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본받아 

- 임화식목사/ 순천중앙교회

요한복음 12 : 24~26

한 젊은 사형수가 단두대에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혹독하게 추운 날씨에 집행관들이 초조하게 사형 집행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정된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집행관이 종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언덕 위에 있는 종각에는 늙은 신부가 종을 치기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신부는 그의 처소에 있었고 집행관은 왜 종을 치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늙은 신부의 대답은 자신은 이미 좀 전에 시각에 맞추어 종을 치고 돌아와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리둥절해진 집행관은 종을 점검하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종각 위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종각 꼭대기에 이른 집행관은 눈앞의 광경에 아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소녀가 종의 추를 꼭 붙들어 안고 피를 흘리며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소녀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끌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소녀의 손에는 유서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오라버니, 이 종이 울리기 전에 부디 회개하고 구원 받으소서.”

이 소식을 들은 당국은 사형집행을 연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수감된 청년의 방에 소녀의 주검과 유서가 전달되었습니다. 살인강도로 체포되어 단두대까지 끌려갔던 사형수, 이전에는 단 하나 뿐인 누이동생으로부터 수없는 눈물의 호소를 들으면서도 번번이 신앙을 거절했던 사형수, 단두대 위에서 칼날을 기다리면서도 무표정하게 굳어만 있던 사형수, 그가 자기 누이의 주검과 유서를 보는 순간 마침내 심장이 뒤집어지게 되었습니다. 누이의 주검을 끌어안고 통곡을 했더랍니다. 누이동생의 죽음은 그로 하여금 그의 죄를 깨우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하소서.” 사형수는 그 이튿날 단두대 위에서 조용히 하나님과 누이동생의 곁으로 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고 이 누이동생의 죽음을 헛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어려서 교회학교에 다닐 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듣기로는 동생의 희생적인 죽음의 소식을 들은 임금님이 그 오빠를 살려 주라고 해서 오빠는 사면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너무너무 감동이 되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자꾸만 눈물이 날려고 그러는 것을 애써 참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결국 오라버니도 사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거 이야기가 달라진 것 아닙니까? 여동생의 죽음이 너무도 아깝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국 그 여동생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닐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여동생의 죽음은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었어요. 오라버니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동생의 희생적인 죽음이 없었다면 그 오라버니는 지옥에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한 오라버니는 이제 지옥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동생의 죽음은 사랑하는 오라버니의 영혼을 구원한 참으로 소중한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25절)”고 했습니다. 

생명을 사랑한다 함은 자기 애착으로 희생을 거부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은 희생의 밀알이 되어 썩어 진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은 곧 자기 희생의 역사입니다. 기독교는 관념이나 묵상의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 구원을 위해 행동하는 복음입니다. “네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복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요구받습니다. 희생적인 삶은 무한한 영향력을 가집니다. 그 자체가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로 인한 사상적, 환경적, 간접적인 영향력은 대단한 힘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들을 몸소 온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흘리신 보혈로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가 땅에 떨어져 죽어지는 한 알의 여문 밀알과 같은 삶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희생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과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는 4·19의거와 5·18 광주에서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고귀한 생명을 민주 제단 위에 바친 수많은 값비싼 희생이 이 나라의 민주화를 앞당겼으며 한 알의 밀알이 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희생이 오늘의 한국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희생은 원한이나 미움이 아닌 사랑의 발로입니다. 진정한 희생은 분노가 아닙니다. 사랑이며 연민이고 박애입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은 교권에 대한 애착과 두려움, 그리고 시기와 분노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역사를 바꾸고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정하의 “아름다운 추락에서”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저 나뭇잎 떨어지고야 말리라 / 기어이 떨어지고야 말리라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해 / 기꺼이 자리를 비켜주는 저 나뭇잎은

슬프지 않네 / 남아 있는 이를 위해 / 미련 없이 자신의 한 몸 떨구는

떨어지는 순간에도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 저 나뭇잎의 아름다운 추락을 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만 매달려온 / 내가 부끄러웠다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려온 나의 집착 / 억지만 부려 그대 마음 아프게 한 / 내가 부끄러웠다.



아름다운 추락은 예수님의 삶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임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낮아지는 자가 높아진다고, 땅 위에서 낮아진 자가 하늘나라에서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뭇잎이 자신의 몸을 떨구어 추락하는 것은 땅에 떨어져 썩어져 새로 나는 나뭇잎의 자양분이 되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한 알의 밀에 비유하셨습니다. 여문 밀알은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썩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없이 많은 새로운 밀알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 아닙니까? 시인은 바로 이와 같은 자연의 섭리를 망각하고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안간힘 쓰는 인간들의 모습을 부끄럽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앙드레 지이드의 말마따나 “모든 미덕은 자기희생에 의해 완성된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인이 다섯 살과 세 살 된 아들을 키우기 위해 철길 가에 있는 신발 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기 때문에 안고, 업고, 공장으로 출근하여 공장 안에 있는 조그만 방에서 놀게 하고 부인은 일을 했습니다. 따뜻한 어느 봄날, 방안이 답답하다고 두 아이들이 엄마 몰래 철길로 나갔습니다. 철길에서 조약돌치기도 하고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하면서 놀고 있을 때 기차가 달려들었습니다. 누군가가 애들이 없다는 소리에 엄마가 뛰어나가 보니 철길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쏜살같이 달려가 두 아들을 철길 밖으로 던져 낸 순간 기차가 달려들어 엄마를 치고 지나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두 형제는 고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라서 어른이 된 후 어머니의 무덤에 조그마한 묘비를 세우고 “어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라고 비문을 새겨 놓았더랍니다. 

그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일당 얼마 받으며 일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 기찻길에서 놀고 있던 두 아이의 생명을 건져내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그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두꺼비가 새끼를 가졌을 때 능구렁이를 찾아가서 약을 올려 잡아먹히고는 그 뱀이 죽으면 그 뼈마디 마디에서 새끼가 나온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 그렇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부모님들의 희생 헌신 없이 오늘이 있게 된 자식이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수많은 선조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던 까닭에 오늘 우리 교회가 있고, 나라와 민족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거룩한 희생 없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희생과 양보가 필요한 때입니다. 공존공영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땅에 떨어져 죽어지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살고 너도 살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땅에 떨어져 썩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기 부정이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한없는 용서와 참 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온몸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너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