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있는 사람 성경 
느 8:5-12 설교 송행식 목사
(살렘교회 담임목사) 2004. 05. 16

(5)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7)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8)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9)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케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12)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아멘.


이솝우화에 있는 이야기 입니다.
늙었다고 늘 무시당하고 멸시 당하며 사는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늙은 당나귀가 산길을 가다가 죽은 사자 가죽을 보았습니다. 늙은 당나귀는 사자가죽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랬더니 무시하고 조롱하던 산짐승들이 사자가 나타났다고 허겁지겁 다들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늙은 당나귀는 사자행세를 하는 것이 아주 재미가 났습니다. 하루아침에 산 속의 왕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표범이 이 소식을 듣고 인사를 올리겠다고 나타났습니다. 늙은 나귀는 표범이 나타나자 부들부들 떨면서 뒷걸음질쳐 도망치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모양은 사자인데 속은 늙은 당나귀였습니다. 가죽은 사자인데 속은 힘없이 죽어 가는 사자였습니다.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힘에 있습니다. 
우리기 하루하루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힘이 필요합니다. 
시력이 있어야 제대로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청력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눈이 크다고 질 보는 것도 아니요 귀가 크다고 다 잘 듣는 것도 아닙니다. 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고, 들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건강도 결국은 힘입니다. 체력이 좋다는 말은 몸에 힘이 넘친다는 말입니다. 몸집이 크다고 체력이 강한 것은 아닙니다. 겉모양은 잘 갖추어져 있는데 그 속에 있어야 할 힘이 없기에 안타까운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타난 족장들의 임종의 순간을 보면 “기운이 진하여 열조에게로 돌아 가니라“ 고 표현하였습니다. 힘이 없어 죽었다는 말입니다. 강한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승리는 힘있는 사람에게로 돌아가는 영광입니다. 
강대국이란 힘이 강한 나라를 일컫는 말입니다. 힘이 없으면 나라도 무너지고 개인도 가정도 무너지게 됩니다. 권력도 힘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권력을 추구합니다. 재력도 힘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지력도 힘이기 때문에 고생스러워도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체력도 힘이기 때문에 건강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힘이 있는 만큼 힘이 있는 자가 주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노예가 따로 있습니까? 종살이가 따로 있습니까? 힘이 없으면 노예요 종이 되는 것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주인이요 힘이 있는 만큼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만에 다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성전을 아름답게 세워놓고 보니 성전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백성들을 보니 여전히 노예기질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모양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데 성전속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무력한 노예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겉모양은 사자인데 속은 늙어 힘없는 당나귀인 것처럼, 성전은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놓았지만 성전안에서 예배드리는 백성들은 영력이 말라버린 노예요 종들이었습니다.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힘)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사랑할만한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형식만 갖추었습니다. 모양만 갖추었습니다. 내용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딤후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1).....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5) “
고전 4:19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계시 3:1-5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영과 일 곱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데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1)....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5)

