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왕하 4:1-7)  

우리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다윗이 시 23:1-3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蘇生)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의 고난의 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이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 갔던 시나이 반도는 사막지대로서 1년 내내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곳으로 첫째, 물이 없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둘째로, 그곳에는 사막지대이므로 채소를 재배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셋째로, 낮에는 섭씨 45도 이상의 고온이고 저녁은 쌀쌀하게 추운 날씨입니다. 이 길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고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런 길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불평과 불만을 토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면 잘 되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고통이 끊이질 않고 계속 되냐고 하면서 불만을 토로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난과 고통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님들에게 고난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① 우리를 낮추기 위해서 때때로 광야의 길로도 걷게 하십니다.(신 8:2)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②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서 때때로 광야의 길로도 걷게 하십니다.(신 8:2)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을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실천하는지 여부에 대해서 시험하십니다. 고난을 받을 때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만나면 금방 자포자기(自暴自棄)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고난(苦難)은 쓰지만 그 결과는 달콤합니다. 그래서 시 119:67과 71절에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③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때때로 광야의 길로도 걷게 십니다.(신 8:3) 우리에게는 육신을 위한 만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만나로는 결코 우리의 영적 주린 심령을 채울 수 없습니다. 생명의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만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요 6:27)  
 


그렇다면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어떻게 삶의 문제를 극복해야 합니까?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선지 생도를 남편으로 섬기고 살았던 한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은 선지 생도였던 남편으로 죽음으로 두 아들을 둔 과부가 된 딱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두 자녀를 데리고 살아가는 것도 힘겨운 일 아닐 수 없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 살아생전에 많은 부채가 있었는지라 자고 자면 이자는 늘어갈 것이요 날마다 채권자들의 빚을 갚아 달라는 성화에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달래고 설득해도 채권자들에게 먹혀 들어갈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은 돈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두 아들을 데려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으로서는 참 감당하기 힘든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이 여인은 ① 남편 없는 과부의 비참한 생활이 그를 괴롭게 합니다. ② 두 자녀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생활고를 겪어야 했습니다. ③ 채무자로서 채권자들의 요구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단지 이 여인만이 겪고 있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문제의 종류는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 성도들 역시 어려 각도에서 각가지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여 고심하는 성도님들이 계실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처세의 문제, 사회 문제, 국가의 문제, 외교의 문제, 가난의 문제, 직장의 문제, 가족과 가정의 문제, 건강의 문제, 사랑의 문제, 무지의 문제, 학업의 문제, 우애의 문제, 질서의 문제, 정신의 문제 등등 정말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으리 만큼 많은 문제들이 쌓여 있습니다. 이 모두 것은 어느 하나라도 중요치 아니한 일이 없고 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특히 경제대난으로 한파로 인하여 우리 중에 이 여인과 같은 처지가 있는 성도님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들은 문제 속에 파묻혀 사는 자들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나 문제를 안고 태어나서 문제 속에서 살다가 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를 가졌다는 것은 곧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통해서 강인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당면한 고난의 문제들은 우리가 최선을 다할 기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가 본문을 말씀을 통하여 선지 생도의 아내의 행동에 대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지 생도의 아내는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한탄만 하고 바라만 보지 않고,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은 하늘만을 쳐다보고 자신의 문제가 해결 받기만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혹시라도 문제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기보다는 오병이어의 기적만을 기대하면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한국 전쟁 이후로 가장 어려운 때를 맞이하여 경제적 위기 속에서 가정도, 직장도, 사업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때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오병이어의 기적은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분명히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과학 만능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기적을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분이시기에 지금도 우리가 자격만 갖추면 기적을 체험하여 문제도 해결 받고 불치의 병도 치료받기도 불가능한 일을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오병이어의 기적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어나도록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문제이든지 간에 우리가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할 때에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나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만한 기력조차도 없다고 생각하고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 것은 핑계요, 회피요, 불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떠한 문제를 만나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할 문제만을 주시고, 문제를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013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숙한 성도라면 문제와 정면으로 대면하여 해결하도록 힘써야 하며, 또 그와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도(示度)조차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만흘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에 나오는 선지 생도의 아내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위로와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지 생도의 아내가 어떻게 경제적 위기의 문제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선지 생도의 아내는 선지자를 찾아와 상의함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1절)   
