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과 행하는 것, 교리와 실천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체험 
  
리폼드뉴스   
 
 

장로교 칼빈의 5대 교리 가운데 하나 중에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가 있다. 이를 다른 말로 “성도의 궁극적인 구원”이라고도 한다.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끝까지 지켜주셔서 천국에 이르게 한다는 교리이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라는 교리는 단순히 이론적인 수학공식으로 천국에 가는 그런 개념은 아니다. 예수를 믿고 공감하면 의지적인 결단이 생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한 확신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천국은 믿음으로 간다는 말은 우리들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천국은 우리들의 행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가는 곳이다. 믿음으로 가는 천국은 실천을 동반한다. 그 실천은 순종과 경건의 삶이다. 물론 헌신과 희생을 동반한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다.

역사적으로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이론과 실천의 관계는 서양철학 전번에 걸쳐서 핵심적인 문제로 취급되어 왔다. 서양철학은 실천보다 이론 우위의 기조를 취해왔고, 올바른 생활에 대한 이론, 혹은 앎이 올바른 행함(실천)을 가능해 주리라 믿어왔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역사를 통해 번 번히 깨어졌고 현대에 와서는 완전히 산산 조각나 버렸다.

19세기 철학자 칼 맑스(Karl Marx)는 서양철학의 전통적 이론우위의 주지주의를 뒤엎고 이론보다 실천(praxis), 혹은 행위를 강조했지만 그것이 오늘날 인류에게 가져다준 파괴적인 결과는 너무도 심각하다.

보편적으로 기독교의 잘못된 가르침 중에 하나가 바로 “알면 무엇하느냐, 행함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실천 그 자체를 중요시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두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앎이 실천을 반드시 보장하지 않는다는 현대사상의 영향이다. 둘째, 성경적, 기독교적 지식, 앎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교육들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많이 안다. 지식적인 수준이 대단하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 속에는 실천과 순종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머리만 커지는 과분수의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몰라서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순종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입만 살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배웠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달라졌을 것이다. 아는 것은 많되 실천이 없는 것을 배격한다. 반대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열심이 특심인 것도 문제다. 이런 경우 우리 모두를 피곤하게 할 뿐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과 사랑을 아는 지식은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감사, 감격하게 하고 겸손하게 한다. 그 지식과 앎은 성도의 전 인격을 사로잡아 행동으로까지 몰고 가게 하는 생명력과 운동력을 지닌 특성이 있다.

흔히들 하는 말 중에 교리와 신학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실천이 중요하다는 말들을 종종 듣는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이는 기독교 진리와 생활의 원리를 파괴하는 발언이다. 참된 신앙에 대한 표현은 교리에서 왔다. 교리는 성경에서 왔기 때문에 교리가 잘못되면 신앙이 다 비뚤어진다.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는 교리와 신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데 있다. 교리와 신학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신앙을 주관적, 개인의 체험중심으로 간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체험들을 모든 사람들의 신앙 기준으로 말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칼빈은 잘못된 성경의 해석이 잘못된 교리를 만들고 잘못된 교리들이 기독교인들의 삶을 올바르게 지도하지 못한다고 봤다.

성경말씀을 통해 바르게 배워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서 바르게 실천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아는데 멎어지지 않고 아는 그 지식은 순종하는 실천의 모습으로 연결될 때 여기에 큰 역사가 일어난다. 말만 앞세운 죽은 신앙, 열매 없는 신앙은 환영받지 못한다. 오늘날 입만 살아있는 신자들이 너무나 많다. 순종과 경건의 삶은 보이지 않고 문제와 갈등만 만들어 내는 신자들 곁에는 그런 사람들만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