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를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롬 8:26-39) 
  
스코틀랜드의 선교사였고, 탐험가(探險家)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1841년 흑암(黑巖)의 대륙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나일강의 근원지를 밝히기 위해서 잠비아의 깊은 밀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에게서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생사를 알지 못해서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1871년 ‘헨리 스탠리’라는 탐험가가 탐험대를 조직해서 리빙스턴을 찾아내기 위해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1년 동안 강행군을 했습니다. 겨우 밀림 속에서 병들어 앓고 있는 리빙스턴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는 식료품과 의약품이 거의 다 떨어진 채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탠리는 오랫동안 그와 함께 머물면서 극진히 그를 간호했습니다. 드디어 리빙스턴은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스탠리는 떠나기 전에 그에게 간절히 권면했습니다. 
"선교사님, 아프리카의 복음사역을 위해서 30년 간 헌신해 오셨으니까 이제 그만 하시고 저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던 리빙스턴은 아주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게 있어서 아프리카의 선교사역은 헌신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큰 특권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영광스러운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스탠리는 홀로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1873년 5월 1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리빙스턴은 침대 곁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깍지를 낀 채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으로 고요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오지에서 순교한 리빙스턴 선교사님은 과연 실패자입니까? 승리자입니까? 그는 분명히 승리자입니다. 스데반 집사님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승리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은 현재의 고난을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든지 현재의 고난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마지못해서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으로 생각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리를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몇 가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삽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늘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잘 아십니다. 나의 생각도 하시고 나의 행동도 익히 아시고 나의 하는 말을 아십니다. 나의 손을 붙드시고 나를 늘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시 139편) 

물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패배의식(敗北意識)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승리의식(勝利意識)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패배의식이 아니라 승리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당신에게 고난이 닥칠 것을 아셨습니다. 환난이 닥쳐올 것을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지만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시게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요한복음 16:33에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세상에 살면서 환난(患難)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니 사도 바울은 승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37절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넉넉히 이긴다"는 표현은 "겨우, 간신히 이긴다"는 것이 아니고 "압도적으로 이긴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소, 고발하겠습니까?"
"누가 감히 우리를 죄가 있다고 판단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근거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 사도가 이처럼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 근거가 무엇입니까? 본문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26-28절)
본문 226절 상반 절에 보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를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외롭지 않습니다. 나 홀로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늘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육적으로도 약하지만 영적으로도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지만 영적으로 한없이 연약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연약합니까? 바울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한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본문 26절 중반 절에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연약합니다. 우리는 돌이 떡인 줄 알고 돌을 달하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뱀이 생선인 줄 알고 뱀을 달라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한 번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를 모시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절하면서 무엇인가 구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뇨?"
살로메는 나서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그렇습니다. 살로메와 야고보와 요한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 12장에 있는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인 낙원에 이끌러 갔습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光景)을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지극히 신비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너무 자고하면 안 되니까 그의 육체에 찌르는 가시 곧 질병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육체에서 가시가 없어지기를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응답하셨습니까? 고후 12:9의 말씀입니다. "내 은혜(恩惠)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아처럼 사도 바울과 같이 영적인 사람도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라고 하면서 "우리"라는 대명사(代名詞)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그 가운데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연약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건강하면 좋은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건강하기 때문에 범죄(犯罪)하는 자리에 이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그저 돈벌고 출세하면 다 좋은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영혼이 병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연약합니다.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우리를 성령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몸도 마음도 연약합니다. 지렁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흙으로 만든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찬 197장 1절에서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라는 가사의 고백처럼 우리는 연약하지만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첫째로 성령님께서 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친히 간구해 주심으로 도와주십니다.(26-27절)
본문 26절 하반 절에서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연약하지만 성령님께서는 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물론 우리는 그 간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그 시간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서 성령은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 

어떻게 간구하십니까?  
본문 2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100%일치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기도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서툴고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성령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것을 고쳐 간구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늘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보좌로 끊임없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에서 나온 잘못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해 주시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넘어가서 3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지금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 우리 속에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또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위에서 우리를 잡아당겨 주시고, 성령께서는 밑에서 우리를 밀어주십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행진할 때에 르비딤 이란 곳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아말렉 군대가 뒤쫓아 와서 공격했습니다. 야전사령관 격이었던 여호수아는 아말렉 군대와 맞서 싸웠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워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출17:9).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해지자 아론과 훌은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 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누가복음 22:31-32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여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지만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결국 베드로로 하여금 회개하고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 가는 순간에도 스데반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5-56).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 가는 순간에도 자기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결국 순교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가 달려 죽으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뿐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오늘도 하나님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여 주신다는 것이 바로 성도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고난을 겪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간구해 주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속에서 친히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현재의 고난을 이기고야 말 것입니다. 영화로운 그 자리에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연약함을 도우시되 친히 탄식으로 간구해 주심으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심으로 도와주십니다.(28절)
본문 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심으로 도와주십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뜻은 "성공이든 실패든, 선이든 악이든, 순경이든 역경이든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족장 요셉의 생애를 보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렸습니다. 보디발에 아내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은 거기에서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났습니다. 그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감옥에서 2년 동안 더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요셉이 당한 모든 고난이 그를 영화롭게 인도했습니다. 나중에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몽해 준 것을 계기로 애굽의 총리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攝理)입니다. 

