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1-28)네  

월리암 제임스가 “믿음은 사람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힘이라”라고 말한 것처럼 성숙한 믿음은 문제 있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본문은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응답에 대한 말씀으로서 도저히 응답을 받을 수 없는 가운데서 절망하지 않고 굳센 믿음으로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예수님께로부터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치료 받았던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막 7:24-30)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히 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賞)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본문 28절 상반 절에서 “...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가나안 여인은 믿음이 크다고 주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본문 28절 하반 절에서 “...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 가나안 여인은 주님께로부터 칭찬받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소원을 응답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의 소원을 먼저 보신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믿음을 먼저 보셨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흉악히 귀신들린 딸의 문제를 해결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축복을 받으려면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가나안 여인과 함께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사람이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나오는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마 8:10을 보니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백부장」이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 삽나이다”(마8:8)라고 할 때 주님께서 칭찬해주신 믿음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① 두 사람 모두 이방인이었지만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주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유대인들을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아주 차갑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주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유대인들처럼 조금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가지고 큰 믿음이 있는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마땅히 경계해야 할 행동입니다. 

② 두 사람 모두 믿음에 대하여 인정과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입니까? 그런데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은 큰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주님께 인정받고 칭찬을 받을 수 있음을 명심하고 현재 나의 능력이 적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비록 적은 은사일지라도 그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여 주님께 인정받아야 하겠습니다.  

③ 두 사람 모두 환자를 직접 예수님께 데려 오지 않고 간접으로 주님께 간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주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확실하고 분명하며 깊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의심 많은 도마처럼 언제나 눈으로 확인해야 하고, 언제나 직접 보아야 하고, 언제나 들어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분명하게 보여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④ 두 사람 모두가 자기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만” 해결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 모두는 말씀의 권세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말씀의 권세는 믿지도 아니하면서도 말씀대로 산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는 알맹이는 버린 채 껍질을 더 중요시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이방인들의 큰 믿음을 높이 평가해 주심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경종과 각성을 촉구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두 사람의 믿음 앞에서 우리 자신들의 신앙을 반성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의 소원이 응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가 약 2:28에서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감동하실 만큼 여러분의 믿음을 보여 드리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님께서 감동하시는 믿음은 아무런 믿음이 아니라 생명력을 가진 믿음이다는 사실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미음만이 어려운 환경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력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환경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있는 믿음을 사람은 환경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능하다면 환경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바꿀 수 없는 환경일 때는 그 환경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께서 이 환경 속에서 어떻게 역사해 가시는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승리자이십니다. 주님께서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우리가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엄청난 새 일을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이 밤에 그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 앞에 내 형편을 내어놓고 나를 온전히 사용하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기만 하면 금년 지난 상반기 동안 살아오면서 매였던 삶의 매임을 통하여 새로운 복음 대로를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환경을 주실 뿐만 아니라 피할 길도 아울러 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우리의 환경만을 탓하면서 불신자들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러한 모습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우리들에게 많은 감동과 도전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간구의 소원을 응답받은 여인입니다. 이 가나안은 여인은 결코 자신의 환경만을 탓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고 환경을 극복한 여인입니다. 본문의 배경(背景)은 이러합니다. 