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할 때/시84:3
 
 

인간이 강한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참 약합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이런 인간의 양면성이 보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어떤 한 과정에서는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스러울 정도로 굳건하게 잘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을 정도로 연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맡겨진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강한 사람처럼 느끼다가도 그런 외적인 요소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고 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진리의 빛이 비취면 자신의 신앙의 모습이 정말 부실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자신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참 모습 앞에 절망한 것만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지기 위해서 풍부한 자기 성찰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다른 사람이 아닌 고라 자손들의 고백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시인은 특별히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였습니다. 

그 은혜는 다름아닌 가치없는 참새와 같고 제비와 같은, 오늘날의 문맥으로 표현하자면 ‘벌레 같이 쓸모없는’인간을 당신의 집에 용납해주시고 거기서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시인의 이런 경험은 아마도 그로 하여금 자기 조상들의 과거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였을 때, 광야에서 모세의 지도권에 반항함으로 말미암아 땅이 입을 벌려 그들을 삼킴으로써 죽임을 당하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재앙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중 일부를 씨로 살려두셔서 이 시대까지 남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 그들은 심판받은 자손이라고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다윗의 때에 이들이 특별한 배려를 입어 성전을 섬기는 자들로 복권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본명은 성도가 아니라 죄인이었으며,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고 반역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취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이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대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오히려 거짓된 인생의 도리를 알려주어서 우리와 함께 발 빠르게 범죄하고 함께 손에 피를 묻히며 악하게 살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집에 그러한 죄인들과 상처받고 버림받은 영혼들이 깃들 수 있는 처소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넘치는 성품을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된 지체들이 함께 경험하는 곳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 한 가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허리를 굽혀 지체들을 섬기고 또 섬김을 받으면서 함께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깊은 긍휼과 사랑을 느끼는 감격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은 결국 가시나무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누구도 그 사람의 인격 속에서 주님 안에 있는 안식을 느낄 수 없는 황폐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집대로 살기를 원하는 방종한 마음과 성격적인 결함, 인간관계의 어려움, 또 사회의 왜곡된 구조와 같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을 수 있게 하는 어떤 원동력을 간직하고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원동력은 바로 은혜가 있는 교회생활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새끼’라는 단어가 복수로 나옵니다. 자기가 낳은 많은 새끼들을 거느리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긍휼을 하나님의 교회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었고 주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 ぞ튼【?주님의 자녀답게 사자와 같이 씩씩하게 시련을 믿음으로 이기고 세상의 유혹들을 단칼에 잘라내며 승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갈 곳 없는 제비 새끼와 같고 참새와 같은 상처받고 고통받은 수많은 인간들, 그리고 실패하고 낙담한 죄인들이 와서 조그맣게라도 집을 ?살겠다고 당신께 매달리는 그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며 저 좋은대로 살아가고 주의 긍휼과 자비를 육체적인 방종의 기회로 삼으면서 살아가던 인간들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까? 

어떻게 이 세상 밖에는 없는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주님을 수시로 버린 흉악한 죄인들이 ‘주님과 같이 내 마음을 만지는 분은 없다’고 고백을 하게 됩니까? 그것은 단지 성전 뜰만 밟고 다니는 습관적인 교회생활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이 어두운 세상을 혼자서는 살 수 없으면서도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기에는 자신의 죄와 강팍함이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너무나 높은 담을 쌓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참회하고 자기의 무가치함을 정직하게 고백하여 이제는 방황하는 자신의 인생을 거두어 달라고 하는 진실한 고백을 통해서만 우리는 주님의 크신 긍휼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교회가 있습니까? 자신도 자기를 용납할 수 없는 범죄 속에서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 그런 범죄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확증을 여러분은 어디서 얻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모든 힘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고갈되었을 때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고갈된 이유를 따지지 아니하시고 다시금 주의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은혜가 여러분의 교회생활에 있습니까?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사망의 골짜기에서 쓰러져 있을 때에 생각나는 교회가 있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곳에서 함께 하나님을 만나며 살아온 동기간들이 생각나고, 교회당에 엎드렸을 때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 

하나님의 집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풍부한 긍휼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예배, 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쓰레기같이 살아온 나를 자녀답게 대우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봅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쏟아지는 은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심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교회에서 자신의 풍부한 긍휼을 보여주시는 것은 바로 거기에 우리를 섬기는 지체들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탁월한 영적인 상태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하나님 한분과 스스로 대면하며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이 개인적으로 무릎을 꿇는 경건생활만으로 모든 유익을 공급받는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기대며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주님께 대한 헌신으로 가득찼을 때도 우리는 함께 기대며 사는 지체들이 있는 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게 되고 동시에 형제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한편으로 교회는 죄인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씻겨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품일 뿐만 아니라 나와 똑같이 주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는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하는 것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깊이 경험하고 그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체험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진실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참회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단지 자기가 뜻을 세우고 결심하는 것만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교회의 일원이 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주님 때문에 교회생활이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다양한 동기로 교회에 모이지만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한가지 사건 즉,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양의 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과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정말 그분이 나의 구주이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사랑하셨구나!’하는 사실을 깨닫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 순종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이 사람의 중심 속에 있게 되면 각기 다른 동기를 가지고 사람들이 왔어도 모두 이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진실한 만남이 선행되지 않으면 교회에는 진정한 성도의 교통도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얼마나 귀한지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도 자기에게 낙담하는 이 쓸모없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우리들이 경험할 때에 그때에 우리의 눈에 비로소 다른 사람들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교회에 와서 넘치는 하나님의 긍휼을 풍성히 받고 그래서 나같은 죄인을 이렇게 선대해주시는 목매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어찌하든지 그분을 섬기면서 살고 싶어하고 또 한편으로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고 그렇게 연약한 지체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는 아직 들지 못했지만 밖에서 슬피우는 양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오기도 하고, 우리에 들어왔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승복이 없기 때문에 늘 낙담하고 쓰러지는 영혼들을 추스려서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서로 아파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에 넘칠 때는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고, 시련의 터널을 통과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 시련 끝에 주실 신비한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면서 함께 손잡고 기도하는 어두움의 때를 이기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기대하시는 삶입니다. 

맺음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우리 중에 모두 혼자 살아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을 수 없도록 무가치한 성도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우리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향해 넘치는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고, 예전에 우리와 같이 방황하고 아파하는 지체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그들의 모습 속에서 주님의 형상을 보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한 영혼, 한 영혼을 돌보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는 것이 참된 성도의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대들의 이름은 성도입니다. 그대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대들의 별명은 하나님의 교회의 자손들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더 깊이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죄와 강팍함을 주께 고백하고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오래참으시는 인내와 긍휼, 우리의 방종에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그 크고 넓은 사랑을 우리들이 경험했으니 하나님의 집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관계를 맺고 기쁨과 설움을 함께 하며 우리 안에 있는 지체들을 귀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에게는 섬김을 받고, 어떤 사람은 섬기면서 이 모진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죄와 어두움이 가득한 세상을 이겨갈 수 있는 신령한 비결을 ‘함께 하는 교회생활’ 속에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도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긍휼을 보이시기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넘치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감격 속에서 살아서 하나님의 집에서 보금자리를 찾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