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사하시는 예수님 

- 진희성목사/영남신학대학총장

요한복음 8 : 1~11



세상에서 하기 힘든 일들 중 하나가 미운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게 공격을 퍼붓는 사람에게 관용과 미소를 보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의 서재에는 “화가 나면 열을 세라. 남을 죽이고 싶으면 백을 세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또 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편안하고 행복한 삶 중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날 때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자백’입니다. 회개란 자발적인 것입니다. 아무도 내 죄를 알지 못하고 추궁하지도 않을 때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용서’와 ‘회개’는 성숙한 인간을 만드는 가장 좋은 재료이기도 합니다. 본문 말씀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처리 문제를 기록한 사건입니다. 이 여인은 간음 중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잡혀와 돌에 맞아 죽게 될 위기를 맞이합니다. 유대교의 율법에 따르면 간음은 죽을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 대해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보면서 함께 은혜 나누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밖으로만 향하는 눈예루살렘 성전은 시끄럽습니다. 모두가 비판하고 모두가 “죽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모여든 군중들의 눈에는 간음한 여인의 죄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그 현장에서 벌을 받을 죄인은 간음한 여인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의인입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는 인간의 드러난 죄와 더불어 드러나지 않는 본성의 죄도 있습니다. 

우선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가 저지른 드러난 죄입니다. 가난해서 생계유지를 위해서 일 수도 있고, 자유분방한 성적 본능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간음죄는 사람들에게 들켜 드러났지만, 오히려 들키지 않아 드러나지 않은 죄가 그 현장에 많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내면세계에는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죄의 유혹은 계속됩니다. 

둘째, 여인을 끌고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있는 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여인을 이용했습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법을 들먹여 사람을 죽이고 파괴시키며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을 종종 봅니다. 교활하고 악랄한 짓입니다. 자신은 종교적으로 의롭기 때문에 이 여인을 심판한다는 위치에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위해 온갖 비난과 욕을 퍼붓고 있던 사람들에게 있는 죄입니다. 이들은 간음한 여자는 없어져야 사회가 깨끗해진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분노와 핏발이 가득 서고 사회의 공의와 정의 실현을 위해 여인을 죽이려고 돌을 들고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질문 의도입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기 보다는 늘 타인에게 먼저 적용합니다. 우리 주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생명을 살리는 데 사용하지 않고, 생명을 죽이는 데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씀의 칼을 시퍼렇게 세운 후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을 가차 없이 정죄하며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라고 주셨습니다. 



2.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눈율법과 말씀을 오직 간음한 여인에게만 향하던 무리들에게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합니다. 타인에게만 적용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너 자신에게 적용해 보라는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그러자 어른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자리를 떠나고 오직 예수님과 여자만 자리에 남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어리석음, 특히 자신도 죄인임을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간음한 여인만 죄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단어를 믿지 않는다. 나는 의인이나, 위인이나, 성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죄인이다.”예수님께서 여인이 죄 지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셨습니다. 죄는 밉지만 인간 본성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조문보다 율법의 정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엄벌에 처해야 하지만 오히려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법조문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간음한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법보다 더 위대한 원리는 바로 사랑의 원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물음표에서 느낌표로본문 속에 나타난 이 여인이 겪은 수치와 모멸감은, 어떤 고통과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고통이었습니다. 돌로 쳐 죽이려고 많은 사람들, 아마 여인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두려움, 절망, 수모 그리고 죽음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이 여인에게 행복과 삶의 기쁨과 감동은 물음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기막힌 처지에 빠진 이 여인을 정죄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용서하고 희망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조건 없는 용서와 사랑을 받은 여인은 더 이상 ‘간음한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새롭게 태어난 ‘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미래는 정죄 아래 놓여 두려움과 불확실한 물음표가 아니라 용서받은 자가 누리는 평안함과 감격의 느낌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