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원하시는 삶”(고후4:16-5:3)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바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삶에 근본적인 차이점을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생의 본분이 어떠해야 함"을 바로 아는데 있는 것입니다. 때 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성도의 삶은 언제나 만족함이 있고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 없 는 세계와 하나님 없는 인간 그리고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은 만물이라면 허무하고 의미 없고 덧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聖 者) [어거스틴]은 그의 책 [참회록]에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 까지는 우리 마음은 평화를 누릴 수 없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삶이요 하나님 으로 말미암아 만족하며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사망이나 깊음이나 높음이나 그 어떠한 어떠한 것으로부터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오 직 하나님께로부터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안하고 험한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적인 모습이 주님께 어떠한 모습으로 비쳐지 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성도로서의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처럼 삶 의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이러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 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에 무엇인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恩惠)를나누기를 원합니 다. 

1. 낙심(落心)하지 말며 살아야 합니다.(16절) 
사도 바울이 본문&nbsp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 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환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서 말하는 "겉 사람"이란 인간의외적인 조건들 즉 육체(肉體), 물질, 명예, 권력, 지식 등을 가르키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들 은 모두가 유한성(有限)을 지닌 허무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사야서의 벧전&nbsp1:24에 서 사&nbsp40:6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 어진다"라고 말씀하면서 인간의 유한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가 본문&nbsp7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질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 기 때문에 쉽게 깨어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질그릇 속에 보배를 담고 있는 자는 비록 외부로부터 온갖 고난과 환난 이 겹겹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결단코 절망하거나 실족치 않습니다(8-9절) 오히려 위경이 닥치면 닥칠수록 예수님의 죽으심을 더욱 깊 이 맛보며 십자가를 지고 의연히 죽음 앞에 나갑니다. 왜냐하면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10-11 절) 따라서 우리는 질그릇같이 약하고 쉽게 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계심으로 인하여 어떠 한 경우일지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아니 낙심(落心)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nbsp4:8-9절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 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성도라면 결코 어떤 경우에도 낙심(落心)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그 어떤 경우란 모든 삶의 정황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에게는 더하면 더할 수록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습니다. 건강이나 성공, 기쁨과 행복은 더할수록 좋은 것들입니 다. 그러나 질병이나 실패, 아픔이나 고통은 더할수록 나쁜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낙심(落心)은 더할수록 나쁜 결과밖에는 남 는 것이 없는 정말 나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낙심(落心)은 "마사스"(Masas)라고 하는데 그 말의 뜻은 "용해시키다" 혹은 "황폐케 하다"라는 의미입니 다. 헬라어로는 "카코스"(Kakos)라고 하는데 그 말의 뜻은 "무가치" 혹은 "해로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낙심(落心) 이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황폐케 하고, 무가치하고, 해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어떠한 경우라도 할지라도 결코 낙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을 살아가는 성도로서의 저와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현대인들의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상당히 패기(覇氣)에 찬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실상(實狀)은 나약하기 짝 이 없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은 현실지향적인 삶을 살기에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언제 나 건강 때문에 낙심하고, 나쁜 환경 때문에 낙심하고, 신앙 때문에 갈등하며 낙심합니다. 물론 성도라고 할지라도 연약하기 때문 에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 불신자를 막론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쉽사리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 다. 더구나 겉 사람이 후패해지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경우라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엡&nbsp3:13에서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 은 겉 사람은 비록 후패할 수밖에 없지만 날로날로 속 사람이 새로워지기 때문에 얼굴에 광채가 나고 영롱한 눈빛으로 빛날 수밖에 없 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의 삶은 겉 사람에 의해 좌우되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병들었다고 낙심해서도 안되고, 실패했다고 낙심해서도 안되 고 오히려 그 실패와 곤고함을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은 실패를 결코 문제 삼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현장에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으로 하여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요&nbsp8:1-11)고 위로와 권면을하 고 있는 것입니다. 

