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귀의 기쁨

-이성희목사(연동교회)


스가랴 9 : 9~10, 마가복음 11 : 1~10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승전 장수의 입성과는 달리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초라한 입성이었습니다. 승전한 장수는 군사들을 이끌고 말을 타고 승전가를 부르며 환호 소리를 들으며 입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제자들과 길가 구경꾼들이 호산나를 부르는 것을 들으며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의 기사는 복음서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전체의 3분의 1 가량을, 마가복음은 5분의 3 가량을, 누가복음은 4분의 1 가량을 수난과 부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그만큼 중요한 생애의 한 부분입니다. 수난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수난은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입성하시므로 본격적 수난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대열을 보십시오. 겸손하게 어린 나귀의 등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입성하시면 한 자리씩을 차지하려는 꿈을 가진 의기양양한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군중의 소리에 따라 몸을 맡기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예수님을 태운 한 어린 나귀가 있습니다. 누구도 이 나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귀에게 이 날은 가장 기쁜 날입니다. 생애 최대의 날입니다. 기뻐하면서도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신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을 태운 어린 나귀의 심정이 되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어린 나귀에게는 선택된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바게와 베다니에 오셨을 때에 맞은편 마을로 가서 나귀를 데리고 오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입니다.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간 거리는 3킬로미터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귀에게는 예수님을 태울 수 있게 선택된 기쁨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 나귀를 선택하였습니까? 어떻게 그 마을에서 그 나귀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많은 나귀 중에 그 나귀가 선택된 것입니다. 그 나귀는 선택된 복 있는 나귀입니다. 

선택이란 은총입니다. 선택되었기에 내 등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나귀는 등이 무거워야 나귀의 존재 가치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하는 것이 가치입니다. 기쁨입니다. 만일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저주입니다. 특별히 내가 선택되어 예수님을 등에 업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것이 은총입니다. 내가 특별히 선택되어 예수님의 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선택되어 무엇인가 짐을 진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칼빈주의의 5대 강령 가운데는 “무조건적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으로 선택받는다면 우리 가운데 선택받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조건이 없기에 선택받고 구원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을 받다 선택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감격스럽고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선택을 받아 예수님을 모시고 다닌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하고 보람된 일입니까? 나와 같은 죄인이 예수님을 등에 업고, 모시고, 태우고 다닌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뿐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태우는 자의 기쁨을 생각해 보세요. 이 나귀는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갑니다.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기쁨이 컸을 것입니다. 이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어쩌다 제자들을 만나서 예수님을 태운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스가랴 9:9에서 예언한 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예언에 따라 이 나귀에 타시고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태우고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가서 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의 동화에 ‘오페이로’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오페이로’란 ‘지다’ 혹은 ‘업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힘센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힘센 자의 부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힘센 장수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장수가 마귀를 보고는 무서워 쩔쩔 맵니다. 그는 힘센 장수보다 마귀가 더 힘센 자라고 생각하여 마귀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는데 너무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지나가다가 십자가를 보더니 마귀가 무서워하며 도망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주인이 마귀보다 힘이 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주인의 부하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십자가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예수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찾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작은 개울에서 사람을 업어 옮겨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어떤 작은 소년이 개울을 건너려고 왔습니다. 그는 소년을 업고 갑니다. 등에 업힌 소년이 점점 무거워지는데 개울 가운데쯤 갔을 때는 납덩이처럼 무거? ?발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이 힘센 사람은 소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예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겁소?” “세상의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지고 가기 때문에 이렇게 무겁답니다.” 열심히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섬기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등에 업는 복을 누립니다. 



셋째, 나귀는 겸손하게 순종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나귀는 어린 나귀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등에 무엇을 태워본 적이 없는 나귀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애에 처음으로 무엇을 태웠는데 바로 예수님입니다. 생애 처음 태운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이 나귀는 출발이 좋았습니다. 

아무 것도 태워본 적이 없는 나귀의 등에 무엇을 태우면 날뛸 수도 있습니다. 로데오 경기를 보세요. 등에 사람이 타기만 하면 미친 듯이 날뜁니다. 특히 한 번도 등에 누구를 태워본 적이 없는 로데오 경기용 소나 말이라면 거칠게 날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귀는 날뛰지 않았습니다. 침착하고 조용했습니다. 경거망동하지 않았습니다.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갈 때에 사람들이 길가에서 호산나를 부릅니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했다면 나귀가 더 뽐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예수님을 잘 모셨습니다. 옛날 제나라에 안자라는 정승이 있었습니다. 이 정승이 말을 타고 입궐할 때 마부가 더 우쭐하였습니다. 마부의 아내가 보니 정승보다 마부인 자신의 남편이 더 당당해 보여서 남편을 타일렀습니다. 그 후에 그 마부는 겸손해졌고 대부라는 벼슬을 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태우고도 겸손한 자가 상을 얻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에서 큰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태우는 나귀에 불과합니다. 종에 불과합니다. 바울의 말처럼 무익한 종입니다. 하여야 할 것을 한 것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겸손하게 예수님을 모시고 등에 업고 예수님을 전달하고 예수님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겸손한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