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러기 은혜로도 충분합니다.”(막 7:24-30)
  
오늘은 2003년에 마지막으로 드리는 송년주일예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금년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조금만 더 큰 은혜를 주셨다면 좋았을 껄”라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면 이전보다도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것인데...”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우리가 많은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충분했던 은혜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은혜로 여길 줄 아는 성도라면 어떤 은혜를 주셨을지라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잘 활용하고 관리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 - 30절에서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주신 달란트가 많았기 때문에 즉시 가서 달란트를 활용하고 잘 관리하여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달란트의 많고 적음을 상관하지 않고 주인이 자신들을 충성스럽게 생각하여 달란트를 맡겨 주심에 대해서 감사하고, 주인이 자신들을 믿고 달란트를 맡겨 주심에 대해서 감격하여 맡겨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즉시 가서 잘 활용하고 잘 관리했더니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이에 주인은 그들을 향하여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내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칭찬과 함께 상급까지 주셨습니다.(마 25:21,23절)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주인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달란트의 양에 대해서 불만을 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주인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에 대해서 불만과 불만족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달란트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하고 그냥 땅 속에 묻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할 때에 “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마 25:24-25)라고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합리화하는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에 주인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을 향하여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마 25:26-27)고 책망을 받았고 가지고 있었던 한 달란트마저도 빼앗기고 말았고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마 25:28,3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은 이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정말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부족함이 없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풍부한대로 그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비록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키었고, 주님의 이름으로 배반하지도 아니했습니다.(계 3:8) 

우리는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에 대해서 언제나 만족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병든 눈을 고쳐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 했지나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향하여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금년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은혜를 주셨든지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만큼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든지, 적게 주셨든지 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은혜를 잘 활용하고 잘 관리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한 여인에 대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유대인이 아닌 당시 유대인에게 개처럼 취급을 받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최대의 소망이신 예수님께로부터도 개처럼 취급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여인은  주님에게 무슨 커다란 기적을 기대한 것도 아닙니다. 커다란 대우, 커다란 은혜를 받으려고 기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한 절정 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여인의 유명 한 고백 가운데 보면 “여자가 대답 하 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만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님 저는 부스러기라도 좋아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8절)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부스러기 은혜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참 절박한 심정이지요? 우리 한국말 표현 가운데도 너무 절박한 상황과 환경 속에 빠지게 되면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이런 심정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여인의 이러한 간청은 참으로 올바른 생각이었고, 주님의 은혜를 은혜로 아는 귀한 자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라면 부스러기 은혜로도 충분합니다. 부스러기만 있어도 내 딸이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내 딸이 새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은 부스러기 은혜라도 베풀어 달라고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강조점) ▶ 그런데 이 여인은 부스러기 은혜가 아니라 큰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이 가졌던 믿음이야말로 큰 믿음이라고 칭찬해 주십니다. 마 15:28에 보니“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사랑 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를 둘러싸 고 있는 답답한 환경, 그리고 이 답답한 현실 속에서 오늘 우리도 주 앞 에 나와서 기도할 때, 구할 때 우리 의 기도가 응답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이 가졌던 믿음 그 큰 믿음, 그 큰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절실한 문제에 대한 응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마다 이 여인에 게서 배워야 할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 큰 믿음, 이 여인이 가졌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면 부스러기 은혜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이 여인의 믿음의 특성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부스러기 은혜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리한 상황의 조건을 극복하며 삽니다.  
