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스도의 고난 : 회개에의 촉구 - 절망의 벽 허문 십자가 수난   
뼈를 깍는 회개 통해 갈등의 골 메우고 ‘사랑의 회복’ 구하자 

권문상 교수(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무엇 때문에 예수는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셨는가? 최근에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란 영화가 극장가를 휩쓸고 있다. 그리고 이미 국내에서도 지역 교회들을 중심으로 조용히 그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영화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엄청난 고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덕분인지 모르겠다. 잔인한 장면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 영화가 복음서의 내용을 상당히 충실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다루었다고 본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고통을 극구 사양하고자 기도하시는 장면은 지극히 성경적이다(마 26:37-42 막 14:33-36 눅 22:41-44). 물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희롱을 당하고 온갖 폭행을 당하며(마 26:67 막 14:65 눅 22:63-64 요18:22), 특히, 로마 군병들에게 조롱당하고 채찍을 맞는 부분은(마 27:27-31 막 15:17-20 요 19:1-3, 특히 빌라도가 군병에게 채찍질을 허락 하고 다시 유대 지도자들과 협상하는 장면은 요한복음의 내용에 맞추어 있음) 연출자의 의도가 전혀 없다고 볼 수 없지만, 성경적 사실을 과장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수없이 채찍을 맞고 심지어는 살점이 떨어져가는 장면까지 연출한 감독의 의도가 어디 있건 간에,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가 이 조롱과 폭행을 당하면서 결코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그 고통을 피하려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할 정도로(마 27:46) 성부로부터 버림당하는 것같은 극도의 심리적 아픔을 겪으신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고난을 회피하고자 하지 않으셨는가? 

유대인 지도자들과 그 패거리들에 의해 희롱 당하며 침 뱉음을 받고, 보자기에 씌어 구타를 당하고 모멸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손바닥으로 얻어맞았던(마 26:67) 그리스도, 헤롯과 그의 군병들에 의해서는 빛난 옷을 입혀 조롱거리로 전락되고(눅23:11) 로마 군병들에 의해서는 갈대로 얻어맞는 희롱을 당하고 잔인하게 채찍질 당하며 길거리 거지나 다름없게 취급당하셨던(마27:30) 그 분은, 이 심적,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자기 피조물을 단숨에 처치할 수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혹시, 예수님에게는 십자가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에게는 십자가가 ‘선택’의 문제였지 필연적 의무는 아니었다(이런 의미에서 안셀름이 제시한 성육신 필연성 개념은 한계를 갖는다). 겟세마네 동산의 절규어린 기도, 아버지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느냐고 외친 그 기도에서 이러한 사실이 잘 드러난다. 

물과 피를 다 쏟아낼 정도로 그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던 그 분의 이 역사적 사건은 분명 깊은 뜻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전능하시며 자비로우시지만, 어떤 불편한 심기를 가졌더라도 그저 없었던 일로 눈 감아 주지 않으신다. 우리 인간 사이도 친구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는 것이 고상한 미덕으로 여겨지는데 하나님은 이러한 종류의 포용력을 보일 수는 없는가, 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기도 하지만 거룩하기도 하다. 마치 깨끗한 새 집에 흙탕물 묻은 신을 신고 들어가는 것이 어울릴 수 없는 것처럼 ‘본질상’ 하나님은 죄로 더러워진 우리와 어울릴 수 없다. 아무리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더러운 신을 신고 들어오려는 자에게 깨끗이 하고 들어오게 하든지 아니면 이미 더럽혀진 마루바닥을 청소하지 않을 자 없듯이, 하나님에게도 역시 죄 문제는 어떻게든 처리되어야 했다. 너무도 거룩하신 하나님에게는 그냥 없었던 것으로 단순히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왜 하필 그 참혹한 십자가인가를 찾아볼 수 있다. 그 참혹한 십자가는 당연히 우리의 죄를 시비 삼는다. 영원히 버림받아 지옥의 삶을 살아야 하는 절망의 나날, 미래도 없고, 좌절과 분노만 존재하는 비극의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의 원초적 운명을 바라보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영원한 갈등 구조를 만들게 한 것을 말한다. 아무런 소망도 없이 끊임없이 돌을 굴려야만 했던 시지프스의 절망의 수고 외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원자폭탄의 무한대 파괴력을 갖는 힘도 파괴할 수 없는 무한한 절망의 벽을 드디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해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고난의 정도는 앞의 그 영화에서처럼 처절함의 극치였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화목의 체험을 한 모든 자는 그리스도의 그 참혹한 십자가를 통해 필연코 자신의 죄를 반영할 것이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가 극심하게 매 맞고 찔림을 당하고 못 박히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난 주간은 우리에게 회개의 주간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리스도의 수난’ 영화를 보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자기 애인을 죽인 자라고 자수를 하였고, 어느 강도 역시 참회하였다고 한다. 

2004년은 우리 민족에게 유독 갈등과 대립의 골이 깊다. 우리 기독교인들만이라도 이 민족의 죄악을 회개하자. 이해심과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독선적이고 각종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이데올로기적 판단으로 점철된 우리의 자화상을 회개하자. 가치의 기준이 되어버린 성공이라는 이데올로기, 외모중시의 이데올로기도 역시 건강하지 못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 여기에는 교회도 한 몫을 거든다. 성공주의 목회는 많은 목회자들을 패배주의자로 몰아간다. 모두가 성공주의에 최면 걸린 듯, 그래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그 어떤 도덕적 가치도 상대화시키며, 심지어는 이념과 색깔논쟁을 부추겨 기득권 파수와 자기합리화에 열을 다하게 하곤 한다. 

1세기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기득권 보호를 위해 자기편이 아니었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과 같은 모양이 재현되는 느낌이다. 서양에서는 합리적 문화 구조가 있어 이를 중화시키는 안전장치가 있는 반면,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흑백논리 문화가 지배적이어서 죽기 아니면 살기식이다. 우리 모두 이제 십자가 앞에 나아가 이러한 갈등의 사회가 나의 죄 때문임을 고백하자. 이데올로기적 벽을 쌓은 나의 죄를 고백하자. 교회적으로도 고백하자. 모든 교회가 일어나 모범이 되지 못한 우리 자신의 허물을 공개 사죄하자. 우리가 회개해야 오늘의 조국이 안고 있는 이념과, 세대, 계층간 갈등의 골이 극복된다. 전 교회가 참여하는 구국적 집회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울러 이 골을 매우고 이데올로기적인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랑의 회복을 구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십자가를 선택하였듯이, 우리네 갈등 구조를 해결하는 길은 역시 우리 이웃 모두를 사랑할 때 가능하다. 혹시 진리 아닌 문제라면 서로 전쟁하듯이 달려들지 말자. 

서로를 적대시하곤 하였던 것은 우리 대부분이 어느 것이 ‘논리’의 문제이고 ‘진리’의 문제인지 분별하는 교육을 받지 못해서이지만 말이다. 전쟁은 종국적으로 흑백으로 갈라놓게 하고 상대에 대한 이해심을 말살한다. 상대를 사랑으로 바라볼 때 참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관용과 용서, 양보와 희생을 감내하게 된다. 이는 결국 가정을 회복하고 이 사회를 건강하게 할 것이며, 교회가 하나 되게 할 것이다. 내 편이 아니면 네 편이라는,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적 망상은 주님의 그 참혹한 십자가를 전혀 이해 못하는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