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가득한 가정”(시128:1-6) 

영국의 속담 “행복(幸福)은 타인의 뜰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에 있다"라는 말처럼 [진정한 행복(幸福)]은 [가 정]에서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정이 건강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면 그것처 럼 불행하고 비참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일본의 [내촌감사]라는 사람은 "가정은 행복을 저축하는 곳이요 채굴하는 곳 은 아니다. 얻게 위하여 이루워 진 가정은 무너질 것이요 주기 위하여 이루워진 가정만이 행복한 가정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 럼 우리는 단순하게 행복만을 누리려고 하는 가정이 되어서는 아니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돕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는 가정이 되기는커녕 자신의 가정조차도 지키기가 어려운 시대에 살 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은 행복을 생산해 내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참으로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가정은 본래 행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불행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조금만 수고해도 행복 할 수 있었는데, 지금도 정말 엄청나게 노력을 해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노력을 해서 행복하다는 것 도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현대 사회의 가정은 지금 가정의 역기능적인 결과로 인하여 가정과 결혼,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가 흔들 리고 있습니다. "가정을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식은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에 대한 문제는 결코 어떤 특정 개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어버린 지 벌써 오래서 되었습니다. 가정의 역기능 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깨어지고, 나누어지고 미워하고, 질시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가정은 결코 역기능적인 가정이 될 수 없다는 점입니 다. 왜냐하면 가정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붙들고 계시고, 하늘로부터 부어주시는 용서와 사랑이 우리 가정에 부어주시 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을 섬기는 가정이라고 할지라도 일시적으로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흔들림과 어려움 속에 가정의 행복 에 대해서 더욱 큰 가치를 깨닫게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지난날의 아픔 상처와 기억 속에서 자기 자신을 가두지 말고 이제 다시금 본 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행복한 가정에 대한 참된 의미 를 깨닫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이 가득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 다. 그러면 행복한 가정이란 어떤 가정인지에 대해서 본문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행복한 가득한 가정입니다.(1절) 
본문&nbsp1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 외할 줄 아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에 따르는 것이 삶의 참된 가치요, 축복임을 강조하 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상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악인이 번성하는 경우 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측면을 볼 때에 본문을 통한 가르침은 분명한 진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 는 자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을지라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 전&nbsp4:8에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씀하 고 있는 것입니다.그러기에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이 믿음을 위해서 핍박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이 행복 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복되도다]라는 말은&nbsp4-5절에 있는 [복되다]라는 말과 좀 다릅니다. (4-5절)에서 의 [복되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축복(祝福)"을 말하지만, 본문&nbsp1절에서의 [복되도다]라는 말씀 은 [참 부럽다]라는 뜻으로서 우리말로 [행복하다]라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더 가깝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너무나 행복해서 주위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적인 잣대로 보면 별로 행복 할 만한 조건이 없어보일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분명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체가 우리에게 있어 서는 기쁨이며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또한 주님을 믿는 믿음의 복을 받았습니다. 이는 인생을 어떻 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태도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가장 좋은 가정 이라고 먼저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데에는 분명한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 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프랑스의 유명한 수학자요, 철학자요, 경건한 사람]이었던 [블레 즈 파스칼]은 "행복(幸福)은 내 밖에도 없고 내 안에도 없다. 곧 행복은 하나님께 있고 그리고 내밖에 있고, 내 안에도 있다"라 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이 시 편&nbsp1:1-2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 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죄(罪)를 멀리하고 하나 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집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 그 도를 지키는 가정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 수고한 만큼 수확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2절) 
