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원하시는 건강한 교회”(마 16:13-28) 
  
오늘은 우리아름다운교회가 설립된 지 2주년이 기념하는 감사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교회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먼저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오늘이 있기까지 알게 모르게 은밀한 중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여러 성도님들의 헌신과 눈물의 기도에 있기에 가능했음을 믿고 수고하신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깊은 위로와 상급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옆 사람하고 서로 격려합시다. “집사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아름다운교회가 그 이름값을 하려면 상당히 많은 부분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도 바뀌어야 하고, 여러분도 상당히 많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아침에 초발심(初發心)으로 돌아가는 심정으로 강단에 섰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비단 목사만의 마음가짐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가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이에 편승하여 덩치가 작은 교회마다 어려움이 없는 교회가 없습니다. 우리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비록 덩치는 작지만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보다 복음의 본질을 기억하면서 그 본질 때문에 웃고 우는 일에 힘쓴다면 아름다운교회는 소망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적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성공 기준에 초점을 두고 그것에 부합하기 위하여 외형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아름다운교회도 그렇고 그런 교회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주인 노릇하고 사람들이 기뻐하는 일에만 급급해 한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교회(敎會)는 “지친 영혼들이 재충전되고 새 활력을 얻는 충전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성도님들이 교회에 와서 위로를 받고 다시 세상으로 힘 있게 파송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교회가 이런 순기능적인 역할을 감당하려면 끊임없이 교회다워져야 합니다. 교회의 거룩한 본질이 회복되지 아니하고, 교회의 영광이 회복되지 아니하면 우리들의 외침이 외침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 목사도 끊임없이 개혁이 되어야 하고, 여러분도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고인 물은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J.Stott) 목사님은 “현대교회가 병들어 가는 것은 현대교회들이 잘못된 교회 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의 고질적인 질병은 왜곡된 교회론에 있다”라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월리암 바클레이 목사님도 “참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어야 한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름다운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生命力)이 넘치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의 주요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믿는 맛을 아는 사람이 가득한 교회를 말합니다. 이런 교회야 말로 좋은 교회이고, 아름다운교회입니다.  

그래서 김동호 목사님의 “생사를 건 개혁(改革)”이란 은 “좋은 교인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맛을 아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고, 좋은 교회란 그런 좋은 교회들이 많이 있는 교회를 의미한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부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사실 공부에도 맛이 있고, 재미가 있습니다. 공부하는 맛과 재미를 느끼는 것이 쉽지 않아서 그렇지, 그것만 알 수 있다면 그 힘든 학교생활에도 얼마든지 즐기면서 할 수 있습니다. 좋은 학생이란 공부하는 맛과 재미를 아는 학생이고 좋은 학교란 그런 좋은 학생들이 많이 학교를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에는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맛이 있습니다. 그 맛을 아는 것이 쉽지 않아서 그렇지, 그 맛 만 알 수 있다면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가야 하는 신앙생활이 결코 힘들지만은 않습니다. 얼마든지 좁은 길을 찬송하면서 기쁘게 갈 수 있습니다. 좋은 교인이란 바로 그 예수님을 믿는 맛을 아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고, 좋은 교회란 그런 좋은 교인들이 많이 있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탄은 우리가 좋은 교인이 되지 못하게 하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를 좋지 못한 교회가 되게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그와 같은 뜻을 펴기 위해 쓰는 전략 중의 하나가 교회에 예수님을 믿는 맛 외에 인간적인 맛과 세상적인 맛을 들여와, 교인들로 하여금 그 맛에 눈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이와 같은 전략 때문에 교회 안에는 예수님을 믿는 맛 외에도 많은 인간적이고도 세상적인 맛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름다운교회 설립2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 있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냐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고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정치적인 구원자를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던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바라바는 선택하고,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건강한 교회입니까? 
어떤 사람은 건강한 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담임 목사의 설교가 훌륭해서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 담임 목사가 청빈(淸貧)하고 윤리적 삶의 본을 보이는 교회, 담임 목사와 장로님 및 제직들 사이에 갈등이 없이 평화로운 교회, 교회의 재정이 교회를 치장하거나 교회 자체 행사에 쓰여 지는 것보다 외부의 선교와 구제에 쓰여 지는 것이 많은 교회, 평신도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춘 교회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이 건강한 교회를 측정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필요한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건강한 교회는 처음부터 만들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정원이 되기까지는 누군가의 헌신과 수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처럼 주님께서 원하시는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헌신과 수고가 뒤따라져야 하며, 처음부터 건강한 교회는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건강한 교회 타령만 할 것이 아니라 목회자나 여러분 모두가 힘을 다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강한 교회의 이미지는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교회의 이미지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12제자들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교회를 세우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주님께서 세운 교회가 오래 오래 이 세상에서 건강한 영향력(影響力)을 행사하기를 소망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반석 위에서 세운 교회”의 이미지입니다.(18절 하)

