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경총회장 박요한 목사(92세)가 들려준 종교개혁

 

의정부평안교회에서 종교개혁기념 주일 설교


증경총회장 박요한 목사

박요한 목사는 증경총회장이시며 해방후 한국장로교회, 특히 합동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지키는 데 앞장섰던 “51인 신앙동지회”중 한 분으로 한국 장로교회의 산 증인이다. 금년으로 92세를 맞이하며 지금도 여전히 섬 선교를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 박 목사는 본 교단 제58회 총회장(1973년)을 역임했다. 종교개혁 제491주년을 맞이하여 의정부평안교회(담임 소재열 목사)에서 종교개혁기념주일에 설교와 강의 형식의 메시지를 전했다. 내용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복음을 지키자 /  갈라디아서 1:6-8

연중 교회력에 의하면 종교개혁기념주일은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일에 지킵니다. 독일에는 기독교 국가여서 성령 강림주일 그리고 크리스마스, 종교개혁기념주일을 국경일로 지킵니다. 이렇게 지키는데 최근에는 아마 교회별로는 지키지만 국가적으로는 지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믿음의 딸이 있는데 40년 전에 독일에 간호사로 갔다가 거기서 신학하고 선교사가 되어 독일목사와 결혼하여 독일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1년 넘게 독일인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어제 종교개혁기념주일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박옥희 선교사인데 전에는 종교개혁기념주일을 국경일로 지켰는데 지금은 교회력에서는 지키지만 국가적으로 종교개혁주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강론하기보다 말씀의 원리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역사적인 사건에 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종교개혁이란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16세기 로마 교황이 면죄부를 사고파는 문제에 대해서 루터가 선전포고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성경에 어디 로마 교황이 사죄권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까? 면죄부를 파는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그때 베드로 성당을 증축하는데 건축비가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교황이 면죄부를 만들어서 팔게 되었던 것입니다. 면죄부를 사면 자기 죄가 사해진다는 거예요. 교회 건축하기 위해서 건축비로 쓰려고 그런 교묘한 방법을 썼는데, 그게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교황은 어디까지나 인간이고 인간 교황이 사람들의 죄를 사할 권세가 없다고요. 이것은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해서 루터가 95개조를 비덴베르그 성문에 게시했습니다. 이것은 교황에 대한 선전포고였습니다.

그 외에 칼빈의 종교개혁도 있습니다. 종교개혁이란 뭐냐. 교황의 잘못된 비성경적인 일에 대해서 성경적인 것으로 바로잡자는 운동인 것입니다. 이것을 요약해서 말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그 외에 천주교의 비성경적인 일들은 너무나 많죠.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로 고해성사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부와 성도 가운데 휘장을 쳐놓고 신부 반대쪽에 있는 교인이 신부에게 자기 죄를 고백합니다. 그러면 신부는 고백한 교인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죄를 용서해 줍니다. 이것도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16세기 유럽에서 종교개혁을 말할 때 대표적인 개혁자는 루터와 칼빈을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많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종교개혁자는 마틴루터와 존 칼빈입니다. 루터는 1486년 11월 11일에 태어났고, 1546년 2월 8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은데 위대한 종교개혁의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95개조문은 아까 말씀한 것처럼 로마 교황의 면죄부에 대한 반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루터는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성문에 붙였습니다. 그때는 목조 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조건물이 몇 해 전에 갔을 땐 불타버려서 지금은 철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역사적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날 95개 조항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10월 30일 전후인10월 마지막 주를 종교개혁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년은 491번째 종교개혁기념 주일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95개조 조항을 붙이고 나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95개 조항을 목조건물에 붙였는데 훗날에 그 건물이 불타 없어졌지만 지금은 철문에 95개조를 새겨서 그야말로 영구적인 보존 상태에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제가 가서 볼 때 성안에 교회가 있는데 어제 독일 선교사인 믿음의 딸 박옥희 선교사한테 물어보니까 나는 대학 안에 있는 교회라 생각했는데 시 교회라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루터와 멜랑톤의 동상이 서 있고 두 사람의 무덤이 그 안에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루터교가 말할 것도 없고 유럽 각지에 어딜 가든지 대형교회는 다 루터교회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종교개혁자 루터가 로마교회의 잘못된 것을 지적해서 복음으로 개혁시킨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저는 독일에 갔을 때 루터가 살던 집도 가 보았고 루터가 선교한 교회당도 가 보았습니다. 목숨 걸고 이렇게 가톨릭에 비성경적인 교황의 잘못을 지적하고 복음을 지킨 루터를 항상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잊을 수 없고, 그를 생각하며 우리는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사수해야 하겠습니다.

칼빈의 종교개혁

다음으로는 칼빈에 대하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루터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하는 주일에 칼빈을 말하는 것은 조금 이상스럽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종교개혁을 기념할 때 칼빈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칼빈은 1509년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칼빈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그의 생가를 직접 가본 일이 있습니다. 프랑스에 갔을 때 어떤 선교사의 소개로 칼빈의 생가를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한 시간 반쯤 가보니 누아용이라는데 가보니까 조그마한 소도시 농촌 같은 곳이었는데 2층 목재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 돌아보고 2층을 가니까 칼빈이 사용했던 때묻은 성경이 있었습니다. 방명록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증경총회장 박요한 목사”라고 이름을 쓰고 온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다음에는 칼빈이 설교했던 교회가 엄청나게 컸는데 그 교회 강당에 올라가는 것을 허락받아 강단에 서본 경험이 있습니다.

