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곤경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욥 42:10-17)

사람은 누구나 다 위기를 만나고 곤경에 빠집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위기나 곤경을 만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위기와 곤경의 때에 이를 대처하는 데는 크게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자요, 다른 하나는 불신자입니다. 신자는 위기를 만나고 곤경에 빠지면 먼저 하나님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에게는 위기와 곤경을 극복하는데 '기도'라는 위대한 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위기와 곤경의 때에 하나님 대신 사람을 찾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 사람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것은 본문에 나오는 욥처럼 곤경이 계속해서 오래 지속되면 믿음으로 견딘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지금 한국의 상황이 욥이 당했던 환경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회복'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회복'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경제가 하루빨리 회복되어 제 2의 IMF라 불려지고 있는 이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금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이 노무현 대통령 후보를 당선시킨 것은 그만큼 경제적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 가운데 하나이고, 보다 진취적인 개혁정치를 해 주기를 원하는 국민들의 염원인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상처받은 우리의 가정들이 행복을 되찾고 날마다 가정에서 웃음꽃이 피어나는 그런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들로 회복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회복'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의 가장 절실한 단어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런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욥의 고통은 정말 상상할 없을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재산은 물론이고 아들, 딸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심지어 욥의 아내마저 욥의 겉을 떠났고, 욥 자신이 병에 걸렸습니다. 이러했던 욥이 절망과 죽음에서 벗어나 회복이 되는 본문에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흥분되는 장면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본문 10절 중반 절에서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되려면 “하나님께서 곤경을 돌이켜 주셔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회복하고 싶다고 해서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복의 주체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하여 “곤경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께서 언제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습니까?
본문 9절에서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에 욥에게 회복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쁘게 받으셨더라”는 말은 제사 용어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제물을 기쁘게 받으신 것처럼 욥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경우를 보면 제아무리 장엄하고 값비싼 제물을 받혀 제사를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는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도 중요하지만, 그 제물을 누가 드리냐 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같은 제물이라도 드리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제사를 받으시기도 했고, 거절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경가 「베이커」는 “하나님은 먼저 그 사람을 받으신 후에 그 사람의 기도나 봉사를 받으신다”라고 했습니다. 베이커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은 욥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욥을 기쁘게 받으셨습니까?
첫째로, 욥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 이하에 보면 욥은 그 동안 자기 자신이 친구들의 어리석은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던 것들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은 용납하십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그동안 마음으로 입으로 지은 자기 죄를 회개하며 겸손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바로 그 때부터 회복의 은총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욥과 같이 우리의 현실에 임한 여러 고통으로 인하여, 환란으로 인하여, 버림으로 인하여, 질병으로 인하여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고통을 아픔을 허락하십니까? 내가 하나님께 무슨 잘못을 행하였나이까? 억울합니다."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심하게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이러한 마음이 내 안에 숨어있는 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회복하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내 안에 혈기가, 욕심이, 분냄이, 정욕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이해하고 받아드리며 매사에 아멘으로 순종하며 나갈 때 비로소 나의 삶이 나의 환경이, 나의 가정이, 나의 기업이, 나의 교회가 나의 미래가 회복되는 순간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순간이 회복의 은총이 태동되는 바로 그 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겸손히 무릎 꿇는 이 순간이 바로 내가 회복되는 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당하는 고통 가운데는 하나님의 연단도 있고 시련과 핍박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한 고통이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당한 그 당시에는 그것이 연단인지 시련인지 죄 값인지 구별이 잘 안됩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거든 무조건 잘못했다고 회개할 일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당하는 국가적인 어려움도 이런 차원에서 보고 회개를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회개가 아직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 회개하고 그 회개하는 것이 생활에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비록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납하시고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욥이 그의 친구들보다 정당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했고 8절 끝에서도 “너희가 나를 가리켜 한 말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욥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친구들과 욥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은 욥이 밀리는 쪽이었습니다. 친구들의 충고는 옳았고 정당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리신 결론은 그 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욥이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팔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4:3을 보면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옳고 그른가 하는 최후 판단(判斷)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잘 믿느냐 못 믿느냐 하는 것도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행동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몸부림쳐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별반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성을 정의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정의는 진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정당한 사람만이 정정당당(正正堂堂)하여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당한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욥이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 끝을 보면 “내 종 욥”이라고 했고 8절 첫머리와 끝에서도 역시 두 번 씩이나 “내 종 욥”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욥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이며 주인을 위해 일하는 존재입니다. 충성된 종은 주인의 칭찬과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종이었기 때문에 그를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욥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인정받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인정받는 종이 되려면 처신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종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혹시 자기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넷째로, 욥이 벗들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욥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결코 자기 자신이 당한 곤경을 풀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벗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욥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욥의 곤경을 돌이켜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남을 위해 기도했더니 내 문제가 해결됐다는 것입니다. 욥이 드렸던 기도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미루어 짐작컨대 친구들의 공격에 대한 서운한 감정과 적개심을 먼저 풀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실수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욥과 같이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어떤 과정을 통하여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습니까?
하나님은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는데, 이를 위해서 욥과 세 친구들을 화해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불러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 욥을 향하여 한 말이 정당치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욥에게 가서 그들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욥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욥42:7-8)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에게는 그동안 그들이 잘못 말했던 것들, 그래서 욥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들을 사과하게 하시고, 또 욥으로는 그런 친구들을 용서하고 용납하게 하심으로 그들 사이에 아름다운 화해의 장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화해를 통해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죄 고백을 통한 영적 회복도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화해를 통한 육적 회복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삶 속에서 나의 이기심으로 인해, 나의 욕심으로 인해, 나의 교만으로 인해 남을 판단하고 남을 섭섭하게 하고 아프게 한 사실이 없습니까? 있다면 빨리 가서 그들과 화해를 청하십시오....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 23절부터 24절에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하든 하나님께만 잘 보이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름다운 회복의 은총들이 화해의 장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 예배를 드리려면 우리에게 진정한 화해가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화해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올 때마다 아직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있다면 속히 화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 18:18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신 후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이렇게 욥과 세 친구들의 화해와 용서가 있은 후에 하나님은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그를 위해 준비하신 회복의 은총을 다 베풀어 주셨습니다. 욥은 그동안 많은 것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우선 사단이 질병으로 그의 육체를 얽어매고 있었고, 또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억울함과 서운함,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마저 자신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말을 들어야 하는 섭섭함으로 인해 그의 인생 전체가 분노와 원망과 서운함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행복할 수 없었고, 웃음도, 평강도, 기쁨도 없었습니다. 오직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욥이 하나님을 만나 겸손히 무릎 꿇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친구들과 화해를 하고 나니 그 순간 하나님께서 욥을 그 곤경에서 돌이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 문을 닫고, 용서하지 못한 채, 삶을 받아드리지 못한 채, 내가 모든 것을 다 짊어지려고 하기 때문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화해하고 마음속에 하나도 얽매인 부분이 없을 때 , 그 귀한 회복의 은총을 마음껏 베푸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곤경을 돌이키시면 고통의 세월이 끝납니다. 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다”라고 했습니다. 주경가 베이커는 “사탄에 의해 시작된 욥의 곤경은 하나님의 자비로 끝났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곤경은 크게 두 가지 잘못된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욥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고 친구들과의 원한을 풀고 바른 관계를 맺었을 때 곤경이 해결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욥의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단의 얽매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하여 머리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악창으로 인하여 덕지덕지 달라붙은 상처들이 깨끗이 씻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건강 역시 아름답게 회복되었습니다.
16절과 17절에서 "욥은 그 후에 일백 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砂袋)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期限)이 차서 죽었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욥은 장수의 축복도 받았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5장 11절에 보면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욥의 물질이 회복되었습니다.(갑절로)
본문 12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물질의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도 갑절의 축복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원래 욥은 동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던 재산을 하루아침에 날려 버리고 빈털터리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과의 진정한 영적 만남을 가진 후 전에 있었던 재산의 두 배로 물질적 축복을 받았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섭섭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시 찾은 기쁨은 비길 수 없이 기쁜 일입니다. 그냥 계속 가지고 있던 때의 기쁨보다도 잃어버린 것을 찾는 기쁨의 더 큽니다. 그런데 욥은 갑절로 받았습니다. 그것은 고통을 인내하고 견뎌 낸 신앙의 장부에게 주신 큰 축복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욥의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본문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욥이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던 열 자녀를 아들 일곱에 딸 셋을 낳아 도합 10명의 자녀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욕하고 떠났던 그의 아내도 다시 돌아왔습니다. 정말 주안에서 아름다운 가정이 회복되어지게 된 것입니다