본문&nbsp2절에서 "네가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수고 한 만큼 수확하는 가정입니다. 온 가족 식구들이 열심히 일하고 함께 수고할 수 있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열심 히 일하고 함께 수고할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머물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수 고한대로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수고를 결코 헛되지 않고 축복해 주시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왜 그렇습니 까? 시편&nbsp127:1,2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떡 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세우지 아니하신다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 가족들의 수고가 열매를 맺도록 복을 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축복된 일입니까?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만큼 열심히 일을 하되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 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창세기&nbsp4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치 는 자]였는데,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릴 때 에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창4:1-5)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 은 열납 하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셨습니까? 이에 대해서 성경은 가인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피 있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으 므로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셨음을 교훈하십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nbsp11장을 인용하면서 가인은 "믿음 없 이" 드렸기 때문이고, 아벨은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가인은 땅의 소산물을 드렸기 때문만 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리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노동을 하 되 히&nbsp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 안에서 행하지 않는 노동 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땀 흘려 수고해도 믿음 없이 자기 공로, 즉 인간 의 땀을 드리려고 하면 아무리 수고해도 결코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여 양치는 수고를 했을 때 아벨의 그리스도 의 피를 상징하는 동물제물을 열납 되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믿음 안에서 행하지 않는 노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니 노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해서는 안됩니 다. 노동은 필요하되 그 노동을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노동과 수고는 인간 타 락 후 저주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벌써 노동자체가 축복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노동을 거부하며 이 세상 을 저주하는 극단적인 신학자들처럼(근본주의)처럼 노동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적인 개념이나 또는 성경적 개념을 잘 반영 하는 칼빈주의 노동관에 따르면 하나님이 주신 노동과 그의 통치를 받는 모든 신자의 수고는 축복의 수단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 다. 그 일이 성업(聖業)이든 생업(生業)이든 다 귀하고 중요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서 하는 일은 거룩 한 일이고, 생업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거룩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하지 아니하 면 그것은 거룩하지 않는 일이며, 생업을 위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거룩한 일인 것임 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살전&nbsp3:10에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열심 히 일을 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며 풍성한 물질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것은 노동의 신성함을 모독하 는 것이며, 범죄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낭비와 사치와 과소비와 다름없는 범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영광을 위한 목적 이 아닌 부의 축적을 위한 목적만으로 부자가 되려고 치심하는 것은 죄악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딤 전&nbsp6:9,10에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 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 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부를 누리려고 하는 것은 노 동 배금주의, 쾌락주의, 부정부패의 가장 큰 원인이 됨을 깨닫고 믿음 안에서 열심히 일하여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풍성하게 누 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 리가 수고한 대로 수확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자기의 수고 없이 거져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땀과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 점에서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이라"는 말씀은 축복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손으로 수고하면서 사 는 자이고, 손의 수고를 귀히 여기는 자입니다. 주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손보다 귀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좋은 것이 손 으로 만들어지며, 모든 귀한 봉사가 손으로 이루어 지며, 모든 아름다운 예술이 손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손이 수고하여 얻는 것을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손의 수고없이 불로소득(不勞所得)으로 얻은 것 은 복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손의 피곤함을 통하여 얻은 것이 귀한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진리가 있습니다. 쉽게 얻은 것 은 귀하지 않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키지 않습니다. 손의 수고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노동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작업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손의 수고를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모 든 일에 대해 긍지를 느껴야 합니다. 