또한 나는 칼빈의 무덤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칼빈의 무덤은 찾기 어렵다는데 갔습니다. 날이 저물어 포기하고 나오는데 사무실에 칼빈이 묻힌 무덤이 몇 번이라고 적혀 있어 다시 찾기로 했습니다. 찾고 보니 무덤이 아주 작아 아무것도 없고 쇠 철창으로 둘러놓고 내 키만큼 할까요. 무덤이 평토장이예요. 그 가운데 목침만한 돌비가 있는데 거기에는 영어로 J. C. 라는 두 글자만 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종인 칼빈은 프랑스에서 출생했지만 종교개혁 운동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했습니다. 흔히들 제네바를 성시화 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나라도 성시화 하고 있는데 길거리 담배꽁초를 줍는다거나, 그래서 도시를 깨끗하게 하는 성시화가 아니라 로마교회가 잘못 인도한 제네바를 복음으로, 성경으로 바로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시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종교개혁자인 것입니다. 루터나 칼빈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은 한결 같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펼쳤고 개혁을 시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운동입니다.

한국교회와 종교개혁, 그리고 신학의 정체성

이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오늘 우리 한국의 총신대학교가 있기까지 역사적으로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종교개혁 이후에 개혁주의 신학이 이어져 내려왔고 화란의 캄펜신학교,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남아공의 포체스트롬 신학교, 일본 고베 개혁신학교, 한국의 총신대학교가 있습니다. 총신대학교가 있기까지는 여러 가지 사건이 많습니다.

우리 총회와 총신대학교가 신학의 정통성을 말할 때 반드시 해방 이후 우리 장로교 안에서 일어난 “51인 신앙동지회” 사건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소재열 목사님 박사학위 논문인 “51인 신앙동지회” 가운데 한 사람인 바로 내가 와서 소 목사님이 섬긴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니 감개무량합니다.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일제 말에 문을 닫고 그러는 동안에 선교사님들은 미국에 들어가 버렸고, 그런 가운데 송창근, 김재준 교수 분들이 서울 승동교회 지하 아래층에서 신학교를 시작했는데 그 신학교가 조선신학원입니다. 그때 남한에는 이 신학교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저는 1945년 9월에 조선신학교 입학했습니다. 이 학교가 나중에 승동교회에서 나와서 서울 역전 동자동에 있는 미군들이 쓰는 건물을 빌려서 조선신학교가 운영되었습니다. 그 학교에서 김재준 교수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박형룡 박사가 가르치고 집필한 책을 통해 정통 보수신학을 접한 후였기 때문에 김재준 교수의 잘못된 가르침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김재준 교수는 박형룡 박사와 다르게 가르쳤습니다. 김 교수는 모세오경은 모세가 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세오경을 모세가 쓰지 않았다 하면 예수님이 거짓말 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도 모세가 썼다고 말했는데 김재준 교수는 모세가 쓰지 않았다고 했으니 예수님이 거짓말 했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김 교수는 오경이 후대 사람이 쓴 단편문서라고 해서 일명 문서설을 주장한 분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안 되겠다고 해서 우리 51명의 학생들이 이 문제를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성경의 영감설에 대해서도 저자가 누구인지 상관할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영감이 문제가 아니라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된다 말했다고요. 이를 목적영감설이라고 합니다. 김 교수는 목적 영감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우리 보수교단에서는 목적 영감설을 찬성하지 않습니다.

누가 쓴게 문제가 아니라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된다 말했지만 이것은 잘못됐습니다. 51명의 신학생들은 이건 아니다, 진실이 아니다고 해서 조선신학교를 나와서 총회에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래서 총회에서는 51명이 제기한 진정서가 일리가 있다고 해서 조사를 하여 총회는 김재준 교수의 목사직을 면직시켰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 51명은 박형룡 박사를 따라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박형룡 목사를 모시고 서울 남산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세웠습니다. 우리는 이미 평양신학교와 조선신학교, 그리고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새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에서 2달간 공부를 하고 나서 졸업을 했는데 우리가 제1회 졸업생입니다. 이때 25명이 졸업을 했습니다. 이 장로회신학교가 오늘날 총신대학교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맥을 이어 내려온 것이 오늘의 총신대학교입니다.

나는 얼마 전 본 교단 총회장인 최병남 목사님의 총회장 취임식 때 설교를 했는데 그 때 설교를 통해서 나는 신학을 지켜야 하고 교회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의정부평안교회도 아까 말했듯이 종교개혁의 맥을 이어온 교회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의정부평안교회는 의정부장로교회의 전통을 이어온 교회인데 1945년 말부터 1947년에 의정부에서 예배를 드릴 때 저의 동료이며, 함께 조선신학교를 자녔던 이성권, 손치호 전도사님들이 목회했다는 것을 알고 감개무량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이라도 우리 의정부평안교회도 복음을 사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정통신학을 사랑하고 선조들이 물려준 복음진리를 지키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아까 말씀한대로 소 목사님이 논문인 “51인 신앙동지회” 가운데 한 사람인 제가 의정부평안교회에 와서 설교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라기는 우리 의정부평안교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아름다운 성전을 짓고 하나님이 정한 때가 되어 소 목사님을 보내 주신 것이라 믿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고, 하나님이 정한 사람이 있어요. 교회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아름다운 사람도 보내고 좋은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의정부 평안교회는 복음진리 토대 위에서 굳게 서고 계속 부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만 높이 드리는 교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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