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유익합니다 

- 교회 시련의 의의- 빌립보서 1:12~18

석원태 목사

빌립보서 1장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 이 ‘고난’을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 1:30)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한 ‘고난’이나 ‘싸움’은 빌립보 교인들이 현장에서 직접 본 사건들이요, 현재도 듣고 있는 사건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바울이 처음 빌립보에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울 때 일어난 핍박과 현재 그가 감옥에 투옥이 되어 있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그곳에서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실을 보았습니다(행 16장). 그리고 현재는 빌립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바울을 위하여 특별연보를 해서, 교회 대표로 ‘에바브로 디도’를 감옥의 현장에까지 보내어 교회를 대신하여 수종을 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빌 2:25, 4:16~18). 지금 사도는 자신을 중심하여 일어난 일련의 환난에 대하여, 이것이 오히려 유일한 하나님의 축복의 방편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고난과 환난은 사실상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役事)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난은 유익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Ⅰ. 믿음의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 1장의 결론을 지으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이 생기면 그때부터 그 예수 믿는 믿음 때문에 고난이 일어나고, 생기고, 따라 다닙니다. 예수 믿는 그 시간부터 세상이 예수 믿는 그 사람을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누가복음 6장 22절에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때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는 시간이라고 하였습니다(눅 6:22b). 요한복음 15장 18~19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예수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 받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요 17:14). 예수 믿음 때문에 오는 고난은 특별한 고난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함이요, 그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과 권능에 참예하게 되기 때문입니다(살후 1:5). 디모데후서 2장 11~12절에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예수님은 말씀하였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1~12)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혀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 8:18). 예수 믿는 믿음 때문에 오는 고난이요, 영의 싸움이요, 환난인 것입니다. 

Ⅱ.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화위복’이란 ‘재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고난은 전화위복이란 말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2절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당한 일이 무엇인가? 바로 복음 증거 때문에 투옥이 된 사실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1장에 ‘나의 매임’이라고 하였습니다. 1장 13절, 14절, 17절에 이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도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골 4:3)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엡 3:1)이라고 하였습니다. 빌레몬서에도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몬 1:9, 13)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8장 20절에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6장 20절에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전화위복인가? 

1.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빌립보서 1장 12절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복음의 진보’란 ‘전진’을 뜻합니다. 이 진보(prokophv)는 원래 군대(부대)의 진군을 위해 길을 개척하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전파 때문에 당한 바울의 투옥은 복음의 문을 닫는 일이 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의 문을 광활하게 여는 결과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말한 복음의 진보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투옥되어 있는 온 시위대 안의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빌 1:13~14). 여기 ‘온 시위대 안’이란 로마궁실 내에 로마황제의 근위병들이 머물고 있는 병영을 말합니다. 당시 로마황제의 근위병은 1만 5천명 내외였는데, 어떤 황제 때에는 3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부대(部隊) 안에서 2년 동안 활동에 제재를 받고 머물러야만 했습니다(행 28:30~31). 이런 경우는 비교적 자유롭고,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자유로운 면담이 허용되었습니다. 다만 바울의 손에는 쇠사슬이 매여져서 죄수 바울을 지키는 로마의 근무병사인 간수의 손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수는 근무시간에만 바울을 지키기 위하여 묶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2년이 넘도록 그를 지키기 위하여 하루에 몇 시간씩 자신과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매임 때문에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성령에 감동을 받고 ‘주안에서 신뢰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저들이 온 시위대 안팎에 사실상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까지 한 것입니다. 매일 매시간 바울이 이 복음 증거의 경험을 맛보게 될 때 마침내 ‘담대함’까지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의 축복이 된 것입니다. 빛이 있는 곳엔 어둠이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비교적 만남이 자유로웠던 시위대 안에서 이러한 바울의 복음운동이 일어날 때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운동에 동참하는 자도 생겼습니다. 반면에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려고 순전치 못한 마음(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도 생겼다고 하였습니다(빌 1:15~18). 여기에 순전치 못한 다툼(당파심)의 사람들은 사실상 유대주의자들로 바울이 말한 십자가의 원수들인지 모릅니다(빌 3:18). 그럼에도 온 시위대 안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전화위복 때문에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고 소리쳤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매임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전화위복의 내용입니다. 