교회생활도, 머리로 하는 봉사보다 손으로 하는 봉사가 더 귀한 줄 믿고 해야 합니다. 그러기 에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물론 인생(人生)에서 많이수고한 사람 가운데 자신의 수고대 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자는 자신의 수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이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 반절에서는 바로 이 점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인간의 노력은 자 동적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는 늘 헛수고하거나 우리의 수고를 원수에게 빼앗기거나 또는 기 근이나 다른 재앙으로 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의 결실과 추수는 하나님의 축복이며, 주님의 보살핌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하 나님의 도움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수고를 축복하신다면, 계절이 나쁘다거나 다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 의 산업은 어렵지 않을 것이며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학&nbsp1:11,2:17) 

3. 결실하는 포도나무와 같은 아내와 어린 감람나무와 같은 자녀가 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득한 가정입니다.(4절) 
본문&nbsp3절에서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행복한 가정은 결실한 포도나무와 감람나무가 있는 가정입니다.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귀한 유실수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 두 나무에서 큰 기쁨과 만족을 얻습니다 (시104:15,겔19:10) 이스라엘은 그 전체가 아름다운 포도동산이며 감람 동산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시편 기자는 하나 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가정은 그 하는 산업이 형통할 것을 말한 후에, 본문&nbsp3절에서 그 가정의 행복 을 두 개의 매우 아름다운 영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 기자는 본문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내를 "결실한 포도나무" 로, 그의 자식을 "어린 감람나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결실한 포도나무"와 같은 아내가 있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꽃은 피지만 결실치 않는 벗나무가 아니라, 열매가 풍성히 달리며 아름다운 열매로 가득한 포도나무와 같은 아내가 있는 가정 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포도나무이므로 시절을 좇아 계속 과실을 맺을 것입니다. 사실 포도나무는 약하고 모양이 그리 멋있지 않습니 다. 그러나 포도나무보다 귀한 나무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포도는 매우 달고 맛있습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구약에서는 이스라 엘을, 신약에서는 교회를 상징하는데 여기에서는 [아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에 포도나무로 나타 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들은 결실한 포도나무 같아야 함을 말하고있습니다. 어머니가 가정을 얼마나 윤택하게 합니까? 얼마나 재 미있게 합니까? 어머니는 얼마나 포근하고 따뜻합니까? 아이들과 가정에 맛있고 달콤한 것을 주는 어머니의 모습이 여기에 담겨있습니 다. 그러므로 우리 어머니들은 "우리 자녀들이 내 가슴에서, 내 인생에서 무엇을 따먹고 있는가? 나는 그들에게 사랑과 희망과 믿음 을 주는가? 그들에게 마음의 아픔과 불안과 죄책감을 주지는 않는가?"를 항상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결실한 포도나무처럼, 잘 익은 포도주처럼 성숙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성숙해야 합니다. 여러 어 머니들은 자신의 인격과 신앙의 성숙을 위해 더욱 애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신앙으로 성숙하지 않고 어떻게 아이들을 주님 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었던 디모데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감화와 교육 속에 서 자란 귀한 인물이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성숙한 신앙 인격 속에서 나오는 값진 신앙 유산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 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둘째로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같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감람나무는 하나님의 축복과 세상의 평화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본문에서 [자식]을 어린 감람나무에 비 유하고 있는데, 감람나무는 크고, 아름답고 힘차게 번성해 나갑니다. 시&nbsp52:8의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 는 푸른 감람나무 같다"라는 말씀과 같이, 또한 호&nbsp14:6의 "그(이스라엘)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 와 같다"라는 말씀과 같이 팔레스타인의 감람나무는&nbsp20-30미터까지 자라고 잎은&nbsp40-50센티나 되는 데 크고 아름답고 힘차게 번성해 나가는 나무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자식을 어린 감람나무로 비유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린 감람나무는 아직 열매를 맺지는 못하지만 힘차 게 자라 가는 것처럼 아이들은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힘차게 자라 가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입니다. 아이들은 청순하고 생 기발랄합니다. 이들은 강건하고 왕성합니다. 또한 감람나무는 원 둥치가 잘려도 그 옆에서 새로운 가지가 솟아난다고 합니다. 이처 럼 우리 자녀들은 자신이 어린 감람나무처럼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왜내하면 그 속에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 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자녀들은 잘 자라나야 합니다. 왜곡되지 않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야 합니다. 마약과 본드와 술 과 담배와 향락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무로 푸르고 청청하게 자라야 합니다. 땅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고 더욱 곧게 자라도 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은 참 감람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허탄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정말 맛있는 감람나무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들은 가시나무 처럼 자라서는 안됩니다. 온갖 원망과 좌절을 내 속에 담고 결국 이웃과 가족을 찌르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의 자녀들을 감람나무로, 참 감람나무로 부르셨고 심으셨습니다. 자녀들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뜨겁게 기도하며 잘 뻗어나가 결실 하 는 감람나무로 자라주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감람나무의 기름이 성전의 등불 기름으로 사용되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자녀들 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출&nbsp27:20) 