본문 1절에서 이 여인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심정으로 ①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②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문제를 숨기지 않고 말했습니다. ③ 하나님의 선지자와 자신의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여!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지금 빚쟁이가 와서 빚을 갚지 아니하면 내 생명과도 같은 두 아들을 내어놓으라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선지자에게 문제를 숨기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문제 해결자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지 생도의 아내는 빚을 남기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남편을 대신하여 생활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두 아들을 남기고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은 홀로된 이 부인에게 있어서 커다란 충격이요,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아들과 함께 먹고 살아야 하는 생활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한 병 기름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굶주리는 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빚으로 인하여 채권자의 종으로 끌려가서 7년을 종살이를 해야 할 자식들의 처지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 생도의 아내는 이런 비극적인 생활 속에서도 죽은 남편만을 원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절망하고 낙심하여 자포자기(自暴自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문제는 반드시 해답이 있다고 믿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 중에 주의 사자를 인간으로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문제를 들고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처럼 하나님을 대하는 심정으로 나아간다면 이 여인에게 문제의 해결의 길을 제시해 준 것처럼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하나님의 전권대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부탁을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 문제가 있을 때에 교역자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를 나홀로 고민하고 속으로 간직하고만 있으면 문제 해결은 그만큼 어려워지고 자기 자신은 더욱 그 문제에 깊이 빠져 헤어 나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를 주의 사자에게 숨김없이 말하고 함께 기도함으로서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옛 속담처럼 가벼워지는 역사 해결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무엘 상 7장 이하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법궤를 빼앗겨 20년 동안 고통과 수치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삼상 7:2) 그러나 사무엘 선지자를 만남으로 인하여 미스바에 모여 철저히 하나님께 회개하였고, 급기야는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20년 동안 잃어버렸던 법궤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화로운 가운데 생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무엘 선지자가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에벤에셀”(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이처럼 성도님들에게 목회자가 필요합니다. 양에게 선한 목자가 필요한 것처럼 성도님들에게는 어려울 때에 함께 기도해 주시고, 힘들 때에 위로해 주시고, 고통스러울 때에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교역자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교역자에게만 어떤 특별히 힘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는 여러분을 주님께 연결되는 인도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는 주의 종들이 기도할 때에 더 역사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을 범죄할 때에 그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해 주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모세입니다. 그러기에 목회자의 직무 가운데 하나가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선지 생도의 아내는 문제가 만날 때에 낙망하지 않고 선지 생도에게 나와 도움을 요청할 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어려움이 있을 때에 주의 종을 찾아와 상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의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본인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환난과 고난의 풍파가 몰려올 때는 두려워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환경을 비관하거나 처지를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룰 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때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되는 최상의 기회라고 외치면서 은혜의 보좌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상대하며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외를 바라지 않습니다. 환경을 크게 문제 삼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시 126)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의 길은 싸우며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543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 주여 인도하소서.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 곳에서 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라고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지 생도의 아내와 같이 문제가 있을 때 교회로 달려가야 합니다. 교회로 달려가 주님께 애통하며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은밀히 보시는 여호와께서 틀림없이 만나 주실 것이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막연하게 자기에게 문제가 해결 받기를 원하면서 주저앉아 있지만 말고 우리들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간구 하는 자만이 해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소경 바디매오가 나옵니다(10:46-52) 소경 바디매오는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란 말을 듣고 소리를 지르며 외칩니다. “다웟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자 앞을 보기를 원합니다. 한 번만 나를 돌아 보아주소서”라고 그가 외쳤을 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제지를 합니다. “좀 조용히 하시오, 당신만 예수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지 않소”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핀잔을 주면서 말합니다. 그래도 소경 바디매오는 계속해서 외칩니다. 바디매오는 문제의 문제를 만났지만 그것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저지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더욱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의 문제를 위해서 “다웟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더욱 간절히 간구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바디매오의 모습이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문제를 당하여 주님께 기도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경 바디매오는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끈질지게 주님께 간구했고,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함으로 주님께서 이 소경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광명을 보게 된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이러한 신앙적인 모습은 우리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앙적인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당면한 위기, 욕구 또는 나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편에서 해결해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서는 아니 됩니다.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뜻에 하나님을 끌어 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으로 우리를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 밖에서 서성일 것이 아니라 문제 안으로 깊숙히 들어와 하나님과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울 때에, 낙심될 때에 인간의 수단을 쓰지 아니하고 주님 앞에 내놓고 기도하고 의논할 때에 하나님께서 생각밖에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으로 하여금 쉬도록 인도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마11: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절망만 하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없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극한 어려움에 빠지면, 흔히 자기 신세만을 한탄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처럼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전 7:14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말씀처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각한다” = [컨시더](생각한다. 고찰한다. 숙고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가 있을 때에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께 간구하세요.
