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한 성도(행 7:55-60) 
 
이규왕 목사(수원제일교회) 


"스데반 믿음처럼 충만한 삶을"
예수님 사랑하고 증거하는 행복이 모든 역경 이기게 한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여러 가지 은혜 가운데 가장 큰 축복은 풍년이나 이른 비와 늦은 비와 같은 유형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이 아니라 말세에 늙은이와 젊은이, 남종과 여종에게 물 붓듯 부어주시겠노라고 약속하신 성령 충만함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과연 어떤 사람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름 붓듯 부음 받은 사람이고 성령 충만한 사람인지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재는 잣대는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 가운데 성령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령 충만한 사람 중에 가장 추천할 만한 인물을 꼽는다면 스데반 집사일 것입니다.

 
사도들을 중심으로 부흥하던 예루살렘 교회는 밖에서는 핍박이 심해졌고 안에서는 성도가 많아짐으로 원망도 많아졌습니다(행 6:1). 이때 평신도 가운데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사람을 집사로 택하여 세워 일을 나눔으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가 아니었지만 사도들 못지않게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로 사도들처럼 나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전도자가 되었고 놀랍게도 사도들이 행하던 것과 동일한 성령의 역사와 기적이 그들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행 6:7). 아무리 사도들이 성령 충만하고 능력이 많다고 할지라도 사도들의 힘만으로 사도행전 1:8의 명령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복음이란 너무나 정직하여 인격 대 인격으로만 확산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교회는 직분자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평신도 직분자들이 스데반처럼 성령 충만한 전도자로 변화될 때 지역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가 확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한 스데반

물론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으로는 시시한 평신도가 아니라 정말 스데반처럼 똑 소리가 나는 성령 충만한 평신도가 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마음뿐이지 왜 그렇게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어떻게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스데반은 수천 명이 모이는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집사로 뽑히기 전부터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평신도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았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집사가 되기 전에도 후에도, 마지막 숨질 때까지 변함없이 따라다니는 꼬리표 하나가 있다면 ‘스데반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라는 말입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행 6:3)’ 집사로 선택되었고, ‘지혜와 성령으로(행 6:10)’복음을 전하다가, ‘성령이 충만하여(행 7:55)’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멤버들은 거의가 다 오순절의 원초적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처럼 지속적으로 마지막 숨질 때까지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성령 충만의 비결

 그렇다면 스데반 집사가 마지막 숨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할 수 있게 된 비결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첫째 이유는 말씀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인 사도행전 7장 전체는 사도가 아니라 일개 평신도인 스데반 집사의 설교 전문입니다. 당시는 성경이 희귀하던 시대입니다. 회당에서나 성경을 낱권 두루마리로 읽을 수 있었고 서기관들이 읽어주는 것을 들어 배울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 집사가 그처럼 성경 전체를 관통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말씀을 많이 읽고 들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둘째로 스데반 집사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가운데서 그는 예수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그의 삶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행복이었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싶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고 예수님처럼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 중심의 삶이 그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도록 담력과 용기를 심어 주었음을 그의 설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행 7:51-53). 그의 자극적이고 도전적인 설교가 핍박자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여 마침내 돌을 들도록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살고자 했다면 그렇게 강도 높게 설교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빙 둘러서 설교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게 되었어도 열려진 하늘 문을 통하여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행 7:56). 더구나 그는 죽으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고 예수님처럼 부르짖었고, 죽는 그 순간에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예수님처럼 기도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고상한 삶,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죽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나 한 평생 살아갑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서 누구처럼 살다가 누구처럼 죽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본받되 죽음의 순간까지 닮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스데반처럼 살아간다면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크게 사용하시는 성령 충만한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