4. 영적 행복감이 넘치는 가정이 행복한 가득한 가정입니다.(4절) 
본문&nbsp4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같은 복을 얻으리라"는 말씀처럼 행복한 가정은 영적 행복감이 넘치 는 가정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흐르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시편 기자는 본문&nbsp4절의 말씀 은&nbsp1절에 언급된 내용을&nbsp2,3절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복을 얻으리 도다"라는 말씀은&nbsp1절의 선언을 확증하고 뒷받침해 주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자신만의 행복만으로 끝나 지고 않고 그의 가정에 확대되어 영적 행복감을 넘치도록 주십니다. 이는 나로 인한 영향력이 가정에 넘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 다. 나 한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기만 하면 나로 인하여 우리 온 가족들이 수고한대로 먹을 수 있고,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처럼 결실을 많이 맺고,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처럼 귀하게 쓰임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 대로, 자식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가정이야말로 영적 행복감이 넘치는 가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감으로 넘쳐흐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임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이리하여 시인은 행복 을 축복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해도 축복임을 모를 것입니다. 깊은 영적인 행복감은 하나님을 만나 고 그분께 순종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령들이 모인 가정에는 내적인 힘과 연대감이 있습니다. 어떤 위기도 같 이 힘껏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이러한 영향력은 구원의 역사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 이 행&nbsp16:30-34에서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 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 라.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 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바로 서게 되면 빌립 보 감옥의 간수장을 통하여 그의 가정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기쁨의 가정이 변화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는 삶을 살면 우 리 자신들로 인하여 복음의 영향력이 우리 가정에 미쳐서 온 가족이 기쁨과 은혜가 넘치도록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5. 시온과 예루살렘의 축복이 넘치는 가정이 행복이 가득한 가정입니다.(5절) 
본문&nbsp5절에서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행복한 가정은 시온과 예루살렘의 축복이 넘치는 가정입니다. 
시편 기자는 본문에서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행복한 가정에서 이제 시온과 예루살렘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에서 [시온]이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성산으로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장소를 말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시온에서 복 을 주신다는 말은 복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말로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을 지키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약속을 상기시키 는 말씀입니다.(출&nbsp20:6) 또한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라는 말씀은 예루살렘의 평화와 번영을 보게 될 것이라 는 말인데, 이에 대해서 존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 각 개인의 의로운 신앙은 성도에게는 물론 사회 공동체에 게까지 축복을 가져다 주는 복을 말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nbsp11:10,11에서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의인이 패망하면 기뻐외치느니라.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왜 시온에서 복을 주신다고 강조하시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성소를 떠난 우리의 행복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의 진정한 행복과 축복 은 시온과 예루살렘의 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넘어 이제 예배와 사회생활의 더 넓은 맥 락으로 넘어갑니다. 개인과 가정의 행복은 시온과 예루살렘의 복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 혼자 잘 믿고 잘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 니다. 우리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복을 함께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잘 지어진 집에 살고, 하나님의 집이 황폐해진다면 우리 는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온(우리의 교회)과 예루살렘(우리의 사회)에 대해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의 번영과 사회의 안정 없이 어 떻게 성도 개인의 축복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더욱 뜨거워지고 주님께 헌신하고, 주의 일에 늘 힘쓰는 교회 로 성숙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롬&nbsp12:7-13) 또한 우리 사회가 더욱 안정되고 발전해나가도록 모두 다함 께 힘써야 합니다. 한 개인의 번영이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저주가 될 것입니다. 자신의 부와 번영을 보다 연약 한 자들과 나누지 않는다면 이미 삭막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축복을 누리는 개개인뿐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행 복을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를 그리고 있습니다. 