영혼과 육체를 지켜주십니다.(시 121:1-6) 하나님께서는 연악한 환경과 위기에서 지켜주십니다.(신 32:10-12) 주님은 내 곁에 계십니다.(딤후 4:17-18)  우리는 환경적인 어려움을 당하면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기에 일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도저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결코 낙심하지 아니하고 담대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 사도가 세상을 떠날 때가 쓴 성경입니다.(딤후 4:6) 세상을 뜰 때가 가까워진 늙은 종 사도 바울은 그를 버리고 떠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딤후 1:15, 4:10,16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시아에서는 부겔로와 허모게나가 떠났고, 데마와 그레스게 그리고 디도가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 갈라디아, 달마디아로 각각 떠났습니다. 지금은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이었던 사람들이 다 떠났고, [누가]만 남았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의 마지막 노년 길은 참으로 곤고하며 감당할 수 없는 배신감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담대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러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주님께서 바울 곁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① 우리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종종 혼자라고 생각되어 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혼자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곁에 주님께서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딤후 4:9-16) 
딤후 4:9-16절에 보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이 때가 바울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였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곁에 다 떠나가고 혼자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데마는 세상을 향해 가느라고 바울을 배신했고, 그 밖에 바울을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바울을 버렸습니다. 떠났습니다(딤후 4:16). 바울만 외로웠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던 예수님의 세상살이도 외로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까지도 자기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르게 한다면 '때로 우리도 외롭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받아 들여야' 합니다. 
성경을 삶의 표준으로 삼고 사니 세상 사람들이 바보 취급합니다. 쉴새 없이 살아도 어려운데 주일성수, 예배참석, 봉사활동을 하고 다녀서 손가락질 받기도 합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어려운 세상인데 십일조, 감사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등을 하니까 더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먹고 사는 것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들을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 상해 할 필요 없습니다. 외로워 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 예수 믿는 일, 주의 일을(요 6:28-29)하는 사람은 사실 혼자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특히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될 때에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때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마치 하박국처럼 "하나님! 언제까지 내가 기다려야 됩니까? 왜 내가 이런 일을 봐야 합니까?"라고 생각할 만큼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 곁에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② 여러분 중에 어려움을 당하시는 분계십니까? 그래서 고통스럽습니까? 여러분 곁에 주님이 계십니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 모든 일에 어려움 없이 순탄하기만 할까요? 풍파 없이 모든 일이 순탄합니까?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렇게 얘기를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를 샤머니즘적인 종교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어도, 신앙생활을 바르게 해도, 기도를 해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도 참으로 죽은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울을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처음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그 당시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원형경기장에서 짐승의 밥이 되어 많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때 바울도 사자의 밥이 될 뻔했던 것을 상기하며 표현한 말입니다. 바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습니까?  바울이 도둑질을 하다 붙잡힌 것도 아니고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힌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붙잡혔습니다. 그러나 바울도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힘들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로마 감옥의 추위에 벌벌 떨면서 멀리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두고 온 겉옷을 그리워하면서 “가져다 달라”고 할 만큼 어려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여러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여러분 곁에는 주님께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① 여러분 중에 시험당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괴로운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곁에 주님께서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기 때문에, 주의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시험을 당하고 괴로워합니다. 예수 안 믿었으면 상대도 안했을 사람, 정말 대면하기도 싫은 사람이지만, 예수 믿기 때문에 꾹꾹 참아가며 얼굴 대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목사이지만 개인적으로 사람이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도 감정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폭 넓게 관용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수용에 한계를 느낄 때 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고통스러운 사실입니다. 다만 주님께서 저에게 맡겨 주신 사명이기에 어려워도, 힘들 워도 인내하면서 묵묵히 감당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 각자에게 맡겨진 일이 체질에 딱 맞아서 그 일을 감당하십니까? 정말 좋아서 하십니까? 교회학교 교사들도 체질에 딱 맞아서 하십니까? 안내위원, 주방에서 봉사하시는 분들도 그런 일을 하라고 아예 정해진 사람들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앙 안에서, 예수 믿기 때문에, 사명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으로 살려면 사탄이 가만 두지 않습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꼭 찾아드는 속상함이 있습니다. 은혜 받고 감사한 마음에 벅차 있으면 가슴 쥐어뜯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가슴을 쾅쾅 칠만 한 일들이 생깁니다. 