요셉의 삶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종으로 팔렸습니다.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은 거기에서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났습니다. 그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감옥에서 2년 동안 더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요셉이 당한 모든 고난이 그를 영화롭게 하는 길로 인도했습니다.

요셉의 삶만 그렇습니까? 욥의 삶을 통해서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삶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나간 체험을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그 자체만을 생각하면 그것은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본시 십자가는 죄수에게 주어진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습니다. 사탄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멸망의 자식이었던 우리가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죄인 되었던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섭리의 역사가 누구에게나 다 그러합니까?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나쁜 길로 인도하시겠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 한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 각자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나쁜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그저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닷가에 가면 파도가 많이 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복을 따는 해녀는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다 속으로 들어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다 속에는 파도가 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바다 표면에만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바다 속 깊은 곳을 흘러가는 물줄기는 표면의 파도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을 피상적으로 바라다보면 고난의 물결이 쉬지 않고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 깊은 곳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물줄기가 도도히 한쪽 방향을 향해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선을 향해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을 향해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기 때문에 현재 겪는 고난을 겁먹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도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오히려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기 때문입니다.(31-32절).
본문 31-32절에서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를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편이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상17장에 보면 소년 다윗이 불레셋 장군 골리앗을 물매로 쓰러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골리앗에 대하여 다윗은 의분을 일으킵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불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삼상17:26).
다윗은 사울 왕 앞에 가서 말합니다.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불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 17:34-36). 
 그리고 다윗은 불레셋 장군 골리앗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다윗은 결국 물매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승리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사건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다윗은 약합니다. 골리앗은 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을 위하시니까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은 순식간에 골리앗의 목을 베었습니다. 다윗이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영적인 골리앗이 많이 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대적하는 것은 우리를 위하시는 그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도전해서 감히 설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30절) 그런데 감히 누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나서서 "안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적할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서고 싶으면 한 번 나서보라는 것입니다. 덤빌 테면 한 번 덤벼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그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대적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에게는 동족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사도 바울을 거꾸러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선한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머리에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위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가 큰 힘을 얻고 용기를 받았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카톨릭이라는 거대한 조직과 대항해서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마음에 고통이 있을 때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는 이 말씀을 붙들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는 이 말씀을 붙들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환난 가운데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를 높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35-39절).
본문 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말씀하고 있고, 37절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를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천지창조(天地創造)」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거기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명하셨습니다. 그의 독자, 그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받고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는 뒷짐을 지고서 큰 바위 주변을 빙빙 돌며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제 아들을 통해서 저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창대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은 아직 장가도 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를 번제로 잡아서 제사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고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자고로 사람을 잡아서 제물로 드리라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제 손으로 저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라고 명하셨습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큰 바위 주변을 빙빙 돌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은 비장한 결심을 합니다.
"하나님, 알겠습니다. 바치겠습니다.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아들이니까 하나님의 명대로 제가 하나님께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 모리아 산을 향해서 올라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려고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 아들을 아끼게 만드셨습니다. 그 대신 여호와이레로 예비한 수양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실제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사람을 위하여 내주셨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병들어서 다 죽어가고 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차라리 내가 저것 대신에 아플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 대신 아프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인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죽어서 우리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것이 바로 부모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우리가 어떠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했습니까? 우리가 연약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경건치 못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그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지금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너희에게 나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었지만 이것만큼은 너희에게 줄 수 없다."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에게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소중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후손입니다. 