본문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불리한 환경의 조건을 극복할 수 있었던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을만한, 하나님을 믿을만한 좋은 조건이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도 이 여인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⑴ 수로보니게 여자는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본문의 26절에 보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여자가 어디 여자였습니까? 헬라 여자 - ‘그리이스’ 여자였습니다. 희랍여자였습니다. 정말 헬라 여자였을까요? 우리가 같은 기사를 마태복음에서 보면 마태복음에서는 이 여자를 “가나안 여자”라고 그랬습니다.(마 15:22) 똑같은 사건인데 왜 마가는 “헬라여자”로 말하고 있고, 왜 마태는 “가나안 여자”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 아닌 비이스라엘 백성, 비유대인, 자기들 빼놓고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 흔히 쉽게 통상적으로 헬라사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세계문화는 문자 그대로 헬라문화, 헬레니즘의 문화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 헬라문화의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었겠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독특한 자기 문화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빼놓고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 통상적으로 헬라사람, 이렇게 말을 많이 했습니다. 또는 그렇지 않으면 팔레스타인 지경 안에서 자기 족속이 아닌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들은 본래 거기 와 있던 원주민, 가나안 족속이든가,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향해서 가나안 사람, 혹은 헬라 사람 이렇게 두 가지로 많이 통칭했습니다. 그러기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오는 이 사건은 똑같은 사건입니다. 헬라사람, 가나안 사람 그렇게 이야기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시면 그녀가 “수로보니게의 족속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단어의 합성입니다. `수리'는 ‘시리아’라는 말로서 수리아 지방을 뜻하고, `보니게'는 ‘페니키아’라는 말로서 베니게를 뜻합니다. 따라서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시리아의 베니게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중에 한 사람, 한 여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발생한 지역은 어디였습니까? “두로라”는 지역이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24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두로”가 어디냐 하면 이스라엘의 갈릴리 바다에서 강을 따라,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얼마 올라가지 않아서 두로가 나옵니다. 그러나 두로는 이스라엘 지경 바깥입니다. 지금 나라로 말하자면 이 두로는 레바논에 속한 도시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같이 있습니다. 일종의 쌍둥이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바논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지경 바깥에 아주 가까운 이웃 마을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하고는 아주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반 유대적인 적개심(敵愾心)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거기에 살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이웃에 연한 도시였지만 그러나 이 지경 사람들을 박대했습니다. 그들을 철저한 이 방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이방인의 땅, 어두움의 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특별히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붙일 수 있는 최대의 모욕적인 표현이 있다 면 `개'라고 불렀어요.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도 맘에 안 드는 사람을 보면 `개 같은 분' 이러잖아요? 

⑵ 수로보니게 여자는 신앙적인 배경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두로 지방에 갔을까? 생각해 보면 오늘 본문의 사건에 도달하기까지 일련의 과정들을 추적해 보면 예수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싸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파괴하는 자로 규정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 고 그들에게 핍박을 받으신 예수님 은 잠시 동안 아마 휴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 안에 서는 그런 휴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예수님은 바깥을 벗어나서 두로 지방으로 가신 것입니다. 이방인의 땅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 이 이방인의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신뢰했던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을 만난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문 자 그대로 하나의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어째서 이방인 가운데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렇습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신앙적인 백그라운드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이유나 핑계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어요. 우리 집안에는 믿을만한 그런 조건이 없습니다.”이런 말들은 우리의 편견이요, 선입관념입니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여인은 신앙적인 배경이 없기에 어쩌면 그녀의 믿음은 더욱 순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주변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전혀 신앙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들, 주변에 전혀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 더 순수한 믿음을 가지게 될 가능성 많은 사례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⑶ 수로보니게 여인은 남자가 아닌 여자였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자가 가지고 있던 불리한 조건은 이 여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그 당시에 이류 인간으로 취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여기 사시는, 이 시대 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여성들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 옛날 유태인 남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세 가지의 감사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첫 번째 감사는 ‘하나님,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 유태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다.’ 두 번째 감사는 ‘하나님,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다.’ 세 번째 감사는 ‘내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다.’ 