주님의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오고 있었지만 조용한 곳은 없었습니다. 주님은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베푸시고 또 풍랑을 잔잔케 하는 이적을 행하신 후 북쪽을 향하셨습니다. 아마 그곳까지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따라와 시비를 할 리도 없을 것이고 따라올 군중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지나가실 때에 가장 비참한 형편에 놓인 가나안 여인이 따라오면서 “자기 딸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 달라”고 하면서 주님을 번거롭게 합니다. 막 7:26에 보니 이  여인은 “헬라인이고 수로니게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유스타”이고 그의 딸은 “뵈니게”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주님께로부터 개 취급을 받으면서 까지도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고 끈질지게 예수님께서 매달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이 여인에게 있어서 소원은 참으로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들 가정에 귀신들린 자녀가 하나 있다면 가정하여 봅시다. 게다가 흉악한 귀신이 들린 경우를 가상해 보세요. 정말 상상도 하기 힘든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상상만 해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가나안 여인은 귀신들린 자신의 딸의 치유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필사적이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간절하게 매달리는 성도의 부르짖음에 주님은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물론 이 여인이 자기 자신의 엄청난 문제 곧 귀신들린 딸의 질병을 고치기까지는 참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여인의 소원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 여인과 같은 간절한 간구의 소원이 있습니까? 오늘 오후 찬양예배에 나오신 여러분의 간구 하는 모든 소원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응답 받는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시 10:17에서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 주신다”라고 약속하셨기에 겸손하게 머리 숙여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소원을 들어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 20:4에서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야고보 사도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소원을 응답받을 수 없는 이유는 소원을 구하지 아니했기 때문이요, 소원을 구하기는 구했으되 정욕으로 쓰려고 하기 때문에 응답해 주시기 않습니다. 약 4:2,3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고전 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이 무슨 소원을 아뢰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원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이 여인이 도대체 어떤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예수님께 칭찬을 받고 소원을 응답받았는지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21절)
본문 21절에서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처럼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들어가시니”... 믿음의 사람들은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이 여리고로 지나가신다”라는 소문을 듣고 달려 나가 뽕나무에까지 올라갔다가 예수님께로부터 “네가 오늘 네 집에 유하리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눅19:1-9) 거지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자기가 있는 여리고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서(막 10:46) 예수님께 달려 나가 자신의 문제를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중에 소원의 기도가 있습니까? 바로 지금이 여러분의 소원의 기도가 응답받을 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지혜로운 성도라면 이 가나안 여인처럼 은혜 받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에 내일이 아니라 바로 다음 지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고후 6:2에서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 인줄 알고 은혜 받을 만한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2.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서 부르짖어 간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22절 상)
본문 22절 상반 절에서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서 부르짖어 간구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서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때를 따라 「무당」에게 찾아가서 굿판을 벌이고 「절」도 찾아가고 「술집」도 찾아갑니다. 「점쟁이」도 찾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토정비결」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실의(失意)와 낙망(落望) 속에 좌절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가지고 나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특성입니다. 
예를 들어 ① 「히스기야 왕」은 랍사게의 항복 권유 문서를 받게 될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 그것을 펴놓고 기도하므로 난국을 극복하였습니다.(왕하 19:1-7) 
② 「한나」는 가정에서의 속상한 일과 무자한 고통(자식이 없는 고통)을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찾아가서 간절히 기도하므로 해결을 받았습니다.(삼상 1장)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간절한 소원이 있을지라도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신 예수님께 나오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을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것입니다(마 11:28) 그러므로 이 시간 여러분에게 소원하는 기도제목이 있다면 주님께 내려놓고 간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응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3. 주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22절)
본문 22절 하반 절에서 "...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진 믿음이 있어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향하여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이렇게 불렀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 메시아를 고대하던 유대인들은 예수를 경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이방 여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고 이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이 여인의 칭찬 받을 믿음을 봅니다. 