사탄은  간교하게(창 3:1, 고후 11:3)  헐뜯음으로(욥 1:9)  광명한 천사처럼 가장하여 다가와서(고후 11:14)  범죄의 길로 유혹하며(창 3:1-7, 딤전 2:14)  믿음이 떨어지게 합니다(눅 22:31, 32).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마음에 상처를 받고 믿음이 떨어지게 하는 흔들림을 받아도, 삶의 어려움이 다가와도 기도하며, 사탄이 좋아하는 낙심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을 주십니다(고전 10:13). 감당키 어려운 시험은 피할 길을 내십니다. 설령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의 생각과 다르신 하나님은(사 55:8-9)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롬 8:28). 문제는 우리가 참고 기다릴 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까?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갈 6:9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까?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면 열매를 거둡니다. 그런데 우리가 때가 이르면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곁에 계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치 않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의 소망을 갖는 것이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왜 자기를 포기합니까?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정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포기하면 안됩니다. 자녀들이 속을 썩인다고 해서 자녀들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왜 부모가 자식을 포기합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믿음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믿음의 행진에는 언제나 방해가, 방해자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다가 외로울 수도 있습니다.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심을 깨닫고 결코 외로워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어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주가 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선지 생도의 아내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발견함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2절)
본문 2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엘리사는 선지자 생도의 아내에게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이 여인은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없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이 여인이 가진 것이 한 병의 기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한 병 밖에 기름이 기적을 이루는 씨앗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감사할 조건이 너무 많아 주님 앞에 겸손히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는 분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매사에 불평, 불만하면서 짜증만 내고 한탄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면 전부가 감사의 대상입니다. 건강 믿음 재산 가정 등을 생각하며 “계집종의 집에는 기름 한병 있나이다”라는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려면 적든지 많든지 간에 내가 소유하고 있는 바를 주께 맡기고 위탁하는 일이 있을 때 바로 그때가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잠16:3에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희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시 37:5에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마14:19-21)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은 어린 소년의 점심 식사밖에 되지 않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소년이 주님 드리며, 맡길 때에 축사하시고 떡을 나눠주었더니 5000명이 먹고도 남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의존하는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오병이어가 너무 적다고 해서 주님께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주님의 제자들이 수소문(搜所聞)해서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가지고 왔지만 이때에 많은 토론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산상 말도 안되고,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벳세다 광야에서 남자만 5,000명, 줄잡아 20,000 명이 족히 되는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다보니 어느 새 저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빌립의 계산대로 라면 이백 데나리온, 요즈음 화폐로 계산하자면 약 600백 만원이 있어도 모자랄 형편인데 그런 큰 돈이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설사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음식은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가 너무 적다고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만약 이때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오병이어를 가지고 않았다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나 기적을 체험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다른 방법으로 해결했을 지는 모르지만 이 기적에 동참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오병이어를 가지고 온 행동은 별 것은 아니지만 그 행동이 기적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오병이어는 작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최선의 노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오병이어를 가지고 나왔다고 당장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기적의 씨앗이 되었던 것입니다. 