이 짤막한 에피소드를 통 해서도 얼마나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인권이 박탈당하고 천시 당하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못 믿을까요? 가끔 전도를 해 보면 `제가 워낙 상황이 어려워서 저는 못 믿겠습니다.'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 고 있는 삶의 열등한 조건, 나의 무력함, 그러나 내가 무력하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나의 무지를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지는 않습니까?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인생의 불리한 조건이 반드시 신앙의 불리한 조건이 아닙니다.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주님 앞에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육체의 질병 때문에 하나님의 치유를 바라고 주 앞에 나 오는 과정이 있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내 인생의 불리한 조건이 오히려 은혜의 통로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여인은 그런 의미에서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믿음에 도달했던 사람입니다. 삶의 불리한 조건을 극복한 믿음, 여기 이 여인에게서 배워야 할 믿음의 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금년 한 해 동안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어려운 환경과 상황을 만났다고 쉽게 포기하고, 쉽게 좌절하고, 쉽게 불평하고 원망하는 모습으로 살지는 않았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부스러기 은혜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면 불리한 상황의 조건들을 넉넉히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라면 부스러기 은혜로도 충분함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의 의미를 이제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부스러기 은혜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험을 만날 때에 불평하지 않고 참아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냉소적 거절을 극복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주님에게 나와서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구” 했을 때에 예수님의 응답은 어떠했습니까? 본문 27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 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허락입니까? 거절입니까? 거절이죠. 거절도 그냥 거절이 아니라 거의 모욕에 가까운 거절처럼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이에 어떤 사람은 흥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흥분할 만 합니다. 적어도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예수님의 편견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편견의 특성은 어떠합니까? 편견(偏見)은 오래갑니다. 편견은 쉽게 수정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편견이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한국 땅에 뿌리박힌 끈끈한 지방색의 편견, 그거 쉽게 없어져요? 한평생 붙들고 있습니다. 편견은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조금 후에 대화의 격을 완전히 바꿔서 이 여인에 대해 칭찬하시면서 “당신의 믿음은 정말 대단합니다.”라고 칭찬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편견이 아니라 테스트(test)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여인을 테스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반응 하나? 바로 이 테스트의 창에서 이 여인의 순수한 믿음을 예수님은 확 인하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삶은 테스트입니다. 인생이 테스트입니다.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그렇게 인지하거나 말거나 내가 의식 하던 의식하지 않던 우리의 삶은 테스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님 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테스트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도 도청문제, 감청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지만 생각해 보면 끔찍한 일이 아닙니까? 몰래 카메라를 백화점 화장실에도 설치해 놓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허락도 없이 카메라 폰을 가지고 찍었다고 인터넷에 올리는 이런 행동은 참으로 우리를 당혹하게 만듭니다. 정말 내 행동하나하나가 낱낱이 감시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테스트 당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면 그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대처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인 카메라에 우리들의 모든 행동이 다 녹화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모습, 말씀을 듣고 모습까지 녹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무인 카메라는 우리의 감정, 생각, 마음까지 녹화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은 우리의 삶의 장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낱낱의 사건,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의 사건, 우리의 인간관계, 이 관계 앞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 하는가?를 주님이 보고 계십니다. 따라서 삶 전체가 사실은 테스트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 이 드러날 수 있는 하나의 창을 오히려 제공하시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합격했습니다. 사실 마태복음하고 비교해 보면 마태복음의 기사에서는 예수님이 처음에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다”라고 그랬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  

여러분! 때때로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할 때 “주님! 도와주세요.” 그랬을 때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기도 바로 다음의 사건은 뭡니까? 대답이 없어요. 응답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응답을 거절로 해석합니다. “주님이 내 기도를 거절하셨다. 때로는 그러면 그렇지. 주님이 내 기도 응답하실 리가 없어”라고 하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자조하면서 신앙의 자리에서 쉽게 후퇴해 버립니다. 그것은 우리가 참 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구체적인 증거라고 할 수가 있어요.