① 예수님을 “주(主)”라고 시인하며 부른 것입니다. 이는 우주 만물과 모든 생명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②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로 부른 것입니다. “다웟의 자손”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왕, 메시야를 상징합니다(삼하 7:12-13) ③ 모든 인생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으로 믿고 부른 것입니다. ④ 흉악한 불치병도 고치시는 만병의 치료자로 믿고 부른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믿음, 큰 믿음, 칭찬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물론 여인이 어떤 경로를 통해 선지자들의 예언을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방 종교, 그것도 우상숭배로 유명했던 베니게 사람이 아닙니까? 이 가나안 여인은 구약성경에 지식도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야가 오리라”는 구약의 예언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이방 지역에 들어 가셨을 때에 “한 집에 들어가 아무게 모르게 하시려”(막 7:24)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비록 단편적인 적은 지식일지라도 바른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배우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곡되고 그릇된 지식은 아무리 많아도 쓸모없을 뿐 아니라 유해하기조차 합니다. 기록된 말씀에 못 미치거나, 기록된 말씀을 지나치는 지식을 받아들일 때 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성경대로의 온전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가나안 여인은 주님만이 자신에게 닥친 절실한 문제를 해결해 주실 메시야이심을 믿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가나안 여인이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조차도 부정한 메시야를 참 메시야라고 고백함으로써 바른 신앙관을 정립하였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완악한 모습과는 달리 여기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그녀는 이방 종교의 환경 속에 있었음으로 진리에 대한 지식은 빈약했을지라도 그 진리의 실체인 메시야를 탐구하는 열성은 뜨거웠습니다. 그녀는 메시아이신 예수 앞에 이방인으로서 민족적 특권이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고통의 짐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기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간절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것입니다. 여기 '흉악히'는 '위험할 만큼 해로운'의 뜻으로 그녀의 딸의 치명적 병세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자녀의 고통은 부모의 괴로움입니다. 특히 자녀가 귀신이 들려 미쳤다는 것보다 더 큰 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 영적인 문제 앞에 딸이 온전해지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그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인간적인 어떤 공로에 호소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하였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만이 내 딸의 문제를, 내가 안고 있는 이 슬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가리지 않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녀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만이 내 딸을 고칠 수 있는 분임을 확신하고 소리 질러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여러 메시아 가운데 한 분이라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오셔서, 성경대로 사시고,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 승천하신 자 외에는 달리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이 감당키 어려운 문제로 신음하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구세주께로 나아오는 데는 어떠한 공로나 자격이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자비와 긍휼히 여기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 외에는 더 필요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종종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누군가에 의지하려는 본능(本能)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여인은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만 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 분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만이 사단의 결박을 풀어 주실 전능자로 믿었습니다. 그녀는 오직 예수만이 기적을 베푸실 전능자로 믿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녀와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죄악 가운데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이는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신앙고백이 훌륭하고 그녀의 믿음이 남다르다 할지라도 몇 마디의 기도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진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만이 칭찬하시고 이런 자에게 응답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4. 주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22절) 
살아 움직이는 믿음은 생명력 있는 믿음으로 마땅히 행동이 수반됩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믿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은 주님에게 나왔고, 예수님을 향하여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소리를 치면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의 고함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제자들이 이를 수습하려고 나섰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청하여 말하기를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인은 제자들이 중재에 나설 정도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분수를 모르고 매우 무례하게 행동한 것으로 보이지마는 달리 생각하면 메시야에 대한 지식과 믿음에 근거하여 적극적으로 간청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에는 묵상 기도, 조용히 음성으로 하는 기도, 부르짖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기도가 더 나은 기도라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신앙이 아는 것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님처럼 예수님께 나와야 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하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절를 하며(막 7:25)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간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주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관념적인 지식, 관념적인 믿음으로만 머무르지 않도록 보다 적극적으로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와서 여러분의 필요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고보 사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도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마 7:21) 우리에게는 역사적 믿음이 필요합니다. 「철학자 키엘케골」처럼 「사색적인 신앙」에 머무르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빙크 박사」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역사하는 신앙을 소유해야만”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적 지식도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역사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념적인 되어서는 안되고 생활 속에서 역사되어야 하는 실천적인 믿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신앙을 칭찬하시고 이런 자에게 응답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5. 시험이 있을지라도 낙망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23-25절)
본문 23절에서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시험이 있을지라도 낙망치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을 가지 사람만이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가나안 여인에 애원에 대해서 한 마디로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거절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이 걷는 길에는 순경이 있는가 하면 역경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부르짖음에 침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이나 냉담의 감정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중요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답지 않으신 것은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딸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가지고 호소했지만 주님은 응답을 지체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이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아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귀는 언제나 불쌍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열려 있으며, 그들을 향해 관심을 집중시키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불쌍한 여인에게 귀머거리가 되셨습니다.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커다란 난관이었습니다. 커다른 장애물처럼 보였습니다. 