네 번째로, 욥의 인간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욥의 인간관계도 회복되어 다시 이전과 같은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욥이 어려움을 당할 때 욥을 버리고 돌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욥이 잘되고 복을 받으니 이 사람들이 하나, 둘씩 돌아왔습니다. 선물까지 들 고와서 욥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이렇듯 세상만사가 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잘되어야 합니다.

4.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본문 속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찾게 됩니다.
첫째로, 그 사건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욥의 문제는 고통, 실패, 좌절, 친구의 공격이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욥 자신이 문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가 문제이며, 당신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를 찾았을 때 문제가 풀렸습니다.

둘째로, 나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내 믿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욥의 문제는 욥기 42장에서 언급된 대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신앙을 올바로 고백하면서부터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어떤 문제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면 그 문제를 풀게 될 나 자신의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그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이 바로서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이 바로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받으시도록 합당하게 섰을 때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특이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문제이며 내 믿음이 문제이며 하나님 앞에 바로서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곤경을 돌이키시고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욥기를 통해서 욥이 행복한 모습으로 시작했다가 이후 사단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이 고통 속에서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런 아픔을 주시는 이유를 몰라 절규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또한 친구들의 정죄가 너무나도 참기 힘들어 그들에 말에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욥이 너무 연약해졌을 때는 하나님께서 엘리후를 보내시고, 다음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그를 고치시고, 때가 되매 갑절의 영광으로 회복시키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의 경륜과 오묘하심 앞에 그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바라기는 여러분에게도 욥처럼 여러분의 어려운 환경을 돌이키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