올바른 믿음이란 지속적입니다. 한결같습니다. 시종일관(始終一貫)합니다. 시험이 있다고 어려움이 있다고 중도에 포기해 버린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확신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보고, 보지 못하는 보면서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속성은 지속적입니다. 우리가 한번 기도해서 딱 응답이 왔다. 그러면 믿고 응답 안 오면 안 믿는다. 그러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흥정입니다. 바겐입니다. 마치 우리가 일회용 자동 기계에다가 동전을 집어넣고 거기서 내가 필요한 커피나 음료수를  끄집어내는 것처럼 우리는 기도를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있어서 지금 당장 내가 구하는 그대로를 응답하지 않으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 와도 불평하지 말고 참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시죠? 내 과거도 아시고 현재도 아시고 미래도 아시고 무엇이 최선인가를 아시는 하나님. 우리는 성경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 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하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성도라면 지금 당장 응답이 안 나타나도 계속 믿고 있어야 되요. 계속 구해야 됩니다. 여기 우리의 기도에 대한 테스트가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테스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에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나와서 요청을 했던 과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얘기를 하시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어보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 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항상 기도하되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꼭 하나님이 이 악질 재판관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하물며..”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세상의 불의한 재판관도 하물며 과부의 강청을 들어 주는데, 하물며 좋으신 하나님, 전능 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말씀에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역사하실 때 드디어 주님이 응답하실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믿음을 매개 체로 하여 응답하십니다. 거기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여기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지속적인 신뢰, 지속 적인 인격적 신뢰”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계속해서 그 분을 신뢰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어두워도 응답의 싸인이 없어도 하늘이 침묵할 때 우리가 구했습니다.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 같고 하나님조차도 나를 내버리신 것 같은 그런 황량한 들판에 내가 홀로 버림 을 당할 때 중요한 것은 그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시겠습니까? 그때에 도 하나님을 신뢰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지속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기도의 풍성한 응답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요소 가운 데 하나는 지속적인 믿음, 이 지속 적인 나아감이 필요합니다. 이 끈기 있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믿음의 우직함이 필요합니다. “나. 포기할 수 없어요. 하나님 꼭 주셔야 되요. 하나님. 이것이 제가 단순한 욕심을 위해서 그러합니까? 나의 생존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 그래야 우리 가정 더 잘 하나님 섬길 것 아닙니까? 하나님 주세요.”라는 믿음의 우직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님 앞에 나와서 구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결코 시험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고 잘 참아 내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 여인처럼 부스러기 은혜로도 충분하다는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시험도 잘 참아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곤혹스런 일들을 잘 참아내었는데,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의 길을 걷는다고 하면서 힘들 때마다 불평이나 하면서 시험들을 견디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선한 싸움의 결산도, 달음질의 결산도, 믿음의 결산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스러기 은혜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테스트 하실 때에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이 시련의 장에 엎드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참아 낼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부스러기 은혜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삽니다.   
본문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님의 은혜에 매달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은 주님의 거절 같은 음성을 듣고도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8절) 얼마나 위트 있는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존심도 없나? 그럴지 몰라요. 그러나 은혜 받으려면 이 자존심(自尊心)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 자존심 때문에 은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저는 이 여인의 자세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은혜에 매달리는 믿음, 저는 이 여 인에게 주님에 대한 분명한 신뢰가 그 마음의 바탕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여기서 발견합니다. 28절의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을 향해서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희랍어로 '퀴리에' '주여 '라는 말은 참으로 중요한 의의(意義)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유명한 성경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처음 나와서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라고 부른 사람은 이 여인 밖에는 없었다.” 
