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심령”(요 11:17-44) 
   
본문의 말씀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무슨 병이 걸렸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병들자마자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님은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곧 바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이틀이나 지난 후에 오셨습니다. 
인간들의 생각에는 모든 것이 끝장난 상태였고 마치 주님을 향하여 “당신도 이젠 소용없습니다. 조금 일찍 오셨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텐데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하는 그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너희들이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물론이요 인간 편에서도 무한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든지 아무나 사용하지 않으시고 아무것이나 받으시지도 않으십니다. 기적은 기적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기적이 일어났으며 왜 그러한 기적을 나타내셨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단순한 기적자체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그 요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떤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심령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주님의 뜻을 조용히 기다릴 줄 아는 심령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6절 말씀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가자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보면 나사로의 병은 보통 병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모습은 이와는 정 반대였습니다. 사람이 지금당장 죽어가고 있는데도 이틀이나 더 지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일행들에게 어떤 위급한 상황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나사로는 주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던 사람이요, 지극히 아끼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지체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지금 죽어가고 있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또 나사로의 죽음을 지켜보는 가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 앞의 속수무책인 인생의 무상함과 한번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절망적인 현실에 직면하여 예수님이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조급함과는 정반대로 주님은 어딘가 모르게 여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이틀이나 더 지체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무책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결말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임을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에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인간들은 그것을 알 수 없으므로 조급하고 원망, 불평, 한숨이 터져 나오는 절망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이틀이라고 하는 시간은 나사로와 그의 가족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요 절망의 순간이었지만 그 기간은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가고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더 큰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기다리심, 더 큰 기적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지체하심을 정녕 수용할 수 있는 자와, 주님의 지체하심에 깊은 의미를 알고 고통 속에서도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성도여러분! 이틀이나 늦게 도착하시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지체하시는 주님의 뜻을 정녕 수용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주님께서 사랑하는 심령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1장 3절에 보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11장 36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했으면 사람들이 주님께 당신의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고 했겠습니까. 
나사로는 누구보다도 예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요 그 가정은 주님의 극진한 사랑을 독차지한 가정입니다. 본문 11장 2절에 보면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가정에 이러한 고통을 주셨습니까? 
복을 주셔야 마땅하고 좋은 일만 일어나고 은혜스런 사건만 생겨야 할 텐데 왜 이런 불행이 닥치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의로운 사람이 형통하고 죄인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받고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셨지만 그 아들에게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란과 고통 중에서라도 추호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원망 불평하는 불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기적은 아무에게서나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기적이 일어난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기적이 일어난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타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잔치 집에서 기적이 다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어떤 문둥병자가 고침 받은 장면이 나옵니다. 그 당시의 모든 문둥이들이 고침 받은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는데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득 채워지는 엄청난 기적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어부가 다 그런 기적을 본 것이 아닙니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어떤 선지생도의 가정에 불행한 사건이 닥쳤습니다. 갑자기 남편이 죽게 된 것입니다. 죽은 것도 불행한 일이지만 더 큰 불행은 빚이 많아서 두 아들 마져도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불행을 당한 가정에 하나님께서 신기한 기적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기적의 기름병 사건”입니다. 기름병을 빈 그릇에 붓기만 하면 그릇이 채워지고 기름은 끊임없이 솟아 나왔습니다. 이 사건이 중요한 것은 단순한 기적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남편은 선지생도요, 여호와를 목숨 걸고 사랑하여 경외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 가정도 하나님을 위해서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바쳐 충성한 가정이요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한 가정이었습니다. 그 가정이 왜 빚을 졌을까요? 하나님의 종들을 돕다가 빚을 지게 된 것 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선지 생도가 여호와를 극진히 경외했다는 말에서 그가 곧 “오바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 오바댜는 아합 왕 시대에 궁내 대신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종들을 숨겨주고 은밀히 보살펴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숨겨주고 그의 가족들을 부양하다 보니까 많은 빚을 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정에 기름병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가정,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많은 영광을 받으시고 그런 사람에게 기적을 보여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기적의 모델로 선정하지 않습니다. 기적은 아무에게나 흔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축복의 역사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3의 말씀대로 나사로는 주님을 사랑한 사람이요,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한 가정이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주님을 사랑합시다. “나를 사랑하는 자가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고 찾는 자가 만나리라” 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당신의 사랑하는 성도에게 나타내시는 줄 믿습니다.

3. 주님을 믿는 심령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40절)
본문 40절에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믿는 심령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현재성을 가진 심령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나사로가 마지막 때에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살아날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질 때에 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단순한 확신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실히 알 때만이 소유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보면 기적이 일어날 확률은 전혀 없습니다. 지금은 이미 죽었고 장사를 지냈으면 죽은지가 벌써 4일이나 지났습니다. 썩어서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 볼때,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 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과연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려야 합니다. 과연 주님은 하나님이신가? 메시아이신가? 아니면 마리아나 요셉의 아들인 사람인가? 도대체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주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사로의 죽고 사는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실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본문 41절에 보면 나사로의 무덤에 가신 주님은 “돌을 옮겨놓으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행동이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과 나사로 사이에 사로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은 것처럼 주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막혀 있는 불신앙의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막혀있는 불신앙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성을 갖는 믿음을 중요합니다. 본문 42절에 이 사건이 의도하는 목적과 결론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믿게 한다는 것입니까?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믿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현재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분을 안다고 하면서 추상적으로만 알았지 현실적으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현실적으로 아는 사람은 그 분의 위대하심과 그 분이 이루신 위대하신 역사를 믿게 됩니다. 이 믿음은 절대로 허황된 것이 아닙니다. 신비주의적인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현재성을 회복하시길 축원합니다. 살아있는 믿음, 행동화 하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우리에게도 오늘 새벽의 본문의 말씀처럼 ① 주님의 뜻을 조용히 기다릴 줄 아는 심령 ② 주님을 사랑하는 심령 ③ 주님을 믿는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