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펄전의 '야베스의 기도' 설교  


   스펄전의 ‘야베스의 기도’ 설교
      

            -크리스 암스트롱/ Christian History 책임편집자 


* 이 글은 [목회와신학] 2002년 11월호(통권 161호) 274-277 페이지에 실린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브루스 윌킨스의 <야베스의 기도 The Prayer of Jabez>는 2000년에 미국에서 간행된 이후 수 백만권이 팔렸으며, 국내에도 2001년에 출판된 이후 여전히 베스트 셀러로 군림하고 있다. 최근에는 동일한 맥락에서 쓰여진 여러 종류의 야베스 기도들이 역시 출판되었다. 그러나 수 백만권이 팔리고 일반인들 조차도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그 책의 복음적 성격을 반드시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칭찬한다면 그기에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래의 글은 바로 그 점에 대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다소간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참고로 나도 개인적으로 그 책을 두 번이나 읽었으며 유익을 얻은 바가 있다(-S. U. Lee).  

   야베스에 대한 이야기로 베스트셀러가 된 브루스 윌킨스의 책을 통해 최근에 우리가 알게 되었듯이, 성경에서 단 한 번밖에 언급되지 않는 사람인 야베스는 “자신의 영토를 확장시켜”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의 그러한 요청에 응답해 주셨다. 
WTM선교회(Walk Thru the Bible Ministries)의 설립자이자 이전 회장인 윌킨스는 영토를 ‘복음전도 사역의 기회’로 해석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교회사에서 19세기의 영국 설교자 찰스 해돈 스펄전보다 더 넓은 ‘영토’를 보유한 사람은 확실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최초의 대형 교회가 출현하기 아주 오래 전에 스펄전은 6천 명 이상의 청중들을 상대로 규칙적으로 설교했다(일주일에 10회 이상일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는 한때 확성기의 도움 없이 23,654명의 청중들에게 말씀을 전한 적도 있었다. 그는 1854년 232명이던 뉴파크 스트릿 교회의 회중을 1892년 5,311명으로 성장시켰고,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교회를 만들었다. 수상, 대통령, 그 이외 다른 유명한 인사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기도 했다. 교회 역사상, 그만큼 두각을 드러낸 목회자는 없었다. 수집된 그의 설교만 해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9판의 27권에 해당하는 분량인 이천만 이상의 단어에 육박한다. 그의 저술과 설교 모음집의 일부는 백만 부 이상이 팔렸고 그의 설교는 오늘날까지 설교의 모본으로서 여전히 읽히고 있다. 
스펄전이 ‘야베스의 기도’에 대해 생각한 내용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면 흥미롭지 않을까? 그런데 그가 실제로 야베스의 기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1871년,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태버니클교회의 회중들 앞에 선 스펄전은 역대상 4장 10절을 설교 본문으로 택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윌킨슨과 다른 맥락


     스펄전의 설교와 브루스 윌킨스의 최근 대형 베스트셀러를 대조해 보는 것이 흥미롭기도 하고 유익할 것 같다. 먼저 윌킨스의 책부터 시작하자. 이 책 뒤표지에 쓰인 내용은 수백만 부가 팔린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한다. 그곳에 실린 추천 문구가 우리의 눈길을 딴 곳으로 돌리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베풀기를 갈망하고 계시는 그 풍성한 축복을 하나님께 주시도록 요청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야베스의 단순한 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 보호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그 문구는 약속하고, 담대한 그리스도인들이 “살기로 의도했던 그 삶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호소는 책을 팔리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사실 그것은 영적인 오만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 속에는 감탄할 만한 내용이 많다. 윌킨스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우주의 창조주께 충분할 정도로 기대감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독자들이 “기적을 베푸시는 특별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에 근거해 발걸음을 내디디라”고 격려한다. 그는 이 확신이 우리 자신의 어떤 능력에 대한 믿음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에 뿌리를 내린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타고난 능력과 재능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30년 전 스펄전의 야베스 해석이 교훈적이기 때문에 윌킨슨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방적인 묘사가 야베스의 “축복에 축복을 더하사”와 맥락이 같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책표지의 과대광고에서 결코 한발자국도 멀리 나가지 못하고 있다. 윌킨슨은 책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대담하게 발을 내디뎌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에 의해 가져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잊혀진 이야기의 돈처럼 ‘소유되지 않은 축복들’의 관점에서 이야기해 나간다. 