6. 믿음의 후손을 이어가는 가정이 행복이 가득한 가정입니다.(6절) 
본문&nbsp6절에서 "네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라는 말씀은 행복한 가정이란 믿음의 후손으 로 이어지는 가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주석가 [멘튜 헨리] "이 말씀은 우리 가족들이 창대 하게 되고 자신은 당대 에 장수하여 지속되는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는 말씀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편 기자는 본문&nbsp6절에서 가정의 행복과 사회의 안정과 교회를 발전을 넘어 한 걸음 더 나아 가 관심의 폭을 더욱 넓히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행복한 가정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 시대에만 번성하고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 다. 후손이 없는 집안에 무슨 평안과 미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은 후손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너 는 네 자식의 자식을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후손들이 번성해가고 형통해 가는 것을 보며 우리는 하나 님께 더욱 감사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후손을 향한 강력한 축복의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 지로다"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산업과 가정의 행복과 자식의 축복 그리고 사회 와 교회를 넘어 "이스라엘의 평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 교회를 바라보게 하는 말씀을 하 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합&nbsp2:14에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리 라"고 예언하신 말씀을 보는 것과 같은 환상을 갖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행복할 때에 우리 교회의 부흥뿐만 아니라 하나 님 나라 전체의 균형적인 발전까지 내다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가정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며 축 복임을 깨달아야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깊은 영적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작품 [밀레]의 [만종]이 배경이 본문 의 말씀을 배경으로 한 창작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 그림에 나오는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와 기도하는 모습은 하나님을 경외하 고 그 도에 충실하며 예루살렘 복을 그린 교회의 신성을 뜻하며, 부부가 함께 손을 마주보며 고개를 숙인 모습은 결혼의 신성을 의미 하며, 함께 밭에서 일하다가 교회 종소리에 잠깐 멈추고 농토 위에 서 있는 모습은 땀 흘려 일하는 부부의 노동이 신성을 그린 것입 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이며 예술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정도 밀레의 만종에 나오는 그림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합니 까? 아니면 불행합니까? 우리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두려워하는 가정 즉 하나님의 경외하는 가정임 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혹시라도 역기능적인 가정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복된 가정들로 변하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힘쓰 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청교도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람 중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 드]는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신앙적인 여인과 결혼해서 신혼초기부터 철저하게 기교적 원리에 입각해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형성해 나 갔습니다. 그런데 같은 [뉴잉그랜드]에서 그와 같이 자란 동네 친구였던 [맥스 쥬크]는 신앙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방탕했던 여 인과 결합하여 나중에 자신도 신앙을 저버려 그의 사람됨이 점차 잘못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사람의 가계를 추격했는 데 그들의 후손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① [조나단 에드워드]는 오늘날까지&nbsp617명의 후손을 두었는데,성직 자&nbsp100명,대학의 총장을 지냈던 사람이&nbsp12명,교수&nbsp75명,의사&nbsp60 명,군대 장교&nbsp75명,저술가&nbsp80명,변호사&nbsp100명,판사&nbsp30명,공무 원&nbsp80명,하원의원&nbsp3명,상원의원&nbsp1명,미국의 부통령을&nbsp1명 배출했다 고 합니다. ②반면에 [맥스 쥬크]는&nbsp1,292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유아로 사망한 사람이&nbsp309명, 직업적인 거지가&nbsp310명, 불구자&nbsp440명, 매춘부&nbsp50명,도둑&nbsp60명, 살인자&nbsp70명, 그저그렇고 그런 사람이&nbsp53명 이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성이 풍부한 가정과 그리스도가 떠난 가정과의 차이를 여 실히 볼 수 있는 좋은 실례입니다. 바라기는 에드워드의 가정처럼 되어서 하나님께 자손만대 영광 돌리는 거룩하고 축복스런 가정이 되 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