는 것은 “배척한다.”는 의미로서 의도적으로 진리의 말씀에 귀를 막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바른 말을 듣지 않는 까닭은 자기의 욕심에 끌리는 이야기를 하면 ‘아멘!’하고, 자기에게 해로운 이야기를 하면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혹되지 않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하여 주님과 동행하기를 즐겨해야 합니다.(딤전 6:3) 그리하여 사탄의 유혹에 능히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둘째로 마지막 때가 되면 귀가 가려지게 됩니다.(3절 중) 
본문 3절 중반 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 귀가 가려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 때가 되면 귀가 가려지게 됩니다. 여기의 “귀가 가리워서”라는 말씀은 “귀를 간지롭게 한다.”라는 의미로 “듣기 좋고 자기를 즐겁게 하는 말에 동의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의 현상은 들을 수 있는 귀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만 들리고 싫어하는 것은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자신의 본성을 충족시켜 줄 교훈만 듣기 좋아하는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 핵심은 회개와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막 1:14,15) 회개 없는 축복은 없습니다. 회개 없는 회복은 없습니다. 회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회개 없는 자유 함은 없습니다. 회개 없는 기쁨은 없습니다. 회개 없는 승리함은 없습니다.    
 
미국 교회의 목사는 이혼이나 간음에 관한 설교를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나 장로나 교인이나 말할 것 없이 전부 이혼을 떡 먹듯이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목사가 주례를 할 때 “오늘 내가 주례하는 이 부부는 평생 동안 이혼하지 말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이혼율이 엄청나게 높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조그만 것도 서로 참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고 헤어집니다. 왜 부부가 멀쩡한 아이들을 낳고서 헤어져야 합니까? 이것은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위해서는 먼저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입을 넓게 열어라 내가 채워주겠다”, “마음 문을 열어라 내가 성령을 부어주겠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귀가 열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 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 1:3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몸부림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열지 아니하면, 귀를 열지 아니하고, 눈을 열지 아니하면 저절로 은혜를 받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에 살 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일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하나하나 잘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가장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귀가 가려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며, 언제나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야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에는 항상 귀가 열려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지 못한다면 결국 신앙생활이 변질될 수 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와 같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게나이다.”(삼상 3:10)라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 148편의 기자가 8절에서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주님을 의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다닐 길을 알게 됩니다.  
  
셋째로 마지막 때가 되면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게 됩니다.(3절 하) 
본문 3절 하반 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 때가 되면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게 됩니다. 그들은 육체를 즐겁게 하는 거짓말을 노래와 같이 듣기를 좋아합니다.(겔 33:32)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말씀은 스승을 많이 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는 것입니다. 바로 문제입니다. 이는 복음을 제대로 받기가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적인 것에 눈이 멀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보다는 세상 쾌락에 더 탐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영안을 열어 보이시고 양심의 귀를 뚫어 주시는 자는 진리의 말씀을 좇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욕을 좇을 스승이 아닌 우리를 정도를 인도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 삼아 그분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넷째로 마지막 때가 되면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게 됩니다.(4절) 
본문  4절에서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 때가 되면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좋게 됩니다. 여기에서 “진리”는 3절의 “바른 교훈”과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또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나 그분의 “참된 말씀”을 가리키기도 합니다.(요 8:32,14,고후 11:10) 
그런데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킨다.”라는 말 역시 의도적으로 진리를 배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귀를 막고 도리어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장면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행 7:55-58) 또한 여기의 “허탄한 이야기”는 딤전 4:7에서 나오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와 같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허탄한 변론을 하는데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할 것이 아니라 시간을 아껴서 구원의 경륜을 이루는데 착념해야 합니다.(딤전 1:4)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소유하되 이를 위해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은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세에 약속이 있습니다.(딤전 4:8) 그러므로 허탄한 이야기를 좇아가지 말고 경건을 이루기 위해서 연습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어떤 자세로 신앙을 결산해야 합니까?
첫째, 모든 일에 근신해야 합니다.(5절 상) 
본문 5절 상반 절에서 “그러나 너희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일에 근신해야 합니다. 여기의 “근신”이란 말은 헬라말로 “네페”라고 하는데, 이는 “술을 삼가고 정신을 차리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근신하라”는 말은 “경계심을 가지고 자기를 지켜 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이 말은 운동 경기자가 훌륭한 경주를 위해 자신의 모든 욕망들 식욕,수면욕,성욕 등을 철저히 제어하고 최선의 컨디션을 이루는 상태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산을 하려면 어떤 환경에 처할지라도 동요치 않고 자신의 가정과 육체와 정신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최상의 상태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근신하지 아니하면 방종의 삶, 게으름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벧전 4:7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서 세상에 취하지 않고 모든 직책에 충성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5절 중) 
본문 5절 중반 절에서 “고난을 받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고난은 경건히 살고자 하는 자의 필수 요건입니다.(딤후 3:12) 그리고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빛된 진리를 전하는 자가 맞게 될 너무도 당연한 현실입니다.(딤후 1:8, 2:3) 그러기에 모든 복음의 증인들이  영원한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좇아 고난을 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일입니다.(골 1:24) 그러므로 고난을 받을 때마다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감사 찬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전도인의 일을 해야 합니다.(5절 중) 
본문 5절 중반 절에서 “전도인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전도인의 일을 해야 합니다. 전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명은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 모든 증인들이 수행해야 할 필생의 과업(課業)입니다. 

