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 꽃을 피우십시오/시편 126편
 
 

오늘 본문 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우리 영혼에게도 이런 해방의 날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땠습니까? 
영혼의 자유함을 느끼며 꿈꾸는 것 같은 황홀한 기쁨이 있지 않았습니까? 

1979년, 제가 한동안 교회를 멀리했다가 다시 회개하고 은혜를 받았을 때 
얼마나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미운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그들이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입술에서는 항상 찬양이 흘러나왔고, 보는 것마다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이처럼 영혼이 해방되어 영안이 열리면 아름다운 것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추한 것이 보이고, 비판거리만 보이면 영안이 닫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흔히 "영안이 열린다"고 하면 신비한 눈이 생기는 것으로 여기는 분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볼 수 있고,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예수님 안에서 세상과 사람을 아름답게 보고 그 아름다운 삶을 실천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영안이 열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추한 것을 보고, 비판과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다면 그것은 영안이 닫힌 것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 속담이 의미하는 바를 아신다면, 정말 좋은 것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보고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여러분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다른 사람의 겨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안이 열리면 무엇보다 우리의 눈이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가끔 주님께서 질문하실 것입니다. "김집사야! 네 눈에 무엇이 보이느냐?" 
"예! 경제난이 보이고, 어려운 상황이 보이고, 사업이 안되는 것이 보입니다. 
남편은 이해심이 없고, 아내는 바가지만 긁고, 자식은 속상하게 하는 일만 보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보입니다. 감사할 일이 보입니다. 남편과 자식이 
정말 사랑스럽군요. 정말 아름답군요. 자세히 보니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었군요." 

이 시간 다시 한번 하나님께 그런 사랑의 렌즈를 끼워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사람이 밉게 보이지 않고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불평할 것들은 보이지 않고 감사할 것들이 크게 보이게 해 달라고 하십시오. 
그 고백은 사단의 포로에서 놓인 심령에게 있어야 하는 자연스런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에서 이스라벡 백성들은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면서도 
동시에 아직 해방되지 못한 형제들을 위해 4-6절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형제들의 고통을 보면서 자기 책임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북한 동포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북한의 고통은 일차적으로 그들 자신의 책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책임으로도 느낄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도 4절의 기도처럼 그들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남을 불행을 볼 때 내 책임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자세를 가질 때 우리의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왜 우리 나라가 어려워졌습니까? 책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미워하고,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을 많이 욕하지만 우리도 책임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면 우리 모두에게 남는 것은 패배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와 공동체가 어려울수록 비난의 소리가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요즈음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비난의 목소리만 높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 어려움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사실 우리들의 공동책임입니다. 특히 믿는 사람들의 책임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책임을 느끼는 사람은 없고 비난하는 사람들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정말 비난할 자격이 있습니까? 정말 그렇게 정직하게 살았단 말입니까? 
자기는 대충 하면서 남이 잘못하면 무섭게 비난하고 헐뜯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면 안됩니다. 비판의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는 정말 겸손해져야 합니다. 
적어도 자기의 잘못과 자기의 책임에 먼저 눈을 뜬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진정 꿈꾸는 듯한 내일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합니다 > 

우리가 꿈꾸는 것과 같은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인생의 영혼은 눈물이라는 물을 주어야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보면 너무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인색한 것도 문제이지만 눈물이 인색한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눈물의 의미를 모르면 참된 기쁨도 얻기 쉽지 않습니다. 눈물을 찾아야 합니다. 

특히 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인생은 축복을 예비할 수 있고 재기할 수 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입술이 회개하는 입술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레미아 애가 3장 2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입을 티끌에 대라는 말은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진정 죄인임을 깨닫는 겸손한 사람에게 소망은 성큼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기만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자기 감정 해소일 뿐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씨를 뿌릴 줄 알아야 삶의 새로운 창조는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거둘 생각보다 수고의 대가를 지불하려는 생각이 앞서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열매는 기대하지만 진정 열매 얻는 방법은 외면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없는 부활, 십자가가 없는 오순절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질 줄 알아야 믿음도 성숙되고, 축복도 얻게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분은 "왜 나는 믿음이 자라지 않을까?"라고 고민합니다. 
왜 믿음이 자라지 않을까요? 뿌리지 않기 때문이 아닌지 반문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광과 기쁨은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축복과 영광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 기쁨의 단을 얻으려면 눈물을 흘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저는 본문 5절 말씀을 보면서 생각나는 괴테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지런한 꿀벌은 슬퍼할 틈도 없다."는 말입니다. 
꿈꾸는 듯한 놀라운 축복을 얻으려면 뒷짐을 지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뒷짐 지고 있는 것만큼 좋지 않은 것이 뒤에서 모함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서 클 생각은 하지 않고 모함을 해서 크려고 합니다. 
모함은 가장 사단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함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역사를 보면 왜 이렇게 모함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TV에서 방영되는 사극들 보십시오. 모함이 없으면 사극이 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도덕과 윤리를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모함으로 죽이려고 합니다. 
명분은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이지만 그 명목으로 모함을 해 죽이면 됩니까? 