① 민&nbsp32:7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 
② 민&nbsp32:9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 
③ 갈&nbsp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④ 살후&nbsp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⑤ 히&nbsp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⑥ 히&nbsp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인 성도는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신앙을 가지고 담대하게 현실의 문제들을 극복하며 일어서도록 몸부림쳐 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의 목자장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 실 것입니다(시&nbsp23편) 그래서 영국의 작가 [T. 스미스]는 "우리의 최대 영광은 한번도 실패하지 않는데 있는 것 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일어나는데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생은 밤에 보이는 한 경점 같은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삶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는 사 람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떠한 삶의 환경 속에서도 결코 불평,불만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을 토로 하다보면 결국 낙심하게 되고,결국은 불신앙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 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nbsp1:4)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시편 기자 는&nbsp119:67,71에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하는 것 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은 요&nbsp141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평안을 너 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이 아니하니라" (요&nbsp142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nbsp23:10에서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 니 그가 나를 단련한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무가 자랄 때 벌레 먹을 때도 있고, 시들 때도 있습니다. 싹이 나서 고목이 될 때까지 싱싱하게만 자라는 나 무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한평생 사는 동안 어려움과 고난과 풍파와 실패가 숨돌릴 겨들도 없이 밀어닥칠 때가 많습니 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 (롬&nbsp8:2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사람이 낙심되는 일로 후패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속사람 은 나날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낙심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하여서 낙심하지 아니할 수 있 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람을 많이 맞는 나무가 그 뿌리를 더 깊이 내리는 것처럼 환난을 많이 견딘 신자가 힘있는 신앙 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nbsp11:28)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그 눈 길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낙심하지 아니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소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17-18절) 
사도 바울은 본문&nbsp17,18절에서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 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 원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는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잠깐이요 영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돌아본다"라는 말은 [스코페인]이라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은 [주목한다],[소망한다]라는 의미로서 속 사 람이 새로워지는 성도는 "참된 것을 소망하며 산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푯대를 향하여... 좇아 가노라" (빌&nbsp314)의 말을 할 때에 이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nbsp11:1에서 "믿음 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人生)은 보이지 않는 것을 찾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전&nbsp311)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난 속에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낙심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소망 을 가지고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영원한 세계를 소망하며 살기에 환난이 바뀌어 기쁨과 부요와 영생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인생의 삶 속에서 환난과 고통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간이 모여 사는 곳에는 길이와 무게의 차이가 있 을 뿐 절망과 고통이 있고 슬픔과 울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환난은 잠시요 영광은 영원하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nbsp8:18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딤후&nbsp2:11-12에서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함 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롬&nbsp8:28에서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고 고백하였습니 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천국에서 누릴 영생(永生)복락(福樂)은 현재의 고난을 능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에서 주님을 위해 받는 환난은 장차 하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에 비하여 볼 때에는 잠시요,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 게 예비된 영광은 영원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성도는 환난 받는 것으로 인하여 영원한 상급을 누 리게 합니다. 현세에서 받는 환난은 잠시 뿐이지만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주시는 영광의 면류관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자세를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인생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역사관도 분명해야 합니다. 가치관 도 분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는 썩을 육신이나, 없어질 물질, 무너질 권세, 상실되어질 지식을 의지하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영 원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고 믿는 사람임을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환란과 시련, 낙심되는 일을 만나도 절망하 지 않고 인내하고 싸우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사람임을 나타내야 합니다. 신앙의 세계는 우리들에게 무한한 힘 을 줍니다. 무한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무한한 가치를 제공합니다. 무한한 영광을 안겨 줍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세계에서 만 족하지 못하다고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소망을 갖고 사는 성도는 ① 감사하는 믿음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조건에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 다. 현실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서 감사하십시다. ② 앞을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미래의 세계를 열어 주시는 영원성 을 우리는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인생의 길이 되시는 분입니다. ③ 주님을 나의 삶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습니 다. 주님이 나의 삶 중심에 계실 때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승리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것같 이 우리도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것을 거꾸로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지 합니다. 내세가 없으니 그날그날만 살아가면 그만일 뿐입니다. 진실(眞實)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觀心)은 "얼마나 큰 집 에 사는가? 얼마나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가? 얼마나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가?" 등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삶이 끝나면 저들 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세속주의가 교회에 들어와서 신앙을 좀먹고 우리를 우리들의 가치관을 혼란시키 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욱거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소망 가운데 살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nbsp6:19에 서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며 휘장안에 들어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서 히브리서 기자는 [소망]이 "영혼의 닻"이 되어 내 인생의 배를 조정하여 성공(成功)이라는 항구로 인도해 준다고 권고하고 있습 니다. 정치적으로 대단히 혼란스러운 시대요,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시대라 할지라도 성도들은 환난조차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 의 손길을 믿고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큰 소망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 소망이 없는 백성 은 방자하게 행하기 때문에 사망의 파도 속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인 성도는 세상이나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다만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 님께 두어야 할 것입니다(딤전&nbsp617) 왜냐하면 성도에게 있어서 소망은 바로 성공으로 이끌어 주시는 원동력이 되 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참된 소망의 삶을 사는 성도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혹 실패했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그 실패 로 인하여 고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nbsp39: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nbsp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시&nbsp71:5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시&nbsp71:1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 