따라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건강한 교회는 반석 위에 세운 교회입니다.
반석은 사막지대에는 적의 공격에서 유일하게 화살을 막을 수 있는 피난처요. 길을 지나는 나그네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쉼터요. 임시 처소를 꾸미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안전한 집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그러기에 아름다운교회 설립2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름다운교회가 어떻게 건물을 예술적으로 잘 꾸밀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방황하는 많은 이 시대의 나그네들에게 우리교회가 참된 안식이 되어주고, 그들로 구원을 경험케 하는 영향력(影響力)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느냐는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즉 외형적(外形的)인 측면보다도 보다 본질적(本質的)인 측면에서 우리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원하셨던 반석 위에 세운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1. 반석 위에 세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교회입니다.(16,18절)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가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6절)라고 고백할 때에 그를 칭찬하시고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의 반석은 무엇을 말합니까? 오랫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이 반석을 문자 그대로 베드로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를 초대교황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 이래로 이 구절에서 반석을 인간 베드로가 아닌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에 다가오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면서 자기와 3년을 함께 해 온 제자들의 믿음을 세워주실 목적으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의 3년에 걸친 제자훈련의 핵심을 되묻는 질문으로 일종의 졸업시험과 같은 성격을 지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절)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 이때 베드로는 그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6절) 이것이 베드로의 신앙고백(信仰告白)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답(正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기뻐하시며 “이것을 너에게 알게 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시라”고 하십니다.(17절)

그렇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요”라는 고백은 참으로 중요한 고백입니다. 이 말 속에서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메시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문자 그대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식으로 표현하면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구약시대에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만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왕은 다스리는 자요, 선지자는 가르치는 자요, 제사장은 문제의 해결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려 온 메시아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을 완성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은 우리들이 지금까지 기다려온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는 “예수님은 나의 왕으로서 나를 완전하게 다스려 주실 있는 분이시며, 예수님은 나의 참된 선지자로서 나를 온전한 진리로 가르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나의 죄 문제와 인생의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믿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共同體)가 교회인 것입니다. 이 고백이 분명하게 못할 때에 교회는 흔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교회의 기초 곧 반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작금의 한국사회의 부실함은 일반적으로 우리사회의 기초가 견고히 못한데서 있다고 되고 있습니다. 기초는 어느 영역에서도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기초가 견고하지 못하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 가지로 한국교회의 부실의 근본 요인도 신앙고백의 불확실성(不確實性)에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반석 위에 세운 교회는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입니다.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앙고백이 있는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이 딤후 3:14에서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배우고 확신하는 거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딤후 3:14에서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배우고 확신하는 거해야 합니다. 마 4:23에서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내내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많은 것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전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 등등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교회가 제자훈련을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제가 부임된 이래 계속해서 교육을 강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제자가 되려면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교육(敎育)해야 합니다. 교육은 교회의 사명인 동시에 책임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가 본질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지(無知)”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 자기가 영광을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절대 지나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교회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릅니다. 그 일에 자신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모릅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잘못된 일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이 우리 자신이 무지함으로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로 나가는데 거침돌이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되려면 우선적으로 무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의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교회의 주인은 누구여야 하는가를 올바로 교육해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의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올바로 교육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교회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행 13장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참으로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①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이 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을 보시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이방 도시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미 그들이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에 자기들이 처해 있는 사회 속에서 인정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②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4-26절의 기록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자 양육에 힘을 쏟은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③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건전한 팀웍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에 진정한 인간 사이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행 13:1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의 다양한 구성원을 보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율법학자요, 니게르라 이름을 가진 사람은 얼굴이 검은 사람이고 귀족 출신의 사람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안디옥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④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행 13:3에 보면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안디옥 교회의 영적 상태를 잘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기도 없는 선교를 할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 선교의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기도 없는 선교는 한마디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⑤ 안디옥 교회는 이웃의 어려움에 함께 동참하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유대 지방에 일어난 흉년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만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들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였습니다. (행11:27-30).

