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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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샬롬 공동체’원한다
2003년7월8일 국민일보 [성경으로 본 세상―이형기]
이형기(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리요타르는 모더니즘의 큰 특징들 가운데 하나를 ‘거대담론’,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큰 특징들 가운데 하나를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으로 본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더니즘적 ‘거대담론’의 특징들은 다양한 공동체들과 개인들의 미세담론들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며 보편화하고 전체화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컨대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한 진보사관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가치 절하시켰고 제국주의는 피식민지들을 억압하고 소외시켰으며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공산주의는 가진 자들에게 폭력을 가했고 히틀러와 무솔리니,일본의 파시즘은 약한 나라들을 짓밟았다.
그리고 남성중심주의는 여성을,백인중심주의는 흑인을 소외시켰다. 최근 이와 같은 사회적인 갈등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시장경제 원리가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1980년대와 90년대 들어서서 각종 시민 단체들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참여정부 시대에도 시민단체,노동자,공무원,교사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져만 간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다양성의 시대요,다가치의 시대요,‘다름’을 인정하는 시대요,미세담론을 자유롭게 펼치는 시대이다.
아마도 우리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21세기가 깊어질수록 이 같은 문화 현상은 그 정도를 더해 갈 것이다. 따라서 물류파업,전교조의 NEIS 반대 운동,조흥은행 노조의 파업,현대 기아 쌍용 등의 파업 움직임 등은 단순히 참여정부의 지도력 부재에만 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적인 ‘거대담론들’을 해체 시키고 위에서 열거한 대로 다양한 집단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유발시켰다. 이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장점이다. 그러나 해체된 혹은 해체되어야 할 ‘거대담론’에 대한 대체 담론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그것의 약점이기도 하다. 아마도 오늘의 많은 사람은 한국이 지향해야 할 ‘거대담론’을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자본주의’,그것도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라고 하는 경제 이데올로기를 지닌 민주주의보다도 ‘성경적인’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민주주의를 선호할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가져올 병폐들 때문이다. 적어도 이 같은 (성경적인)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적 전체주의’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랑과 공의와 정의가 사회와 문화 밑에 깔려있는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소외된 자와 억압 받는 자,과부와 고아,그리고 버림 받은 자를 사랑하는 나라였고 초기 교회의 유무상통의 사도적 공동체(행 2:43∼47) 역시 성경적인 사회주의(?)를 잘 말해주고 있다.
빚을 탕감해주고 노예를 해방시키며,창조세계를 쉬게 하는 레위기 25장의 희년이야말로 창조세계까지 한 구성원으로 포함시키는 ‘성경적 사회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개인주의를 지향하고 사회주의가 공동체성을 중요시한다고 볼 때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샬롬 공동체 형성이요,이 샬롬 공동체 속에 있는 중생한 개인들일 것이다. ‘주기도’에서처럼 하나님 나라가 이 땅(국가와 사회와 문화) 위에서도 이루어지는 만큼 성경적인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접근해 갈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 앞당겨진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거니와 이 같은 샬롬 공동체의 징표는 가장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된 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 속에서 발견된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우리는 가장 가난하고 약한 이웃에 대해서 행한 것이 곧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2장의 몸과 지체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가장 연약한 자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기독교가 지향하는 공동체성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거대담론에 항거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목소리와 개인의 목소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이들이 희망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가장 가까운 나라의 지표는 이처럼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일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사회의 다양한 이익 집단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힘으로 억누르려 하지만 말고 하나의 통일된 목표로 모으는 강력한 ‘성경적인’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새로운 거대 담론임에 틀림없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로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기원한 교회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사랑과 공의와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하나님 나라를 역사 속에 구현 시키기 위해서 함께 힘써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노동자와 농민들,그리고 교사와 공무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본주의의 천박하고 모순된 차원들을 과감하게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필자 약력
△교리사 및 기독교사상사 전공 △서울대학교 문리대 종교학과 △장로회신학대학교 △장로회 신학대학교 대학원 △미국 하버드대 △미국 드루대
이형기(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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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7월8일 국민일보 [성경으로 본 세상―이형기]
이형기(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리요타르는 모더니즘의 큰 특징들 가운데 하나를 ‘거대담론’,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큰 특징들 가운데 하나를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으로 본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더니즘적 ‘거대담론’의 특징들은 다양한 공동체들과 개인들의 미세담론들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며 보편화하고 전체화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컨대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한 진보사관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가치 절하시켰고 제국주의는 피식민지들을 억압하고 소외시켰으며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공산주의는 가진 자들에게 폭력을 가했고 히틀러와 무솔리니,일본의 파시즘은 약한 나라들을 짓밟았다.
