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14)

본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빛의 자녀답게 살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본문 8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전에는 어두움이었더니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 된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빛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 1:9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녀들은 빛 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 5:14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 8:12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제 우리는 어두움이 아니라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빛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게 해줍니다.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칠흑 같은 밤  바다에서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배에게 비취는 등대불은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방향을 알려주고 소망을 심어주는 등대불입니다. 
뿐만 아니라 엡 5:14에서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잠에서 깨어 빛을 발해야 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빛의 자녀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빛의 자녀처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빛의 자녀가 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8절) 
본문 8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빛의 자녀가 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지난날의 어려웠던 시절을 잊어버리고 오늘을 잘못 살아가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현재와 과거, 과거와 현재를 대조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며 오늘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내일을 위해서 소망 가운데 기도하는 성도가 믿음 있는 성도입니다. 
사람은 과거에 매여 있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또한 현재에 빠져 있으면 쉽게 교만하거나 좌절합니다. 우리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오늘을 살고 미래를 바라보고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과거는 어떠합니까?
엡 2:1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엡 2:2에서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을 풍습을 좇던 자들이었습니다.
엡 2:3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씀처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자들처럼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엡 2:5에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고 말씀처럼 허물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엡 2:11에서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라는 말씀처럼 이방인이었습니다.
엡 2:12에서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엡 2:13에서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전에는 멀리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과거와 현재 미래를 대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 8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씀처럼 전에는 어두움이었습니다. 여기의 “어두움”이란  “흑암, 캄캄함”을 말하는 것으로서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상태에 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회개한 과거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들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주님께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나도 용서하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습니다.(요 8:11)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과거에 너희는 이렇고 이랬지만 그러나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안에서"라는 말의 의미는 “~ ~ ~ 속에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안에”라는 말씀을 많이 쓰셨고 바울사도도 안에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 사람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들이 “주안에 있다”라고 할 때 “주안에”라는 말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① 주님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② 주님의 속죄사역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③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 한다는 것입니다.
④ 주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⑤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너희들이 주님밖에 있어서 어두움에 거하였지만 이제는 너희들이 주안에 있으므로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어두움과 빛은 정 반대입니다. 공존할 수 없습니다.(고후 6:14)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이 들어가면 어두움은 사라집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두움이 들어 올 수 없습니다. 빛이 사라지면 어두움이 자연적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가능합니다.
말 4:2에서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의로운 광선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자들은 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에게는 빛을 비쳐 주심으로 예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된 것을 깨닫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빛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9절)
본문 9절에서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빛의 원형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33년간의 생애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세상풍조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삶은 세 가지 특성을 가지셨습니다. 그 세 가지 특성을 본문은 「빛의 세 가지 열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빛의 열매는 곧 성령의 열매입니다(KJV역). 9가지 성령의 열매를 3가지 빛의 열매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풍조대로, 남이 사는 대로, 내가 배운 대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이 그리스도의 삶의 3대 특성을 좇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모범적인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①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악독에 반하여 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과 함께하시므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시니 성품을 「선」이라고 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선하신 성품에 대하여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전했습니다. 마 12:19-20에서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싸우고 고함을 치고 비도덕적이고 무자비한 이 어둠의 세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선함을 모방하여 빛의 자녀처럼 삽시다. 

②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의]란 “옳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항상 의로운 일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 42:4에서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의란 다른 사람에게 갚을 것을 다 갚음으로 오는 떳떳함, 정당함, 옳음 등을 말합니다. 바른길을 가는 것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대로 살아가는 일. 말씀을 인생의 길로 여겨 가는 삶입니다. 마 7:13-14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것은  자식을 키어도, 형제간에도, 사업을 해도, 그 어떤 일을 해도 편파적이 않고 공정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입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너무도 불공정합니다.「가진 자와 없는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특권층과 일반층」 그러므로 갈등이 있고 눈물이 끊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공정하고  공평하십니다. 인종, 혈통, 지식, 재산유무, 시대를 초월하여 공정한 사랑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것이 의로운 삶입니다. 

③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진실]이란 “참,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말 속임수와 대조적으로 표현되는 순수함과 정직성, 참된 것,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요 14:6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언제나 진실하며 겉과 속이 일치하여 신뢰감을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진실 그 자체입니다. 거짓을 꾸민다는 것은 자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입니다. 거짓말 잘하는 사람일수록 약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강자입니다. 오직 사실, 진실, 참을 말씀하시고 그대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강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① 선하게 ② 의롭게 ③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10절)
10절에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점검하며 사는 것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동물들도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동물을 기쁘게 해주고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사냥을 해서 갖다 주고 몸을 비벼대고 애교를 부리고 합니다. 우리들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지 그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기쁘게 해 줄 일들을 하게 됩니다. 부모, 아내나 남편, 자녀들.. 이것이 당연한 것이고 또 그렇게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들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시험하여 보라”는 뜻은 “나타내 보라. 증명하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즉 “너희는 너희의 생활 속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이 무엇이 있는지 나타내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들이 무엇인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엡 4:1-3에서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부름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또한 엡 4:11-12에서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엡 4:22-24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삶의 내용이 ‘나를 기쁘게 하는데 애쓰고 있는가’,‘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애쓰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애쓰고 있는가?‘ 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합니까? 싫어하는 일만 골라합니까?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합시다. 주님의 눈치를 볼 줄 압시다.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모든 것을 다 바치셨습니다. 모든 것 내 마음대로, 내 성격대로 하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합시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도 생각, 말, 행동, 사업, 장사, 공부, 취미활동, 여가선용, 돈사용, 자녀교육, 결혼, 등등 인생의 모든 일에 주님이 기뻐하는 일에 분별력을 가지도록 주님을 모방합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늘 고민하고 이를 위하여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주님이 싫어하는 일만 하여 주님을 섭섭하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갈 때 세상은 빛으로 가득해 집니다.