⑥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였습니다. 행 13:2에서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의 명령에 민감하게 순종하였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안디옥 교회가 이처럼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원동력은 교육에 있었습니다. 행 11:25-26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러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지하면 이러한 신앙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교육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해도록 해야 합니다. 교육 없이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로 나아가는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2. 반석 위에 세운 교회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교회입니다.
한국교회는 교회사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영향력 있는 공동체로 남아 있으려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교회입니다. 물론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훌륭한 목회자, 훌륭한 교인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훌륭한 목사님들 때문이 아닙니다. 훌륭한 교인들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사실 부족한 지도자들로 인하여, 그리고 부도덕한 교인들로 인하여 그동안 교회는 많은 상처를 받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여전히 존재하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본문 18절에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의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지역교회가 교회다우려면 예수님의 교회 주인 되심을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실천되지 아니하면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결국 우리의 주장이 아닌 예수님의 뜻을 얼마나 진지하게 찾고 따르느냐에 따라서 달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위해서는 첫째 우리가 성경을 알아야 하고, 둘째 기도에 힘써야 하고,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가 진지하게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찾는 분위기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번 영성 회복을 위한 부흥성회는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영성을 회복해야 자기가 주인 노릇하지 않고 주님께서 교회의 주인임을 인정하며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자기가 주인 노릇하고 싶어서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에이 토저’라는 분은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기도 안하는데도 모든 일이 잘되고있다고 느낄 때이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지 못하고 어떻게 성숙한 자녀 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어느 때보다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나의 뜻도, 다른 사람의 뜻도 아닌 주님의 뜻임을 고백하며 예수님으로 아름다운교회 공동체의 주인 되게 하실 때에 아름다운교회가 정말 반석 위에 세운 교회가 될 것을 믿습니다. 