시&nbsp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롬&nbsp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nbsp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롬&nbsp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후&nbsp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골&nbsp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살전&nbsp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살전&nbsp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딛&nbsp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히&nbsp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요일&nbsp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짐승과 같이 삽니다. 유명한 자유주의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인간에 게 죽음의 불안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세의 소망이 없는 자에게는 그것만큼 큰 불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기 는 길은 믿음의 소망밖에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사도 바울은 신앙은 "차라리 나는 이 세상을 떠나 주님께로 가고 싶다. 그러 나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그렇게 살고 싶다"고 역설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 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아는 보지 못한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짓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소망을 하나님 께 두고 산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nbsp42,43편의 기자는 세번씩이나 "네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 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네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너 는 하나님을 바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너의 소망을 맡기라" (Put&nbspyour&nbsphope&nbspin&nbspGod)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 에 환난을 당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소망을 갖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롬&nbsp5:3-4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 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환난 중에서도 소망 을 갖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5:1-3) 
사도 바울은 본문&nbsp5:1-3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 럼 우리는 손으로 짓지 않는 장막집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즉 이 말은 무너질 것을 의지하지 말 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장막집]이란 [우리의 육신(肉身)]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육신 의 장막은 불가불 무너질 것입니다. 곱게 생겼든 밉게 곱게 생겼든 남자든, 여자든 다 무너질 것입니다. 안 무너질 사람은 아마 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영원한 하늘의 집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이 단지 행인이요, 나그네로서의 삶이라 는 분명하게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가진 육신은 나그네 삶에서 잠시 거하는 임시 처소인 장막에 불과합니다. 이 임시 처소 가 무너지면 곧바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영원한 집이 준비"되어 있습니다.(1절) 하나님께서 당신 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손수 준비하셨다는 바로 그 점에 장차 도래할 나라가 가져다 줄 행복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집은 우 리의 영혼이 현재 잠시 거주하는 집 즉 흙으로 지어진 보잘것없는 초라한 땅 위의 임시 장막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거주하 게 될 정착지로서의 집입니다. 그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 때에 덧입게 될 신령한 부활체로서의 신령한 몸을 일컫는 것 이며, 하나님과 격이 없이 영원히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땅위 장막은 그 기초가 진흙이기 때문에 썩고 허물 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흙으로 지어진 우리 육신의 몸은 무겁고 괴로운 수고만 가져다 줄 뿐이며 사는 동안의 고난도 희망 이 없는 힘겁고 무거운 짐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시편&nbsp90:10에서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하거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성도들조차도 자신들의 우리 속에 있는 잠재하면서 강포하게 행하는 많은 부패로 인하여 그리고 심히 죄악 된 몸으로 괴로워하는 고난의 삶으로 인해서 신음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죽음은 우리에게 육신의 것을 벗겨 주 며 지상에서의 모든 고통들과 육신의 욕망과 같은 덧없는 것들도 제거해 줍니다. 우리에게 수치와 혐오를 주지 않는 정의와 영광의 예 복을 부여하시고 기쁨의 옷을 입게 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성도(聖徒)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지 말고 하늘의 영원한 집을 사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정녕 그렇지 않습니 다. 만일 성도의 소망이 이 세상에 국한된다면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된 이 땅의 삶에서 보상받을 일이 그 무엇이겠는가? 실로 그리스 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절망의 땅 위에서 고통 당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산 소망을 갖게 하셨습 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영원을 사모하는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영광된 하나 님 앞에 세워질 것을 확신하면서 살아야 합니다(고후&nbsp5:14) 진정 이것을 알고 이 사실을 믿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의 고난과 역경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고난을 받는 우리들을 지탱해 주는 것은 바로 영생과 천국에 소망이며 이것은 우리들에게 위안 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지적인 의식은 오랫동안 계속되는 압박감으로 인하여 고난을 고통스럽고 지루 한 것으로 단정 지으려고 하지만 믿음은 이것이 가볍고 순간적이라고 이내 감지해 줍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일평생동안 복음과 함 께 고난 받기를 즐겨워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자신이 비록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을지라도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217)&nbsp...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21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 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2:28)&nbsp...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 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3:1)...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 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nbsp.... 내가 주 안에서 크게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 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 회가 없었느니라(410)"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에게 복음의 본질이 무겁고 지루한 것이었다는 끝까지 믿음의 달려갈 길을 달려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사 도 바울은 딤후&nbsp4:6-8에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 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 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 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바라보는 믿음을 갖고 사는 성도는 사물에 대한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에 갖고 살 수 있습니 다.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들 못지 않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 두 존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습니 다. 즉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한 것들이며 보이는 것들은 순간적이거나 아니면 단지 덧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 는 것들에서 눈을 돌려 영원을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속의 유익을 구하거나 현세의 괴로움을 두려워하는 일을 이제 끝내 고 오직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므로 주와 함께 영광 받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소꿉장난입니다. 인생은 모래성 쌓기와 같습니다. 어릴 때 했던 소꿉장난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꼭 인생살이 같습니 다. 그러나 소꿉장난은 해가 지면 저녁이 되어 어머니가 "얘야,저녁 먹어라"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 땅에 있는 동 안 발버둥쳐보지만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면 누가 거절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본향을 사 모하고 사는 자는 이 세상에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빌&nbsp3:20) 

그래서 히&nbsp11:13-16에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 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 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 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의 선 진들은 한결같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사모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 앞에 고통당 하고 있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늘의 영원한 집을 사모하면서 다시금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지혜로운 성도라면 하늘의 영원한 집만을 사모하며 살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서 게 될 날을 기억하면서 현재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처럼 삽시다. 지혜로 운 다섯 처녀처럼 살아야 합니다.&nbsp5달란트와&nbsp2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본 문&nbsp9-10절에서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 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고백할 수 있 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은 ① 어떠한 상황과 여건 속에서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② 하늘의 소망을 갖고 사 는 것입니다. ③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일들에 눈을 고정시키지 말고 영원한 천국에다 눈을 고정시키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쁠을 때에 주님의 얼굴을 보시기 를 바랍니다. 우리의 우리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소망 가 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을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깨닫고 확신 가운데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