계시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 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시 3:19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계하라”
계시 3:20-22 (20)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헤를 받고 싶었습니다. 
텅 빈 가슴에 하나님의능력으로 채우고 싶었습니다. 메마른 심령속에 하나님의 용광로 같이 타오르는 불길 같은 능력을 받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폭포수 같은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품안에 안겨 통곡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수문앞 광장에 이른 새벽부터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도 어린아이들도 모여 들었습니다. 노인들도 젊은이들도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 선지자로부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들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때가 언제였던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요청에 학사 에스라는 나무로 강단을 만들어 그 앞에 서서 하나님 말씀의 책을 폈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강단에 올라가 하나님의 책을 펴니 백성들이 다 일어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질 때 어떤 반응이 나타났겠습니까? 그 반응은 곧 이 시간 우리들의 반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믿음의 사람으로 바꾸어 졌습니다.
6절에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받은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했다고 하였습니다.“아멘”이라는 말은
‘그 말씀이 진실이요 옳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변화된 인격과 성품은 믿음의 자세로 바꾸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합니다. 그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 그래서 지으신 것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 살아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5:12-13 의 말씀입니다. 
패자와 승자의 차이에 대해서 기록한 글을 보면 패자는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승자는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승자는 무엇인가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며 기다려 보지만 패자는 이제는 다 끝장났다 다 틀려 버렸다고 생각하며 포기해 버립니다.
승자는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말하지만 패자는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승자는 성공을 다른 사람의 덕으로 돌리고 패자는 자신의 실패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 승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패자는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서 말합니다. 승자는 월급과 상관없이 
일하지만 패자는 모든 것을 돈으로만 계산하여 일합니다. 
승자는 “제가 넘어 졌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패자는 누가 밀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승자는 어떤 문제든지 해답이 있음을 믿고 더 좋은 축복과 더 좋은 성공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하고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가 능력입니다.
능력주시는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 믿음으로 사십시오 좋은 것을 생각 하십시오. 좋게 생각 하십시요. 다른 사람을 말할 때 좋게 말해 주십시오. 이 사람이 아멘의 사람이요 능력의 사람이요 힘이 있는 사람이요 반드시 승리하여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2. 감격이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졌습니다. 
9절에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다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너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울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윗이 범죄했을 때 그 죄를 생각하며 밤마다 그 침상이 적셔지도록 울었다고 했습니다. 
시편 6 : 6 에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띠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눈물로 참회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이 순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실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순간이 능력의 순간입니다.

감사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고마워서 흘리는 눈물, 은헤와 사랑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릴 때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능력의 순간입니아.
사랑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불쌍한 사람이 생각나서 울어야 합니다. 남편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아내. 자식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부모가 있을 때 이 기도의 순간이 능력의 순간입니다.
눈물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눈물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안타까워서 울고, 불쌍해서 울고, 감사해서 울고, 감격스러워서 우는 사람들이 말씀의 능력을 받은 사람입니다. 

3. 힘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10절에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무슨 힘으로 살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힙입니다. 
요일 5:4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세상을 무슨 힘으로이기겠습니까? 마귀의 시험과 사단의 역사를 
무슨 힘으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귀신과 악령의 역사를 무엇으로이길 수 있겠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이긴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무엇 입니까?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시편18:1 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권력이 힘인 사람, 재물이 힘인 사람, 지식이 힘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힘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93장 찬송입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되시니 구주 예수 떠나가면 죄중에 빠지리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 주실이 주 예수”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능력이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힘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교회 성도 여러분 !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으면 무너집니다. 힘이 없으면 쓰러집니다. 승리와 성공도 힘이 있어야 보장이 됩니다. 행복도 영광도 힘있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힘과 능력의 원천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이겨낼 수 없는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능력자 이십니다.
주님을 기뻐하심으로 힘있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건축하는 교회를 건축하고 가정을 건축하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화 하나를 말씀들이므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정채봉선생의 “생각하는 동화” 씨리즈 가운데 “코뚜레가 일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미 소가 두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송아지들이 자라 어느덧 코뚜레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형 송아지가 농부한테 사정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제발 코뚜레를 하지 말아 주십시오. 농부가 대답합니다.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망아지처럼 되고 말텐데“ ”아닙니다. 주인님, 코뚜레를 해야만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은 옛날 생각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곱절이나 일을 잘 할 테니까요“ 농부는 형 송아지의 말을 받아들여 동생 송아지에게만 코뚜레를 했습니다. 형 송아지는 자신의 약속대로 코뚜레 없이도 스스로 멍애도 메고 쟁기도 끌었습니다. 코뚜레를 한 동생 송아지가 지쳐 쉴 때에도 형 송아지는 더욱 힘을 내어 달구지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 송아지들은 자라서 어느덧 어른 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코뚜레를 하지 않은 형 송아지는 차츰 꾀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고 자신을 잡으러 오는 농부에게 뒷발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뚜레를 항 동생 송아지가 들에서 돌아와 보니 형 송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행방을 묻는 동생 송아지에게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일도 안하고 꾀만 부려서 도살장으로 보냈지”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코뚜레가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겸손하지 못한 인간을 이대로 내버려 두어도 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시므로 우리 주님께 꽉 붙잡혀진 존재로서 순종하며 주님을 기뻐하시므로 승리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