그리고 남성중심주의는 여성을,백인중심주의는 흑인을 소외시켰다. 최근 이와 같은 사회적인 갈등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시장경제 원리가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1980년대와 90년대 들어서서 각종 시민 단체들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참여정부 시대에도 시민단체,노동자,공무원,교사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져만 간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다양성의 시대요,다가치의 시대요,‘다름’을 인정하는 시대요,미세담론을 자유롭게 펼치는 시대이다.
아마도 우리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21세기가 깊어질수록 이 같은 문화 현상은 그 정도를 더해 갈 것이다. 따라서 물류파업,전교조의 NEIS 반대 운동,조흥은행 노조의 파업,현대 기아 쌍용 등의 파업 움직임 등은 단순히 참여정부의 지도력 부재에만 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적인 ‘거대담론들’을 해체 시키고 위에서 열거한 대로 다양한 집단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유발시켰다. 이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장점이다. 그러나 해체된 혹은 해체되어야 할 ‘거대담론’에 대한 대체 담론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그것의 약점이기도 하다. 아마도 오늘의 많은 사람은 한국이 지향해야 할 ‘거대담론’을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자본주의’,그것도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라고 하는 경제 이데올로기를 지닌 민주주의보다도 ‘성경적인’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민주주의를 선호할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가져올 병폐들 때문이다. 적어도 이 같은 (성경적인)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적 전체주의’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랑과 공의와 정의가 사회와 문화 밑에 깔려있는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소외된 자와 억압 받는 자,과부와 고아,그리고 버림 받은 자를 사랑하는 나라였고 초기 교회의 유무상통의 사도적 공동체(행 2:43∼47) 역시 성경적인 사회주의(?)를 잘 말해주고 있다.
빚을 탕감해주고 노예를 해방시키며,창조세계를 쉬게 하는 레위기 25장의 희년이야말로 창조세계까지 한 구성원으로 포함시키는 ‘성경적 사회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개인주의를 지향하고 사회주의가 공동체성을 중요시한다고 볼 때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샬롬 공동체 형성이요,이 샬롬 공동체 속에 있는 중생한 개인들일 것이다. ‘주기도’에서처럼 하나님 나라가 이 땅(국가와 사회와 문화) 위에서도 이루어지는 만큼 성경적인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접근해 갈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 앞당겨진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거니와 이 같은 샬롬 공동체의 징표는 가장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된 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 속에서 발견된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우리는 가장 가난하고 약한 이웃에 대해서 행한 것이 곧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2장의 몸과 지체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가장 연약한 자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기독교가 지향하는 공동체성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거대담론에 항거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목소리와 개인의 목소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이들이 희망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가장 가까운 나라의 지표는 이처럼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일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사회의 다양한 이익 집단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힘으로 억누르려 하지만 말고 하나의 통일된 목표로 모으는 강력한 ‘성경적인’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새로운 거대 담론임에 틀림없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로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기원한 교회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사랑과 공의와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하나님 나라를 역사 속에 구현 시키기 위해서 함께 힘써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노동자와 농민들,그리고 교사와 공무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본주의의 천박하고 모순된 차원들을 과감하게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필자 약력
△교리사 및 기독교사상사 전공 △서울대학교 문리대 종교학과 △장로회신학대학교 △장로회 신학대학교 대학원 △미국 하버드대 △미국 드루대
이형기(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