셋째로 어두움의 일을 버리는 것입니다.(11-13절)
어두움의 일을 버리게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11절 상)
본문 11절 상반 절에서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빛과 어둠은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가야 하며, 빛이 꺼지면 어둠은 지배하게 됩니다. 악한일, 불의한 일, 거짓의 일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후 6:14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의 자녀는 어두움의 일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음행, 부정, 탐욕, 더러운 말, 부끄러운 일, 비양심적인 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일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어둠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엡 5:3-4) 

② 어둠의 일을 책망해야 합니다.(11절 하)
본문 11절 하반 절에서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어두움의 일을 책망해야 합니다. [참여하지 않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자세이고, 방관적인 자세입니다.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어둠의 일을 하는 사람을 단호히 책망해야 합니다. 

여기의 “책망하라”는 말은 “야단치고 꾸짖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폭로하다. 밝히 드러내다, 죄를 깨닫게 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밝히 드러내다, 죄를 깨닫게 하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어두움의 일을 그냥 덮어두지 말고 왜 그것이 어두움의 일이고 죄가 되는지 밝히 드러내어 깨닫게 하라는 말씀이 책망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의 체질로는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두움의 일들을 덮어두고 모른 척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의 일들은 드러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드러내지 않고 숨겨두면 숨겨 둘수록 더 썩어지고 골아 터지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우리들의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눅 8:16과 11:33에서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싫은 소리 들어도 할 말은 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들처럼 어두움의 일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빛은 아무리 작을 지라고 드러납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모든 실상을 드러냅니다. 사회의 비리, 직장의 비리를 보고도 묵인하는 사람은 빛낸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둠에 처하여 회개할 줄 모르는 바리새인들을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처럼 하려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두움의 일을 책망해야 합니까? 
①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에서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덮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인, 재벌, 고위 공무원, 인기 연예인 ... 이들의 숨겨진 비리들은 덮어 두기에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회는 온통 부정직함과 속임과 술수와 불성실과 비도덕으로 썩어가고 있습니다. 남보다 더 쉽게 돈과 명예와 출세를 위하여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다는 세상입니다. 여기에는 의사도, 교수도, 국회의원도, 사장도, 학생도 예외가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와 교인들까지도 합세합니다. 이 사회를 빛낸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서로 서로 고발정신, 어둠을 보고 동참하지 않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책망 즉 폭로하여 드러내는 일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안정된 나라일수록 시민의 고발정신이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발정신이 부족합니다. 억울해도 참고 넘깁니다. 특히 본문 부끄러운 사건(성폭력 등)은 그냥 피해자가 덮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것은 체면 때문이지요. 자기의 부끄러움보다 그 범죄자로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방지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자신의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피해를 고발하는 용감한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드러내어야 그들이 빛으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미국은 고발의 나라입니다. 교통법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자기 아이도 때릴 수 없습니다. 고발해 버리니까요. 고발정신, 어둠을 폭로하는 정신으로 그 커다란 나라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어두움을 책망할 때에 책망 받은 자들은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에서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어두움을 책망할 때에 책망 받은 자들은 빛으로 나타납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상태가 어두움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빛에 대한 갈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이 밝히 드러나게 되고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빛 되신 예수님께로 나아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어두움의 일을 깨닫게 되면 빛으로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단 선지자는 목숨을 걸고  다윗 왕의 죄(밧세바와 간음)를 폭로함으로 다윗은 회개하고 멸망의 길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자들(대제사장, 바리새인)에게 피해를 볼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죄를 폭로했습니다. 폭로하는 것은 빛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어두움의 일을 책망하고, 밝히 드러내고 깨닫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은 여려가지 방법으로 시도해 보아야 합니다. 꾸중하고, 타이르고, 빌어보기도 하고, 바가지를 긁고, 집을 나가고, 나도 보란 듯이 어두움의 일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러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잘 되지 않습니다. 감정적인 책망을 가지고 안 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어두움을 드러내야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 빛의 자녀가 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기 위해서는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나타내 보여야 하며, 어두움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정말 주님이 보시고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늘 고민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서 부모로서, 남편과 아내, 자식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사장으로서, 직원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14절에서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신앙의 잠을 자고 있는 우리들에게 지금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에게 비추고 있으니 깨어 일어나 그 빛을 받아 너희도 빛을 어두움에 비추어야 합니다. 이제라도 잠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이제는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음을 깨닫고 어두움의 자리에서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깨어나야 합니다.(사 60:1) 그리함으로 우리들의 빛 된 삶을 통하여 이 나라,사회에 갈 길을 보여주고 소망을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