3.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교회입니다. (23절)
본문 23절에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하여 주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 베드로조차도 주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21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청하면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로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22절) 이에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지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이런 실수는 주님을 사랑하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적인 판단(判斷)을 가지고 말을 했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일을 방해하는 결과가 되었고, 결국 혹독한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禮拜)하는 곳입니다. 사람을 예배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곳입니다. 교회란 사람이 영광을 받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건강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더 우선시하는 교회입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 단순한 원칙(原則)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하여 예수님 대신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는 곳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고 시기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분명히 예수님이심에도 사단은 끊임없이 사람이 주인(主人)이 되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함부로 교회의 주인이 되며 그것을 즐기려고 합니다. 사람이 주인이 되며 사람이 영광을 받는 교회는 모래 위에 세운 교회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 모래 위에 세운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운 교회로 바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려고 하는 교회의 몸부림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베드로와 같은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도록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최초의 교회를 설립하시겠다는 말씀 뒤에 왜 죽음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석 위에 세운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만드시며 그의 백성으로 삼는 이 일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씻으시며 우리를 죄악(罪惡)에서 구출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로 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됩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으면 결코 교회는 세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근거로 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청하면서 “...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는 말은 참으로 교만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은 상당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실패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도 그가 주를 위해서 할 일이 있을 뿐 그 자신의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일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가장 인정하시는 제자이었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된 자의 도리로서 스승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고 영광된 자리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동참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내가 헌금을 하고, 내가 성물을 사고, 내가 건물을 얻었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신 것이지 결코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베드로는 모르고 “주여,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생각하실 때에는 얼마나 교만한 모습입니까?  이 말 속에는 “내가 나서서라도 예수님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라고 공박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 신자의 본질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이 어떤 변화를 가져야 하는 것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어떤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를 가져야 합니다.  신앙이 ‘Being’(행함)에 관한 문제이지 ‘Doing’(됨)에 관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어떤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보다 더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될 때에 내가 원하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게 될 것이며,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는 변화되지 아니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어떤 무엇인가를 했다고 생각하니 때때로 섭섭하기고 하고, 때때로 공치사를 하고 싶고, 때때로 자신을 드러내고도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을 알아주지 아니할 때에 거침돌이 되어서 교회를 혼란하게 하고, 어지럽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마태복음 7장에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대한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 대해서 일반적으로는 말씀을 듣고 실천한 자와 실천하지 않은 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실천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기초에 대한 말씀입니다. 만약 반석 위에 선 교회라면 홍수가 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선 교회라면 홍수가 나면 무너집니다. 왜 무너집니까?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나도 집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그 집의 기초가 반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자기 자신의 기분과 생각에 기초한 행함은 주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다”(마 7:22)라고 말하는 사람을 향하여 아주 냉정하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에서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행함이 주님의 뜻에 근거한 행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근거하지 아니하고 나의 기분이나 나의 생각을 만족시키기 위한 행함이라면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 주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일을 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십니다.(24절 상)
주님께서는 본문 24절 상반 절에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자기 부인을 요구하셨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물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 생각, 자기 인식, 자기 가치관을 바꿔야 합니다. 자기의식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꿔야 합니다. 자기 생각을 부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감람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면서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거두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십자가만은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만이 인류를 구속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해오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 풍속이나 옛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서 자기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무디(D. L. Moody)가 “전에는 내 소원이 축복이었더니 지금은 주님 자신이고, 전에는 내가 감정의 중심이더니 지금은 내가 그의 말씀중심이고, 전에는 내가 쉬지 않고 달라고만 하더니 지금은 쉬지 않고 찬송하며, 전에는 내가 주님을 사용하려 하였더니 지금은 그가 나를 사용하심을 내가 원하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마음으로 사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24절 하)
주님께서 본문 24절 하반 절에서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십자가(十字架)는 로마시대의 가장 잔혹한 형벌로 고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죽음을 각오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마다 주님을 받아야 할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다른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하려다가 받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주님을 위하는 가운데 자기에게만 특수하게 따라오는 고생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주님을 위하다가가정에서 핍박을 받는 일이 있고, 또 어떤 이는 이웃에서, 또 어떤 이는 세상 권세로 말미암아 핍박을 당하기도 합니다. 성도는 이러한 십자가를 벗으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잘 지고 이겨야 합니다. 신자의 완전한 평안은 내세에 이르러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십자가의 고통을 우리들만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당할 때에 예수님이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안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한번만 져서는 안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져야 합니다. 좋을 때나 슬플 때나 우리에게 태인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많은 고통이 따릅니다.  힘들다고 중도에 포기해서 안 됩니다. 힘들다고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감당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힘들다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25절 상) 그것은 결과적으로 1달란트를 받아 그것을 땅 속에 묻었다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든지 그 이상의 상태에까지 빠질 수도 있습니다. 

(적용)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먼저 생각하면서 제 목숨을 잃고자 할 때에는 놀라운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잃을 각오로 충성하고 헌신하면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 될 것입니다.(25절 하) 그리고 본문 27절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 각자가 주님의 교회와 나라를 위해서 행한 일에 대해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여러분의 수고와 헌신을 잊지 아니하십니다.(히 6:10)

☑ 그렇다면 왜 주님의 교회를 수고한 자들이 축복을 받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교회는 거룩하고 영광스런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가장 영광스럽고 복된 공동체이기에 교회를 위하여 수고한 자들은 축복을 받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冕旒冠)을 주십니다.(계 2:10)