2. 믿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장 25절에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장 12~18절은 사실상 바울 투옥의 의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빌립보서 1장 19~26절은 바울 생사의 의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말하면 한 가지뿐인데 살든지 죽든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시종이 여일하게 담대히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빌 1:20). 그 이유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 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삶의 주체가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갈 2:20). 그는 두 사이에 끼여서 고민하는 선택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고 싶은 더 좋은 욕망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빌립보교회 교우를 생각하고, 육신에 더 머물고 싶은 욕망이라고 하였습니다(빌 1:22~23). 그런데 아직까지는 이 세상(육신)에 더 머물러 있는 것이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더 유익하다고 하는 확신에 넘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빌 1:24). 그래서 빌립보서 1장 25절에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공동번역에는 이 구절을 「…이런 확신 때문에 나는 살아남아서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지내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여러분의 믿음을 발전시켜주고, 기쁨을 더해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투옥은 결국 자신과 빌립보 교인들에게 ‘믿음의 진보’와 ‘기쁨의 진보’를 더해주는 유익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시 빌립보서 1장 26절에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바울이 감옥에서 놓여 빌립보 교인들을 다시 만나게 될 때,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 때문에 자랑할 일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투옥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믿음의 진보, 그 믿음의 진보에서 나온 기쁨과 자랑이 풍성하게 되는 전화위복의 축복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의 경향교회 개척과 목회 사역 중, 우리 교회가 만난 고난과 환난이 수없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 잊을 수 없는 것은 서울 역전 동자동 기독교여자 절제회관에 모일 때의 일입니다. 교회 설립 만 2주년을 맞으면서 교회건축위원회를 발족시켰습니다(1975. 5. 25).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85년 8월에 경향가든 교회당 건축추진위원회 및 실무위원을 발족시키고, 신림9동(서울대 입구 관악산 기슭)에 3500여 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그해 12월 25일에 경향가든 교회당 신축기공예배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림9동 동민들의 결사적인 반대와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또 다른 여건 때문에 공사가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그때 저의 고통은 실로 컸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현재 있는 경향복지재단 성민복지관 건물을 새로 짓게 되고(1994. 5. 7), 문산 눌노리에 있는 6만평이 넘는 크고 넓은 땅을 사게 되어 수양관과 신학교 건물을 세우게 되었습니다(1989. 7. 17. 건립기공예배, 1990. 9. 11. 수양관 및 신학교 입소, 1990. 12. 21. 공사완료감사 및 성탄축하예배, 1991. 6. 20. 경향수양관 고려신학교 아카데미캠퍼스 준공감사예배). 그리고 막혀버린 경향가든 성전의 문이 열렸습니다. 1994년 8월 27일에 학원인수와 함께 현재의 새 성전 신축을 결의하게 되고, 다음해인 1995년 7월 17일에 경향교회 새 성전 건립 기공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1998년 5월 16일(교회 설립 25주년)에 역사적인 경향 새 성전 입당감사예배를 드리게 됨으로 바야흐로 경향교회 강서시대의 시작과 함께 21세기 세계를 받은 세계 선교의 기지로 새 도약을 하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실로 전화위복의 축복이었습니다. 우리가 신림9동에서 당한 그 고통의 환난이 오히려 문산의 수양관과 강서의 새 시대를 맞게 하는 크신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당한 고통은 개인이나 우리 육신의 문제가 결코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나라 운동(교회) 때문에 겪은 시련이었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고통이고 아픔이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유익이 되어 오늘에 큰 축복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기독신자에게 오는 십자가의 고난은 유익한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 때문에 오는 고난이요, 복음 증거 때문에 오는 고난입니다. 바로 바울은 그가 당한 투옥의 고난이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빌립보 교인들과 자신에게 복음의 진보와 믿음과 기쁨과 풍성한 감사의 자랑이 넘치게 하는(빌 1:12, 25, 26) 전화위복의 축복을 가져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여섯 가지 환난에서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근 때 죽음에서, 전쟁 때 칼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기에 능하신 분입니다(욥 5:18~2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때문에 겪는 무수한 시련과 고난은, 사실상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예고하는 우리 소망과 승리의 전령사(傳令士)가 됩니다. 그래서 성도(聖徒)는 죽음의 고난에서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변절하지 아니하고,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재기의 불사조가 되고 맙니다(잠 24:16).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기 때문입 니다(딤전 3:15).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