넷째로, 자기 직무를 다해야 합니다.(5절 하) 
본문 5절 하반 절에서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직무를 다해야 합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네게 맡겨 주신 사명을 완수하라.”는 당부인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의 직무가 있고 장로는 장로의 직무가, 권사는 권사의 직무, 집사는 집사의 직무가, 성도는 성도의 직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성실히 감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변함없이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4:2과 딤전 1:12에서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사도 베드로는 벧전 4:10에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어떤 부분에서의 신앙 결산이 있어야 합니까?
첫째로  선한 싸움에 대한 결산이 있어야 합니다.(7절 상)
본문 7절 상반 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선한 싸움에 대한 결산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싸움"이라는 말은 '링 위에서 싸워 승부를 내는 권투 시합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피를 흘리기까지 싸우는 싸움입니다. 상대방이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때까지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싸우는 싸움은 생존을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명예를 얻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한 믿음의 싸움입니다.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시험과 유혹과 죄악을 대항하여 담대히 싸워 이겨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닙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싸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이 싸움은 가장 강력한 원수를 대적하여 사력을 다하는 싸움입니다. 
또한 이 싸움은 죄악으로 가득한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 속의 육의 사람과의 싸움입니다. 정욕적인 옛 자아와의 싸움입니다. 이생의 자랑과 세상적인 욕심과 싸우는 영전입니다. 

이 싸움은 나 자신의 나태와 안일, 교만과 싸우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자신의 심령 속에 역사하는 죄와 사망의 법에 대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쾌락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과학만능주의와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성경을 거스리는 비성경적인 사상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싸움입니다. 영생을 쟁취하는 싸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로 부름을 받은 그 날부터 영전의 격전지를 통과한 승리자였습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영전의 적들과 싸워 승리한 용사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선택을 받아 영전을 하는 성도임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고상한 영적 전투 속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요, 우리가 결산해야 될 신앙입니다.

2. 달음질에 대한 결산이 있어야 합니다.(7절 중) 

본문 7절 중반 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달음질에 대한 결산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달려갈 길'이란 마라톤 경기에서 정해진 경주 코스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복음의 난코스 경주를 마쳤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마치고'는 이미 생(生)과 사명의 코스가 끝나고 완성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훌륭한 경주자로서 경기의 법과 규율을 어기지 아니하고 다 달려갔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뛰는 경주자였습니다(1절). 허다한 증인들 앞에서 달리는 경주자였습니다(히12:1). 그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인내하며 달렸습니다. 이 달음질은 인내가 없이는 달려갈 수 없는 경주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을 받은 이후 로마의 감옥에까지 이르도록 온갖 장애물을 통과하면서 달렸습니다.
신앙의 경주는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 경주와도 같습니다. 힘이 든다고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정해진 길이 마칠 때까지 부지런히 달려가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달렸던 그 길은 복음 전파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장 17절에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자기 생명을 내던지기까지 하며 힘을 썼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명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 생명도 포기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과 허다한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뛰는 경주자들입니다.

이 경주는 관제로 부음이 될 때까지 달음질해야 합니다. 힘이 들어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경주입니다.  그러나 이 달음질에 포기한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에 태양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또한 나에게 주어진 예비된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인내하며 경주해야 하는 외로운 독주자들입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의 길을, 사명자의 길을, 순교자의 길을 끝까지 달려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다 마쳤다고 마지막 순간에 고백할 수 있는 축복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믿음에 대한 결산이 있어야 합니다.(7절 하)
본문 7절 하반 절에서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에 대한 결산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지키다'라는 말은 도덕적으로는 처녀가 그 정조를 지킬 때 쓰는 용어이고, 군사적으로는 군인이 성을 지킬 때 쓰는 용어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고 식어지지 않는 뜨거운 믿음이 그 중심에 불붙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엡2:8). 이 믿음이 바로 구원의 빙거요, 보배입니다(벧전1:9-10). 

이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이 믿음이 죄를 이기게 합니다. 이 믿음이 나를 그리스도 앞에서 의인이라고 증언합니다. 바울은 질그릇 속에 있는 이 귀한 보배를 상실하거나 변절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순결을 지키려는 신부처럼 그리스도의 신실한 신부로서 오직 주님만을 위해, 복음과 교회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또한 그는 군인이 성을 지키듯이 그 믿음을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생명과 물질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명예를 잃지 않으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재물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정작 지켜야 할 보배는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아니 거기에는 전혀 관심조차 가지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저들의 결국은 멸망밖에 없습니다. 성도라고 자처하는 내가 믿음을 지키는 이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내가 내 삶속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힘쓰지 못한다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흔히 이 시대를 가리켜 말세(末世)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오늘 이 시대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크나큰 위기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변질됩니다.  귀가 가려지게 됩니다.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게 됩니다.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일에 근신해야 합니다.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전도인의 일을 해야 합니다.  자기 직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만이 사도 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산 것은 바울에게 내세 신앙, 천당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지칠 줄 모르고 달렸습니다. 이 면류관 즉 상급은 사도 바울에게만 주어지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이런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신앙 결산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선한 싸움을 지금까지 싸워 왔습니까? 달려갈 길을 마치기까지 인내하며 달렸습니까? 믿음을 지킴으로 승리적인 삶을 살아왔습니까?
우리는 이 시간 잘못된 신앙 결산에 대해서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달려온 우리의 신앙 결산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드려졌다면 교만치 말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면류관을 얻도록 변함없이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며 선한 싸움에 힘을 다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