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며 살리라

- 우제돈/ 상원교회

마태복음 20 : 25~28



성경에서 말하는 섬김은 첫째로 일반적 섬김은 라반에 대한 야곱의 섬김(창 30:26­29), 바로에 대한 요셉의 섬김(창 41:46), 주인에 대한 종의 섬김(딤전 6:2), 주님께 대한 마르다의 섬김(눅 10:40) 등 일상적 봉사를 말합니다.

둘째, 제의적 섬김은 몸으로 섬기는 것과 의미로 섬기는 것,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전자는 모세와 아론의 섬김(출 10:3), 레위인의 섬김(출 32:29), 사가랴의 섬김(눅 1:23)들이 있고 후자는 성막, 제단, 성전과 관련되어 제사드릴 때 사용되고 모든 기우(출 39:40)를 뜻하였습니다.

셋째, 영적 섬김을 오늘 읽은 본문의 사랑을 축으로 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사랑, 예수님의 속죄의 사랑, 성령의 감사의 사랑 등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대로 섬기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1. 예수님만 따라가는 삶을 말합니다.



‘섬긴다’는 말은 ‘따라간다’는 말인데 누구를 따라가느냐 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는 그 정신을 배울 수 없고 예수님의 정신을 배우지 않고는 절대로 예수님처럼 섬기며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자기 스승이나 지도자를 존경하고 흠모한다고 할 때 멀리서 생각만 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그 분의 사상과 철학을 터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 분 곁으로 바짝 다가가서 기거동작을 같이 하며 온갖 수종을 다 들며 순종하고 적극적으로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방법이 따르는 자의 기초질서요, 기본자세입니다. 가까이 가서 따르지 않고서는 절대로 배울 수가 없습니다. 열두 제자를 보면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갈릴리 해변에서 그물질 하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마 4:18­20) 또 다른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도 그물 깁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마 4:21­22) 마태는 세관에 앉아 세금 받다가 예수님을 즉시 따랐고(마 9:9), 빌립도(요 1:43) 다른 제자들도 즉각 따랐으며(요 1:39), 나다나엘도(요 1:47) 또 어떤 이도 “나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하소서” ! 하니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 8:22)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하여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고 하셨습니다.

일단 주님을 따르는 것이 주를 섬기는 첫 단계입니다. 무조건 주님만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누가 뭐래도 예수만 믿고 따라가는 자가 진짜요 진국이요 진주요 진복입니다. 군인들의 차량 행렬이나 비행장의 비행기를 보면 대개 조그마한 칸보이 차량이 “follow me”라는 간판을 달고 앞장서 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는데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셨고, 바울은 “나를 본 받으라”고 떳떳이 말했습니다.



2. 자신을 낮추는 삶을 말합니다.



‘섬긴다’는 것은 ‘낮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친구요, 불행한 자의 벗이요, 고아나 과부의 이웃이요 가장 낮은 종이 되셨습니다. 세속적 지배자와 신앙적 지도자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전자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권세 부리고 명령적이고 뇌물을 좋아하고 주먹을 휘두릅니다. 그러나 후자는 사람들 밑에 처하며 섞이는 삶을 몸소 실천하고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고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자입니다.

미국 뉴올리언스에 한 고아원을 어렵사리 운영하는 마가리다라는 원장이 어느 해 성탄절 무렵 번화가 어느 주점에 들어가 손님들에게 고아원의 어려운 형편을 소개하며 동정을 구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외면하는 사람, 마지못해 동전 몇 푼 주는 사람, 재수 없다고 자리를 뜨는 사람 등등이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갑자기 한 주정뱅이가 자기 주먹으로 술상을 내리치고 일어나서 원장에게 “시끄러워! 술맛 잡치게 하는 것들은 이거나 받고 당장 꺼져버려”하며 맥주컵을 얼굴에다 던졌습니다. “앗!” 피할 사이도 없이 컵은 원장의 얼굴에 맞아 박살이 났고 유리조각이 박힌 얼굴에서는 유혈이 낭자하게 흘렀습니다. 갑작스런 사건에 어안이 벙벙해진 손님들은 부인이 어떻게 하나 숨을 죽이며 조용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말가리다 원장은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깨어진 유리조각을 하나하나 주워 두 손에 받쳐들고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컵은 지금 나에게 주시는 성탄 선물로 받겠습니다. 그런데 고아들에게는 무슨 선물을 주시겠습니까?” 일순간 “와∼”하는 환성이 울리며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돈을 내놓았? 윱求? 그 사이에 주정뱅이는 사라진 채 그 자리에는 그의 지갑과 함께 다음과 같은 메모지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행패를 부린 나를 미소로 용서해 준 원장님의 사랑에 감동되어 지갑째 놓고 갑니다.” 지갑 속에는 미화 천불이 들어 있어 어느 해보다 더 흐뭇한 성탄절을 즐길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3.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말합니다.



‘섬기다’는 것은 ‘주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는 남을 위해 무엇까지 줘야 하느냐 하면 목숨까지 줘야 합니다. 예수님은 본문 28절 끝에 가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속’ ‘구속’ ‘속죄’ ‘구원’ 등은 ‘비참한 죽음’ ‘십자가 보혈’ ‘속죄적 사랑’ 등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언어입니다.

구약에서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1년 된 무흠 짐승들이 속죄의 피를 흘려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53:5∼6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8­9).”이처럼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죄와 형벌, 고난 또는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내는 속전을 몸소 지불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보호에 감사하면서 희생과 봉사와 섬기는 자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죤 트랩(J.Trapp)은 “다른 죄들은 하나님 앞에서 도망치는 죄들이지만 교만은 ! 하나님 앞에 대드는 죄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앞서지 않고 뒤따라가는 성도, 높아지지 않고 겸손히 낮추는 성도,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희생시키고자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