(예화) 고(故) 한경직 목사님께서 영락교회를 처음으로 건축할 때였습니다. 
그 당시 주일 낮 예배에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가 평균 158명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경직 목사님께서 교인들에게 이런 광고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도 성전 건축을 해야겠습니다. 다음 주일엔 성전 건축 헌금을 작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특별히 주일엔 10일 먹을 것만 남겨두고 모든 재산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분만 교회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북에서 남으로 왔습니까? 무엇 때문에 북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서울로 왔습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기 위해 왔지 않습니까? 신앙의 자유를 찾아왔지 않습니까? 비록 지금 우리의 형편이 어렵더라도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교회부터 지읍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섬겨봅시다. 그러면 서울에서의 삶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지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한경직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그 다음 주에 152명이 교회에 나왔고, 그들 100%가 건축헌금을 드리기로 작정을 했답니다. 그 중 40명은 목사님의 말씀대로 10일 먹을 것만 남겨 놓고 가진 것 전부를 건축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때 헌신했던 40명은 1970년도에 우리나라 우수 기업 200위 안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대체 교회가 뭐기에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면 그만큼 복을 받을까요?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자선 심리나 공명심으로 훌륭한 일들을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어떤 자선 단체라도 10일 먹을 것만 남겨두고 내놓지는 않습니다. 고아원과 양로원, 혹은 대학에 평생을 모은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는 일을 종종 봅니다. 그러나 그들조차 앞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어느 정도의 물질을 남겨 놓거나 아니면 그들의 사후에 기증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교회란 어떤 곳이기에 10일 먹을 것만 남겨두고 다 드릴 수 있을까요? 도대체 교회가 뭐 길래 또 드린 만큼 그런 놀라운 축복이 임한단 말입니까? 반대로 교회가 무엇이기에 교회를 대적하고 거스르면 무서운 벌과 저주를 임하는 것일까요? 어떤 교회에서는 공금을 횡령하던 사람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교회를 핍박하다가 예기치 않게 간이 말라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쉽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이유는 엡 1:23에서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 세상에 가장 영광스러운 공동체(共同體)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얼마나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알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의 영광을 세우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습니까? 

(예화) 목사 안수를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새내기 목사님께서 처음으로 축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하는 축도이기에 “지금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 대신에 “요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라고 축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요새”나 “지금”이나 같은 뜻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하며 웃었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하게 웃고 넘어가는 것으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모를 뿐만 아니라 주님이 몸된 교회를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통탄스럽고 서글픕니다. 
그러기에 온 가족이 모인 밥상 앞에서, 그것도 자식들이 보는 데서 교회를 비방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험담을 한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또 교회를 건축하면 교인들이 앞장서서 반대를 하고 오히려 선봉장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교회를 우습게 여기니까 세상도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음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안티 기독 사이트를 보면 별소리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교회를 향해 비난과 모욕적인 망발을 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런 공동체(共同體)는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3절-18절을 보면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사도 요한 밧모섬에서 어느 날 기도하다가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밭 끝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으시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시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처럼 그리고 눈처럼 희고, 두 눈은 불꽃처럼 빛났습니다. 그분의 발은 용광로에서 제련된 청동 같았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그분은 오른 손에 일곱별을 쥐고 계셨으며, 양쪽에 날이 선 검이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요한은 마치 강렬히 타오르는 태양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분을 보는 순간은 요한은 죽은 사람처럼 그분의 발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하고 영광스런 곳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런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1만 명, 10만 명, 100만 명이 모이며 휘황찬란한 예배당을 지어 놓았기 때문에 영광스런 것이 아니라 그분의 피로 사신 거룩한 몸이기 때문에 이 땅에 가장 영광스런 곳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할지라도 교회는 영광스런 곳입니다. 참으로 초라한 간판과 녹슨 종탑을 자랑하는 작은 교회, 비가 오면 새고 쥐들이 우글거리는 지하실의 작은 교회, 열명, 스무 명도 채 안 모이는 작은 교회라고 할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설립 되고, 주님으로 이름으로 간판과 종탑을 달았을지라도 주님의 피 묻은 복음을 전하는 교회라면 가장 영광스런 교회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머리로 모시는 교회라면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가장 영광스런 교회입니다. 이 땅의 청와대, 백악관의 영광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바로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교회 성도라도 결코 기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영광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교회라면 그 교회를 통하여 가정이 축복을 받고, 사회가 축복을 받고, 세상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구원의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축보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시고 수고하신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보장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조금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함으로 말미암아 큰 축복을 받은 것처럼 지금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 있을지라도 잘 인내하면서 믿음의 주가 되시고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묵묵히 수고하고 헌신하신다는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몸된 교회를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름다운교회는 주님께서 피 값으로 사신 거룩한 교회요, 영광스런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교회가 반석 위에서 세우신 교회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①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고백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② 예수님이 주인 되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③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피 값으로 세우신 주님의 교회를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더욱 자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되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앞장 서는 여러분이 되어서 주님께서 예비하신 각종 면류관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