그때에 그녀는 이러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즉각적인 응답을 받았는데 나는 왜 거절을 당해야만 하는가? 이런 분이 정말 인자하고 사랑이 많다고 하는 분이신가? 왜 나에게만 이렇게 냉정하시는가? 그러나 예수님이 한 말씀도 대답지 않으신 것은 그녀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기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칼빈(Calvin)은 예수님의 이 침묵을 "침묵을 지키셨던 그리스도의 동기는 이 여자의 신앙을 소멸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이 여자의 열심을 더하고 그 열정을 불붙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그녀가 당한 어려운 난관은 제자들의 거절이었습니다.  본문 23절 하반 절에서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제자들도 이 여인의 소원을 거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뜻이 있어서 침묵을 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단순히 귀찮게 하니 빨리 보내라는 태도였습니다. 제자들은 불쌍한 여자의 문제 해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평안만을 추구하는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비쳐 주고 있습니다.

이때 주님은 다시 한 번 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본문 24절에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 가나안 여인은 세 번씩이나 거절을 당했습니다. 바로 감당할 수 없는 큰 난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가나안 여인은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끊임없는 거절 앞에도 그녀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자신의 무시와 냉대 그리고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욱 가까이 접근하여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의 냉대와 예수님의 무관심도 이 여인의 열심을 꺾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절하다'는 말은 미완료형으로 그녀가 예수님의 발 앞에서 계속 연이어 절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 “도우소서”라는 말은 긴급한 구조를 요청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흉악히 귀신들린 딸의 문제로 예수님께 거듭 거듭 절하며 긴급 구조 요청을 하는 끈질긴 신앙의 모습을 그녀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해서 간청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25절). 물론 이러한 행동은 애걸하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어떻게 보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중심적인 믿음이 어떠하느냐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빙크 박사”는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애걸의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고 가지는 노력의 태도로서, 기독교에서만 정상적인 행동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나안 여인의 애걸하는 행동은 기도 생활을 우리 성도들에게도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실망하는 사람에게 더욱 더 기도할 것을 교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끊임없는 어려운 난관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강청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기도의 가르침에서도 나옵니다. ① 눅 11장 5-13절에 보면 어떤 벗이 있는데, 친구가 밤중에 떡 세 덩어리를 빌리러 왔을 때에 거절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강청할 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 11:8) 9절로 13절에서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② 눅 18장 1절 - 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불의한 재판관이었지만 원수에 대한 원한을 들어달라고 과부가 강청할 때에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고 말하면서 그 강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눅 18:6-7에서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어려운 난관이 있을지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도우심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경우에서도 어려운 난관을 이기는 신앙을 칭찬하십니다. 