 

지경의 확장이 고통을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은 최근 수십 년 동안 풍미했던 번영 신학에서 비롯된 복음은 아니다. 윌킨슨은 ‘진정한 축복’을 복음의 더 높은 유효성과 연관시키고 있다. 핵심은 이것이다. 즉 ‘여러분이 하나님께 “당신의 삶을 확장시켜 주시도록” 기도함으로써 여러분이 그 대가로 “그분을 위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목회] 기회가 확장될 때 여러분의 능력과 자원 역시 초자연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윌킨슨은 그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기로 결정하시든 당신의 삶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수용하라,” 그러면 “그것이 항상 당신의 최선으로 작용할 것이다”라고 격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그 ‘최선’이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때로 축복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우리는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은 이상 나의 인생에 대해 순조로운 항해를 기대한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 이것은 우리의 감정에 아부하는 메시지다. 윌킨슨은 자신의 독자들에게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당신이 야베스의 기도를 활용한다면 . . .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다는 느낌으로 가득 차서 적어도 잠시 동안은 더 많은 것을 구하는 기도를 멈추는 때가 당신의 인생에 올 것이다”라는 확신을 준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가 공중에 공허하게 흩어지는 것처럼 보이거나, 우리가 고통과 낙심 혹은 비통함으로 고투를 벌이고 있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어떻게 대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이 책에서 이 담대한 야베스의 기도를 ‘활용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때가 찾아온다는 암시를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스펄전은 그들에게 그러한 때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엄청난 ‘영토의 확장’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또한 동시에 엄청난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스펄전은 일생 동안 많은 낙심을 경험했다. 그는 또한 만성적 통풍과 신장염, 그리고 한번 시작되면 수주일 동안 혹은 심지어 몇 달 동안 지속되는 극심한 통증으로 꼼짝할 수 없는 질병이 있었다. 그래서 야베스가 출생 때 그의 어머니가 겪었던 엄청난 고통 때문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대상 4:9)을 묵상하게 되었을 때, 스펄전은 “우리가 기쁨으로 추수할 수 있기 위해서는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 . . 당신이 많은 낙심을 견디며 인내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축복을 기대해도 좋다”라는 조언을 하게 된 것이다.

 

고통이 그리스도와 더 깊은 교제로 나아가게 할 수도


          ‘윌킨슨식’ 복음주의적 행동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실용주의적이고 상업적인 접근 태도를 암시하고 유도한다. 그것은 기도 응답의 지연과 고통 혹은 좌절을 수용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게 한다. 실제로 윌킨슨은 이렇게 쓰고 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이 당신을 악에서 지켜 주기 위해 나타날 것을 믿습니까? 야베스는 실제로 믿었고 그의 믿음에 근거해 행동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의 삶은 악으로 인해 생기는 슬픔과 고통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스펄전의 접근은 고통과 그리고 그것이 즉각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겨둔다.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 초점을 맞추면서 스펄전은 고통을 인내할 수 있었고 심지어 환영할 수조차 있었다. 야베스가 “복에 복을 더하사”라고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는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때로 내가 병으로 앓아누워 있던 방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이켜 생각해 본다. 그 고통의 침상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과 비교해서 결코 절반도 은혜 속에서 성장하지 못하였으리라고 확신한다.” 고난을 통한 성장이라는 그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스펄전은 고통이 가장 큰 축복, 즉 사랑하는 그리스도와 영원한 교제를 누리는 삶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펄전은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 모두 고통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의미는 분명 아니라고 부언했다.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종류의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모두 반드시 고통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는 없다. “기쁨에 가득한 자비로운 마음이 우리의 영혼을 비옥하게 하는 위대한 자양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계속되는 영향을 감안한다면, “때로 기쁨보다는 슬픔이 우리에게 더 유익합니다. 불필요한 가지들을 잘라내는 가위가 우리 가운데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가치가 있는 영광을 여러분이 맺도록 할 것입니다.” 그것은 “복에 복인 것입니다.”

 

고난은 ‘목회자의 서고에 있는 최고의 책’이 될 수 있다


          윌킨슨에게 죄는 축복의 즐거운 물줄기가 계속 흐르게 하기 위해 서둘러 해결해야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되지 않는 일시적인 방해물에 불과하다. “야베스의 축복을 경험한 후 죄를 짓게 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전으로 다시 지체지 말고 달려가서 문제들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 . . 당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기적을 일초라도 낭비하지 마십시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좋은 것이 여전히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들을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면 스펄전은 죄가, 한 번의 형식적인 화해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개인적인 유혹과 행동과는 차원이 다른, 너무나도 심층적이고 끈질긴 것임을 알았다. 깊이 곪아있는 상처는 대수술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격려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윌킨슨의 신학에서는 절대 수용되지 않는 종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당신의 영혼에 대한 써레질이 계속 된다 하더라도, 당신의 심장까지 쟁기가 파고든다 하더라도, 당신이 불구가 되고 상처를 입어 죽은 것처럼 버려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성령이 그 일을 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복에 복인 것입니다.”
            이것은 현란한 광고 문구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수백만 권이 팔린 베스트셀러는 아니라 하더라도 깊이가 있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메시지이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 진리에 대한 온전한 가르침이다. 슬픔은 영혼을 튼튼하게 할 수 있다. 스펄전이 다른 곳에서 표현했듯이 고난은 ‘목회자의 서고에 있는 최고의 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산층이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130년’ 후의 이 시대에 수백만이 넘는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영적 슬픔을 무시하는 책을 구매하는 편을 선택하고 있다. 그래서 영혼에 슬픔이 가시지 않는다. 


Chris Armstrong is managing editor of Christian History. Chris grew up in Nova Scotia, Canada. There, he worked as an editor and public relations writer before doing graduate work in church history at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in Massachusetts and Duke University in North Carolina. Culturally and climatologically disoriented, he now lives in Elgin, Illinois with his wife and five childr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