몇 년 전에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라는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난세를 살았던 선비 23명의 이야기에 관해서 쓴 책입니다. 
그 선비들을 보면 하나같이 모함으로 죽거나 유배를 받거나 은퇴했습니다. 
삼봉 정도전, 정암 조광조,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이 다 그렇게 죽었습니다. 
겉으로는 윤리 도덕을 내세우면서 이렇게 모함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정정당당하지 않게 뒤에서 푹 찌르는데, 그것도 거짓말로 푹 찌르니 되겠습니까? 

서양영화를 보면 정정당당하게 총이나 칼로 결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서로 등을 지고 열 발자국 후에 돌아서서 쏘자고 하면 그대로 목숨걸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열 발자국 되기 전에 돌아서서 상대를 쏩니다. 
그러면 선한 사람은 죽고 악한 사람은 삽니다. 그리고 악한 사람은 말합니다. 
"어리석은 것! 뒤에서 쏴도 이기기만 하면 돼! 순진하기는..." 
그런 정정당당하지 못한 모함이 판친다면 그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당파와 지방색이 있고,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그런 경우가 발견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정정당당해야 하고 모함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은 뒤에서 수군거리고, 모함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43절에서 주님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모함을 철저히 버리고 씨를 뿌리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모함의 씨를 뿌리고 공동체의 발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진정 모순입니다. 
절망의 씨를 뿌리고 희망을 거두겠다는 생각은 아예 포기해야 하고, 
부정적 언어의 씨를 뿌리고 긍정적 결과를 얻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정말 참된 사랑을 해보고 싶으면 참된 사랑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기쁨을 얻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원하면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흘린 눈물의 좋은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 힘써 씨를 뿌리십시오 >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라는 말은 힘써 씨를 뿌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땀까지 생략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요새는 덜하지만 과거에 그런 막무가내 신앙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신학교에서 성령론 과목을 시험 치는데 어떤 신학생은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과목이 성령론이니까 성령 충만하면 시험을 잘 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막상 시험지 받아보니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성령님의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문제지 제일 밑에 한 줄로 답을 썼습니다. "성령님은 다 아십니다." 

그 답안지를 보고 서양 선교사가 하도 기특해서 시험 점수를 적어 주었습니다. 
"성령님은 다 아니까 100점, 학생은 하나도 모르니까 0점." 결국 낙제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마음만 높아져서 이렇게 낙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령님께 의지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땀을 흘리고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 강한 것이 강한 것이 아니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이 될 것이며, 
그때 성령께는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한다는 말은 또 내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황이 어렵고 힘들다고 느낄수록 더욱 심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쁨은 반드시 눈물과 정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어렵더라도 힘써 씨를 뿌려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뿌리는 것 이상을 거둘 수 있습니다. 

간혹 어떤 분은 말합니다. "저는 심을 씨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누구나 심을 것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을 심으려면 정말 눈물 나오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심으라고 하십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성경은 경영학 교과서"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어렵더라도 심으면 반드시 기쁨으로 추수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 인내하며 포기하지 마십시오 >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라는 말은 
당장의 눈앞의 이익만 보지 말고 멀리 보고 소망을 가지고 씨를 뿌리되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가꾸고 기다리라는 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수시로 다가오는 유혹은 바로 포기의 유혹입니다. 그때 인내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잘 기다리지 못합니다. 너무 조급합니다.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실수하고 자기를 망칩니다. 
세상이 빨라져서 편한 면도 있지만 반면에 참을성이 없어진 것은 큰 문제입니다. 
마귀는 쉽게 살고, 적당히 살고, 편하게만 살라고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묵묵히 참고 기다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당대에 내가 거두지 못해도 내 후손이 거둘 것이라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명적으로 사시되 넉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때로 우리는 우리의 시간에 하나님이 맞추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잘못입니다.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 이때까지 응답하세요"라고 자기가 시간까지 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뉴질랜드에 앤디 폴디(Andi Pauldi)라고 하는 여자 분이 있었습니다. 
한때는 술집 호스테스로 일했고, 나이가 들자 트럭을 운전하며 거칠게 살았는데, 
그녀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앤디 폴디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성경을 읽다가 이사야 35장에 나오는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한다"는 말씀을 읽다가 마음에 꿈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사막에 꽃을 피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제가 그 일을 하게 하소서!" 

