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창 24:2-8) 

본문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그의 종에게 아브라함의 고향에 가서 이삭의 신부를 족속을 데리고 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의 종은 “누가 이삭의 신부인지 어떻게 압니까?”라고 반문합니다.(5절)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의 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그의 사자를 네 앞서 보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7절)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앞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때때로 사막과 같은 길을 걷고 있을 때에, 한 치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미궁 속을 헤매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서 행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큰 행복, 가장 큰 평안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께서 가라하신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 더 할 수 없는 행복을 줄 것입니다.
어떤 시련이 있어도 어떤 위험한 일을 만나도 지금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며 인도하시고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시편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행하시는 따라가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10절) 
본문 10절의 말씀처럼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의 명령대로 순종한 것처럼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자기 고집대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죽을 뻔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삶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종은 아브라함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10절에 나오는 “나홀”이란 말은 아브라함의 형제를 말합니다. 그곳은 아브라함이 가라고 지시한 곳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 말씀대로, 그 명령대로 거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이삭의 아내 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메소보다미아까지는 약 800Km 떨어져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여러 처녀들이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은 어떤 처녀에게도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곳에 시선을 빼앗기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하신 그곳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항 속에 있는 고기와 같습니다. 어항을 벗어나면 죽습니다만 그곳에 있기만 하면 언제나 자유롭습니다. 시 119:105절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갈 길을 등이요 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둘째는 기도하는 것입니다.(12절) 
본문 12절의 말씀처럼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확인하고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늘 기도해야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요,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800Km를 여행하면서 계속 기도했겠지요. 지금 주인의 명령을 받고 어려운 길을 떠났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나홀의 성에 다 이르렀을 때의 기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여기서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가 중요하고,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도 언제나 기도하며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Yes입니까? No 입니까?' '선택해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계속 가야합니까? 중단해야합니까?' 분명하게 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답을 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지금까지 말씀을 따랐습니다. 말씀대로 행할 수 있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에게 말씀의 기준이 있었고, 이 기준을 붙잡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기준, 그런 원칙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그러면 기도하십시오. 시편 118편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하나님을 내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기준에 맞추고, 내가 하나님 기준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시고, 내 기도를 들으시는 줄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말씀 따라 왔습니다. 명령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기준대로 했는데,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어떤 여인이 이삭의 아내 감인지 사람의 미련한 눈으로는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여인을 순조롭게 만나고, 그녀가 이삭의 아내 감임을 알 수 있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편이 되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기준과 방향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은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기적도 있고, 능력도 나타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기 때문입니다.(약 5:16)  

셋째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면 모든 자연스럽게 진행됩니다.(14절)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을 상식적인 것을 초월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보통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자연스럽게 진행됩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모두에게 그런 기적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도 바울처럼 빛 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할 것을 다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 감을 찾는데, 어떤 기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 속에서 일이 진행되어 집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난 것은 우물가에서였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우물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지금 우물가에서 기도했습니다. 

14절입니다.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이것을 마술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로 준비하신 사람을 찾아내기 위한 아브라함의 종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 말씀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대로 이삭의 아내될 사람을 리브가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볼 때에 하나님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진행됩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27절)  

사막과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까? 한 치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미궁 속을 헤매는 것 같습니까? 말씀과 함께 걷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구하세요. 은혜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매력을 가지세요. 능력 있는 기도는 없어도 괜찮습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만 있어도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