저는 이미 주님 앞에 나오기 전에 그래서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어떤 믿음이 이 여인 속에 이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주여”라는 것은 단순한 그 예수님을 그저 병 고치는 분 정도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자기 메시아, 자기 삶의 주인, 내 인생을 구원하시고 내 인생을 새롭게 하시고 내 인생을 하나님의 기대처럼 빚 어 만들 수 있는 나의 구원자 , 나 의 주님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똑 같은 기사를 마태복음에서 보시면,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15:22) 이렇게 여자가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목할 만한 표현입니다. 다윗의 자손. 이것은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도록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 가 메시아이시다.”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여인이 상당히 성경을 알고 미리 사랑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구약의 메시아의 약속을 보면, 그 메시아의 약속 가운데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좀더 자세히 연구 하고 싶으신 분들을 이사야 60장, 61장, 62장 이사야의 마지막 장들을 읽어 보면 메시아로 오시는 그 분,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싸매주시고 그리고 만민들에게, 열방들에게 구원으로 오실 구세주. 그 분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구세주 가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한 구세주로 묘사되어 있는 구약의 약속을 이 여인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은 본문 27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 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말씀을 듣고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외견상,  표면상으로는 거절처럼 들리는 예수님의 말이지만 이 여인은 이 말씀을 거절로 듣지 아니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 받으려면 말씀을 자세히 들어야 합니다. 피상적으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자세히 들어보면 여기서 주목할 만한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먼저'라는 단어입니다. 
본문 27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주님은 메시아로 오셨을 때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구원사의 섭리는 먼저 이슬라엘 땅에 오셔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속의 복음을 증거 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이방 사람들을 제외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섭리의 순서일 다름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다음에는 복음이 어디로 가요? 이 방인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다음에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아마도 자세히 주의 말씀을 들었을 이 여인은 이 말씀을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먼저는 이스라엘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은 나도 포함되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는 이방인인 나도 포함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면서 이 여인은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엎드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생활 가만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은혜 받는 사람들에게 증거가 있습니다. 은혜 받는 사람들은 말씀을 붙들고 삽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증거도 말씀에 대한 애정, 그 말씀에 대한 사랑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저는 늘 말씀과 나의 거리, 내가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내 가슴 속에 다가오는가? 말씀이 소중하게 느껴지는가? 말씀을 들으면 감동이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말씀과 나의 거리는 하나님과 나 사 이의 거리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 받는 사람들을 보면 말씀이 너무 너무 좋은 것입니다.

은혜 받고 있는 사람은 분명한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오는 말씀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해서 다가오는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나를 붙들고, 나를 지배하고, 나를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도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붙드는 사람, 그들은 반드시 은혜를 받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디에서 나며,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지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듭니다. 붙들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경의 약속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첫 번째 약속은 이스라엘에게, 그러나 그 다음은 이방인에게도 먼저는 유태인에게요. 다음에는 로마 사람 인 우리에게도 다음에는 한국사람 인 우리에게도, 하나님 맞아요. 나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 주권을 부정 하지 않습니다. 먼저는 이스라엘에 게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신 주님, 그러나 그 다음에는 나도 포함시켜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에서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라고 엎드리는 이 여인의 심정, 주님, 부스러기라도 나에게 주세요. 왜 부스러기를 주겠어요. 이방인에게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포함시킨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 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방인을 똑같이 자녀로 삼아 주시고, 부스러기 아닌 가장 놀라운 은혜를 준비하신 이 주님은 이 여인을 테스트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 테스트에 합격 한 이 여인, 그러기에  이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겸손히 주 앞에 엎드려 “주여, 부스러기 은혜 라도 내게 주옵소서.”라고 구했던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마침내 커다란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여인에게 임했습니다. 
이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드디어 귀신에게서 자유를 얻습니다. 가정의 샬롬,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기도하는 자마다 이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물러가지 아니하면 이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주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주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면 부스러기 은혜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금년 한 해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 큰 은혜, 큰 능력만을 구했지만 현재 나에게 주신 은혜를 잘 활용하거나 관리하는 일에는 등하 시 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제라도 내게 은혜가 내게 족한 줄로 알아야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여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면 부스러기 은혜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하면 부스러기 은혜로도 불리한 조건의 상황을 극복하며 살 수 있으며, 시험을 받을 때에 불평하지 않고 잘 참아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 수 있음을 깨닫고 부스러기 은혜로도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새해에는 금년보다 더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 은혜로운 결산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