그녀는 사하라 사막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비웃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고 사하라 사막에서 밀을 수확했습니다. 
그 뒤 그녀는 항상 말합니다. "참고 견디면 사막에도 꽃이 피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려움 속에서 나의 신앙을 입증해보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결국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눈물의 씨를 뿌리다보면 언젠가 나의 삶이 일어설 것입니다. 
내 자녀가 복될 것이고, 내 가문이 일어서게 될 것이고, 
내 삶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이 될 수 있는 진정한 멘토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 멘토를 얻는 기쁨을 위하여 > 

사람이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종류의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는 나를 뒤에서 소리 없는 도와주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고, 
또 하나는 나를 앞에서 이끌어주는 멘토와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목회에서도 멘토가 이끌어주면 교회도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큰 교회 목사님이 저의 멘토라면 우리 교회가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개척교회 목사님들 중에서도 정말 유능한 분이 많이 있습니다. 
인격도 좋으시고, 말씀도 참 잘 전하시고, 노력하고 힘쓰고 애를 씁니다. 
평면적으로 보면 큰 교회 어느 목사님 못지 않게 능력도 있고, 성실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말 훌륭한 분들인데 사람들은 그분들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작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숨은 가능성과 능력을 못 봅니다. 

그래서 생각해봅니다. 왜 저런 분이 섬기는 교회가 작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돕는 바나바가 없고, 영적인 스승인 멘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바나바와 멘토가 없어서 얼마나 많은 가능성 있는 지도자들이 
그들의 꿈과 비전을 펼치지 못하고 사장되고 있습니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나바는 어떻게 만납니까?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야되지 맘대로 됩니까? 
그러나 꾸준히 바나바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섬기다 보면 바나바를 얻습니다. 
그러면 멘토는 어떻게 만납니까? 진정한 멘토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멘토를 만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야 되지만 나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적어도 멘토와 죽음의 고통과 십자가를 함께 진 경험과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미래의 가능성과 희망만 보고 같이 동고동락해야 멘토를 얻게 됩니다. 

만 명쯤 되는 교회에 가서 열심히 섬긴다고 그 목사님이 나의 멘토가 될까요? 
이미 성장한 공동체의 유명한 리더와는 멘토관계가 형성되기가 매우 힘듭니다. 
기능적인 좋은 관계와 사랑의 관계는 형성되지만 그분이 멘토가 되기 힘듭니다. 
멘토관계는 현재 아무 것도 없을 때 기꺼이 같이 십자가를 진 사람과 형성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눈앞의 큰 것에 몸을 담고 꿈에 투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축복의 멘토를 얻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아무나 멘토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적인 스승인 멘토를 얻는 기쁨의 단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멘토로 삼을 사람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하늘나라를 작은 겨자씨에 비유하셨는데 그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작은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겨자씨를 보기보다 그 안에 숨겨진 가능성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작아서 희망이 없다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귀하게 여겨보십시오.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그 속에서 씨를 뿌릴 때 반드시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눈물의 씨를 뿌리는 작업을 절대 생략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나중에는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아직 새벽은 오지 않았을 것이고, 아직 행복은 뚜렷하게 잡히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인내의 씨를 뿌려보십시오. 반드시 열매 맺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연약하다고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요? 그래도 주저앉지 말고 계속 뿌리십시오. 
땀과 모험심과 용기와 꾸준한 인내는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자산임을 잊지 마십시오. 
용기를 가지고 나가도 우리는 방해하는 유혹과 난관과 사단의 방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씨를 뿌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에게 그런 기쁨이 항상 충만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