장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하나님 아버지 나라의 그 모든 영광을 공동으로 상속할 자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된 우리들도 하나님은 지극히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말없이 감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확신하노니”라는 고백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38절 상)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사도 바울의 확신이 우리 모두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현재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극심하다 할지라도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그 어떠한 것이라도 우리에게 보장된 장래의 영광을 결코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3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문 앞에 있는 34절에서 네 가지로 이미 우리에게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이 엄청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과연 그 무엇이 끊을 수가 있겠습니까? 환난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곤고함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그 어떠한 고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일곱 가지를 다 합친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는 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일곱 가지의 고난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크고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곱 가지 고난을 몸소 겪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당했던 육체적인 환난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번 감옥에 갇혔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태장으로 맞았습니다. 돌로 맞기도 했습니다. 육체적인 환난뿐만 아니고 심령의 곤고함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늘 교회의 대한 염려로 인해서 그의 마음은 억눌리는 듯했습니다. 또 그가 가는 곳마다 이런저런 핍박이 있었습니다. 동족 유대인들의 핍박도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의 핍박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는 기근이 있었습니다. 먹지도 못했습니다. 제대로 마시지도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에게는 적신도 있었습니다. 춥고 헐벗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이런저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 번에 걸쳐서 선교 여행을 했습니다. 시내의 위험도 있었고, 강의 위험도 있었고, 바다의 위험도 있었고, 강도의 위험도 있었고, 광야의 위험도 당했습니다. 어디서나 칼이 그의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면서 칼을 갈며 동맹한 사람이 무려 40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로마의 영문 밖에서 칼로 목 베임을 받아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고난들이 과연 사도 바울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끊지를 못했습니다. 바울은 고후5:14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를 강권한다고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파도처럼, 밀물처럼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끊임없이 밀려오고 또 밀려왔습니다. 바울은 엄청난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음으로서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선한 싸움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을 겪었지만, 결코 두려워하거나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3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가 시44:22의 말씀을 인용한 것처럼 다른 성도들도 훨씬 더 극심한 고난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을 겪고 있습니까? 우리만 겪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극심한 고난을 겪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고난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끊지를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미리 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미리 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는 여기까지 와있습니다. 이제 남은 한 단계는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감히 그 누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나설 수가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을 모두 합친다 할지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겪는 고난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후의 승리와 영광은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 3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겪을 때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가 함께 하시지 때문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고난도 넉넉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현재의 고난을 이겨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 겪는 어떠한 고난이라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겨우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스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고도 남습니다. 넉넉히 이겨냅니다. 사도 바울이 고후 12:9 이하에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예화) 초대 교회에 황제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극악무도한 죄인들과 같이 있도록 감방에 집어넣어라" 이때 신하가 다시 고개를 혼들었습니다. "황제님! 그건 안됩니다. 그 사람은 전도할 기회가 왔다고 더 좋아할 것입니다. 얼마 있지 않아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모조리 크리스챤이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어서 살인강도도 회개시켜서 그에게 상급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굶겨라" 이에 신하는 말합니다. "굶기면 금식 기도에 들어가 삼층 천에 올라가는 신비한 입신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놈을 내 어 목을 쳐라" 또 신하가 말합니다. "황제님, 저들의 제일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하면서도 얼굴에 광채가 나고 입에는 이렇게 찬송이 나온 답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라고 찬송할 것입니다"고 말하자.  황제는 "그러면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탄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놈들은 왜 이렇단 말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신하는 답하기를 "그 속에 영원한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오히려 자랑하고 우리의 연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넉넉히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을 겪고 있습니까? 그 고난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끊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더 가까이 인도할 뿐입니다. 바람이 불면 연은 더 높이 올라갑니다. 황금이 용광로에서 녹는다고 해서 황금이 없어집니까? 아닙니다. 불순물, 찌꺼기만 없어질 뿐입니다. 더 순수해 질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돈독하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더욱더 순수하게 만들어줄 뿐입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과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을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18절) 고난은 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중한 것입니다. 고난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영원합니다. 고난은 이 땅의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하늘 나라의 것입니다. 고난은 사람에게서 주어집니다. 그러나 영광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집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을 받지만, 그 고난이 아무리 극심하고 크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과 상급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는 결과적으로 넉넉히 이겨놓은 상태입니다. 최후의 승리와 영광은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무엇으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합니다.
본문 38∼39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오늘 본문을 시작할 때 "누가"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말씀을 거쳐서 이제는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무엇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가 겪었던 모든 고난들이 끝나고 더 이상 그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여전히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고 온 우주 속에 있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등 아무리 다른 목록들이 수없이 많다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겁먹을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넉넉하게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환난입니까? 아니면 어려움입니까? 핍박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아니면 칼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것을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이제 2개월 후면 2004년이 끝이 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이 세상의 어떠한 것이라도 끊을 수 없는 그 사랑으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그 시간까지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현재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힘입어서 얼마든지 이기고 승리할 것입니다.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워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굳게 지키기를 바랍니다. 아니 천국 가는 그 시간까지 하나님의 사랑,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 끊을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서 매일 매순간 넉넉하게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여 주심을 믿고, 우리가 연약할 때, 무엇을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도와주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믿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줄 믿고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용기를 내어서 승리를 확신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