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있는 삶

-조재호목사/ 고척교회

창세기 6:5∼8, 에베소서 2 : 8~10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물론 과학과 기술이 변화되는 속도가 빨라서이기도 하지만 인간들의 개인적인 욕망충족을 위해 나 이외의 존재들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수단으로 이용하는 모습들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창조하셨던 때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고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함을 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죄악 된 모습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창 1:27)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기 의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죄악’이란 단순한 허물을 의미한다던가, 한두 번 어쩌다가 짓는 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런 죄악 된 세상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감탄하셨던,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창조했던 인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오직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고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고 계셨습니다.

비록 타락해 가고 혼돈으로 빠져 가는 인간의 역사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관심을 가지시고 세심히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일말의 희망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 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관심 있게 보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죄 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관영’이라는 단어는 극히 많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죄악들이 있었는지 알기 위해 그 시대의 사회상을 살펴볼 필요도 없이 사실 우리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보면 바로 오늘과 같은 시대가 죄악이 관영한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사랑합니다. 돈 때문에 사람들의 생명도 좌우되고 전쟁도 일으키고 가족들을 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를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또는 나에게 손해가 되는지가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이 됩니다. 이미 사회는 절대적 가치관을 중시하던 사회에서 상대적 가치관을 우상시하는 사회로 환원되었습니다. 

이번에 일어났던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 어떤 국가들은 국제적인 테러범들을 양성하고 후원하는 이라크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면서 미국의 침공에 찬성하기도 했고, 또 많은 나라들은 어떠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것은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속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나라들이 이라크 침공에 대해 취한 여러 의사표시는 각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 남자에서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한 후에 인기 절정을 누리고 있는 한 연예인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법원이 성전환 수술 시 호적의 정정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얼마 전부터 호적의 정정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성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서 나온다고 하는 절대적인 가치에서 당사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성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상대적 가치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한 것을 한탄하고 근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단순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게 되면 신체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닮은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이 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지음받은 바로 그 인간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인간의 교만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인간들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한탄하다’라는 뜻의 원어는 ‘나함’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은 ‘신음하다’, ‘숨이 차다’는 뜻으로 자신 또는 타인의 아픈 현실로 인해 고통 가운데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비통해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한 ‘근심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아차브’는 ‘심령이 찢어지다’, ‘찢어지는 마음의 고통으로 짓눌리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죄악이 온 세상을 타락케 하고 인간 영혼을 황폐케 해버린 비극적 현실을 바라보시고 하나님께서 찢어질 듯한 마음의 고통을 받으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지면에서 쓸어 버리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완전히 멸하시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하나님을 찾는 자들로 가득 채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3.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노아입니다. 9절을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그 당시 사회상에 비추어 봤을 때 이러한 삶은 파격적인 삶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자신의 이익과 향락과 욕심을 따라 살고 있을 때 오직 노아만큼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말은 노아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삶, 왕따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쩔 수 없이 왕따의 삶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은 삶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해서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고 완전한 삶을 살아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 실수도 하고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덮어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은혜 주시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요즘처럼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모르는 이 때에 여러분들 모두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