6. 도저히 견길 수 없는 굴욕적인 상황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26절)
본문 26절에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굴욕적인 상황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냉대를 받았지만 희망을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주님 품속으로 들어가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참으로 적극적이고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라고 욕하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개를 나쁜 의미로 사용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마 7:6,눅 1621,빌 3:2, 벧후 222,계 22:15) 

그런데 주님께서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개는 애완용 개가 아니라 집도 없고 주인도 없이 근동의 도시들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쓰레기와 오물을 먹고 자기들까지 싸우고 행인을 공격하는 「들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2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자녀들의 빵을 빼앗아 개에게 던지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말씀은 참으로 심한 모욕과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개 취급을 받으면서도 여기에서 물러서지 않고 더욱 간청하기를 “주님,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27절)라고 말을 하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보통 믿음을 가진 자는 시험들고 낙심하고 배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 같으면 얼마나 주님을 헐뜯고 비난하겠습니까? 그러다 보면 내 신앙이 먼저 병들고 파괴되고 맙니다. 이러한 사람은 축복해 주어도 그것을 감사치도 못할 뿐만 아니라 감당하지도 못합니다. 때문에 이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당연히 응답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7. 부스러기의 은혜라도 받기를 소원하는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27절) 
본문 27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인의 끊임없는 기도에 주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다시 거절하였습니다. 여기 '자녀의 떡'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그 우선권이 있음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복음 전파는 먼저 유대인에게 시행되고 그 다음 이방인에게로 진행되었는데 본격적인 이방 전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 특히 사도 바울에 의해서 힘있게 진행되었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이 말씀은 그녀의 모든 소망을 뿌리째 뽑아 버리는 비정한 말씀처럼 보였습니다. 정말 그녀가 믿음이 없었더라면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기 "개"(퀴라니온)라는 말은 이스라엘 지역에 헤매고 다니는 들개(퀴온)의 의미가 아니고 「작은 개로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를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언제나 '개'는 불결, 비천, 비양심, 탐욕스러운 것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메시야로 믿었던 예수님으로부터 불결하고 탐욕스러운 개 취급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됨이 없이 문제 해결을 위한 집념으로 주님을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가나안 여인은 하나님의 질서에 의해 유대인들에 비해 이방인인 자신들이 선택되지 못한 족속이요, 권리를 갖지 못한 자 즉 개들임을 인정했습니다. “주님, 나는 주님의 말씀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열등한 입장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녀는 치욕적으로 여겨지는 바로 그 말을 가능케 하는 원인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비록 자신이 개로 일컬음을 받았을지라도 악한 감정을 품지 않았으니 참된 겸손의 사람이요, ‘부스러기'라도 원하였으니 은혜를 귀히 여기고 적은 것이라도 낙심치 않고 받고자 하는 간절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오히려 개로서 자족했고,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려는 겸손과 그 부스러기로도 넉넉하다는 믿음을 가졌고 결코 낙심하며 후퇴할 수 없는 인내를 갖추었습니다. 그녀는 부스러기라 할지라도 많은 영혼을 위한 진수성찬이 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부스러기라도 만족하는 그녀의 신앙고백에 주님은 축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8절). 여기 '소원대로'는 '원하는 만큼'으로 어려운 난관을 극복한 그녀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장애물을 뛰어넘은 믿음의 여자였습니다. 어머니의 믿음은 딸을 치료케 하였습니다. 그녀의 신앙은 문제를 해결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겸손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자기에게는 의가 없다는 것보다 한층 더 들어가서 자기에게는 불의만이 있다는 하나님의 판단에 승복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이 입으로는 말하기를 “나는 부족하다”하며, “죄인이다”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들에게서부터 그런 판단을 받을 때에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가나안 여인은 “옳소이다”라고 승복했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기본이 될만한 겸손한 신앙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작은 자로서 섬기보다는 큰  자로서 섬김을 받고 싶어 합니다. 때로는 아직 큰 자가 되지 못하였으면서도 스스로 큰 자인 척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없습니다.(마 18:2-4)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개라고 하여도 악한 감정을 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개 취급하신다 해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내리는 선고이기 때문에 아무리 개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오히려 족하게 여길 수 있는 겸손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같은 겸손한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고난의 연속입니다. 언제나 많은 문제들로 얽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소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 말미암아 기도의 응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문제는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응답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처럼 ①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②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서 부르짖어 간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③ 주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④ 주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⑤ 시험이 있을지라도 결코 낙망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⑥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굴욕적인 상황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⑦ 부스러기의 은혜라도 받기를 소원하는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바로 우리가 취해야 할 신앙의 자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명의 주로, 구원의 주로 고백하며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므로 응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물론 때로 하나님이 침묵으로 우리를 훈련할지라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인내하며 더욱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수치와 멸시, 냉대와 무관심에서도, 우리를 무시하는 어떠한 사건이 우리 앞에 다가온다 할지라도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야말로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주님을 칭찬하십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네 소원대로 되라”고 축복을 하십니다. 이제 바라기는 가나안 여인과 같은 큰 신앙을 소유하여 문제투성인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의 소원이 응답받는 복된 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