질병에 걸렸을 때 약을 먹든지 운동을 하든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혼의 위기에 있는 부부들이 화목하게 되는 일은 기적과 같습니다. 그런 기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 많은 문제들을 보면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쉽게 자포자기(自暴自棄)합니다. 의외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과소평가(過小評價)합니다. 가정의 문제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모든 아버지가 부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아버지가 유명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이들에게 아버지 노릇만 하면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직장에서도 자기 위치에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때때로 모인 힘이 큰 영향력을 발휘할 때도 있습니다. 노조가 그 예가 됩니다. 사회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때때로 모인 힘이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학생들의 시위가 그런 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곳에서는 결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부의 두렙돈을 칭찬하신 것은 그런 헌금이 기적이 기적의 씨앗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할 것은 오늘도 기적은 일어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예수의 소문은 무성한데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기적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람의 상식과 경험으로 묶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학이란 학문의 연구 대상으로서 삼고 상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교회 부흥의 시대를 살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강력하게 증거 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만 무성한 말쟁이들의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늘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생명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려지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아빠 없이 어린아이들과 이 험한 세상에서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할 미망인이 계십니까 ? 절망하지 마십시요 ! 부모 없이 고아로 자라고 있어 한이 맺힌 생명이 있습니까 ?자신을 포기하지 마십시요! 아무리 작고 미천한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위대한 기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산다는 것이 결코 실패하는 여러분의 인생에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여러분의 인생을 전폭적으로 내어 맡기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노아처럼 놀림을 받아도, 아브라함처럼 이삭을 줄 때는 언제고 또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것은 무슨 심사인지 인간적인 분함이 치밀어 오른다고 하더라도, 다윗처럼 미친 체 해야 할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상식과 논리를 크게 벗어나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가장 소중히 여기고 여러분의 집에 남겨 두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해도 주님의 손에 맡겨 드리십시요! 못 배운 자를 들어 배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못 가진 자를 들어 가진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주님 앞에서 크고 존귀하게 쓰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둘째로,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와 기름통의 기적입니다(왕상17:8-16)
사르밧 과부가 3년 6개월의 계속되는 가뭄 속에서도 밀가루 통이 마르지 아니하고 기름병이 마르지 아니하여 평안히 먹을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은 엘리야 선지자에게 그것을 드리고 맡길 때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셋째로, 다웟이 골리앗과 싸울 때에 물 맷돌만을 가지고 나갔을 때에 나타난 기적입니다(삼상17:49,50절)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자기가 자기고 있는 물맷돌 몇 개만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것이 다윗이 가진 최선의 무기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도무지 이해도 안되고 말도 안되는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과대평가(過大評價)해서도 안되지만 반면에 과소평가(過小評價)해서도 안됩니다. 능력이 안될 때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지적이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 4:13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고,예수님께서 막 9:23에서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을 하찮게 생각하기에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3. 믿음의 그릇이 준비되어야 합니다(3-4절)
본문 3-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 여인이 믿음으로 삶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빈 그릇을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빈 그릇은 무엇입니까? “믿음”이 그릇입니다. 이는 준비된 “믿음의 그릇”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하여 교훈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주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거지가 밥을 얻어먹을 때에도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하면서 그릇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풍성한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여인이 빈 그릇을 준비하되 조금만 준비했다면 아마도 빚을 다 갚을 수 없을 것이고, 또한 계속해서 이 여인은 두 아들과 함께 곤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믿음을 가지고 빈 그릇을 충분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은 기름을 팔아 빚도 갚고, 두 아들과 함께 생활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여인처럼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축복을 받을 그릇이 준비하심으로 인하여 현재의 여러분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까?

첫째로, 깨끗한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깨끗한 그릇이 사용되는 것이지 더러운 그릇에는 음식을 담지 못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여호와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함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 사이에 죄의 담이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사 59:1-2)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은 깨끗케 그릇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딤후 220,21) 그러므로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씻고 하나님께 손을 벌리는 성도 되십시다.

둘째로, 깨지지 않은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시험에 들고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하다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받아도  다 쏟고 맙니다. 

셋째로, 큰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본문 3절에 보니 엘리사 선지자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기름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 너의 두 아들을 시켜 네 이웃에 돌아다니면서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많이 빌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큰 그릇으로 준비하면 많이 받고 작은 그릇을  준비하면 작게 받고 준비하지 않으면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스케일이 커야 큰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좁쌀영감처럼 사람이 너무 잘고 그릇이 작으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인정받지 못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심는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갈 6:7) 이번 집회를 통하여 큰그릇을 준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지금껏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함 받고 누릴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5-6절)
본문 5-6절의 말씀과 같이 이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의 말씀을 다 믿고 순종할 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요술이나 장난 같은 명령이지만 순종했습니다. 만약 이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불순종했다면 한 병도 못 얻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은밀한 중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순종하는 자에게 기적적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순종은 이적보다 낫다”라고 말하였습니다.  

① 가나 혼인 잔치의 물이 포도주로 변하였던 기적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일어났습니다(요 2:1-11) 요 2:5,7절에 보니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 즉 아구까지 채우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변화의 기적은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시는 명령은 온전한 말씀이기에 오직 순종하게 되면 곧 맹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무엇에서든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는 비결입니다. 

② 베드로가 실패한 인생과 같이 밤새 동안 고기를 잡고자 하였으나 수확이 없었으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짐으로 그물이 찧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눅5:1-11) ③ 아람 나라 문둥병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의 명령대로 요단강에서 7번 몸을 씻으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에 치료의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왕하 5:14)  
그렇습니다. 계산과 감각을 초월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이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맡기는 순종하는 믿음이 갖고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믿고 기다리시기를  바라며 인간 생각을 초월한 믿음의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용어들 가운데 「사랑, 은혜, 믿음, 속죄, 소망」 등과 같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아멘”입니다. 기도할 때나 설교를 듣다가 감동이 오면 그리고 찬송을 부를 때에 깊은 신앙의 고백으로 아멘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쓰이는 모든 용어를 한마디로 종합하면 바로 「아멘」이 될 것입니다. 이 「아멘」이란 말은 구약에서 신약에서 이르기까지 수백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원뜻은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렇게 믿겠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확실합니다. 분명합니다.”라는 것이며 부사로 쓰일 때는 “진실로, 참말로”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로만 아멘이 아니라 생활 자체가 아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아멘의 신앙을 갖는 자에게 하나님께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기적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자기 자신의 권한이나 주권을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할 때입니다.
사울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낮아져서 자기 권한을 하나님 앞에 포기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셨지만, 자기 자신이 스스로 교만하고 자기 권한을 주장하면서 불순종하게 될 때 그는 버림을 받아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삼상 15:7) 그러나 지렁이 같은 야곱은 딸 디나가 세겜 추장에 의하여 못된 짓을 당하는 큰 낭패를 당하였으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꾼 후에 일어나 벧엘로 올라 갈 때”에 삶에 엄청난 변화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창 35:2,3)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계시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이제는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나오게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핸들을 내가 붙잡고 있으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온전히 운전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절대 지배권의 확립이 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도 기적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핸들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모든 주권을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명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그대로 하기만 하면 좋은 결과를 주실 줄 믿고 그대로 믿음 안에 의지하고 순종할 때입니다.(요15:15)
우리 인생에게 바램도 있고 욕망은 있더라도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안에서 순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305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잔뼈가 긁은 베드로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고기 잡는 것에는 풍부한 경험을 가졌던 베드로였지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순종할 때에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니라”고 할 정도로 인간의 경험을 능가한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인간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순종할 때에 변화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순종하는 척 하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돌 항아리의 물을 아구까지 채울 때에 일어났던 것처럼 끝까지 하는 충성을 다할 때입니다.(요2:7)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여 이 땅에 실패와 가난과 죄가 들어오게 됨으로 멸망케 되었으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의와 평강과 영생과 구원을 이루어 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질그릇 속에 못된 교만과 정욕과 불순종의 요소를 모두 다 쏟아 부어 버리고 다시 주님의 명령을 받아 새로운 생수를 채움 받게 될 때 현재와 미래와 영원을 좌우할 수 있는 삶의 기적들이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복종을 아는 자는 모든 것을 아는 자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순종을 먼저 배우는 훈련을 받아야 능력 있는 신앙의 생활로 변화나 기적을 누릴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삶의 문제를 극복하는 비결을 선지 생도의 아내를 통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라도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문제를 가슴에 품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① 교역자나 믿음이 좋은 성도님들에게 기도의 요청을 하고 본인도 뜨겁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② 현재 나에게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고 그것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③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④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선지 생도의 아내에게 일어났던 기적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일어날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변함없이 역사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역사하시는 모양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깊숙하게 개입하시고 역사하고 계시는 분이신데, 바울 곁에 계신 그분은 바로 우리 곁에도 계시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다시금 새로운 도전과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중에 큰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