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길로도 걷게 하시는 하나님”(신 8:2-4)

우리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 23:1-3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蘇生)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때때로 우리를 광야로도 인도하실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광야의 길을 걷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들을 돌리셔서 홍해가 있고, 광야로 이어지는 길로 가게 하셨습니다(출 13:17).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불레셋이 사는 가나안의 서남부 끝으로 가면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서의 고된 노예생활로 인해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백성의 기도를 들으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은 앞이 막혀 있는 홍해바다로 인도하셨습니다.   풀 한 포기 제대로 없는 사막 지대인 시나이 반도로 인도하셨습니다. 만약 지중해 바다를 끼고 블레셋 지경 지금의 가자 지구 쪽으로 갔다면 1주일이면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나이 반도는 어떤 곳입니까? 
시나이 반도는 사막지대로서 1년 내내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곳으로 첫째, 물이 없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둘째로, 그곳에는 사막지대이므로 채소를 재배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셋째로, 낮에는 섭씨 45도 이상의 고온이고 저녁은 쌀쌀하게 추운 날씨입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고 갈 수 없는 그 길입니다. 이처럼 광야는 우리가 도저히 걸어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불만을 노골적으로 토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도자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도자가 무능하다고 말합니다.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보이시지 아니하니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삼자고 말합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이 없다고 말합니다. 마늘과 파를 먹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너무 덥다고 말합니다. 너무 춥다고 말합니다. 정말 이들의 모습은 수준 이하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애굽에서의 노예 근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광야학교에 입학하신 계십니까? 이미 광야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광야의 길로 걷게 하시는 처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나를 광야로 인도하신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4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도 아닙니다. 그리고 40년 동안의 고난의 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해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이며 하나님이 가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때로 원치 않는 고난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케 됩니다. 만약 우리가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닌 순수한 고난이라면 분명히 그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에 때때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광야생활의 기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도 걷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의 길로 인도하심을 우리를 유익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 잘돼야 하는 데 왜 이렇게 고통이 끊이질 않고 계속 되냐고 불만을 토로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고통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광야와 같은 힘든 행진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의 길로 걷게 하신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하여 "광야의 길로도 걷게도 하사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으로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기 위해서 때때로 광야의 길로도 걷게 하십니다.(2절) 
본문 2절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기 위해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자기가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먼저 자아를 죽이고 교만을 버리고 철저히 낮아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셔야만 되는 일입니다. 고난(苦難)은 교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난을 통하여 낮아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야곱은 고난의 길을 통하여 겸손해 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은 그야말로 큰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세수를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까? 먹을 물을 마음대로 마실 수가 있습니까? 애굽에서 먹던 맛있는 음식들을 제대로 먹을 수가 있습니까? 잠자리가 편하길 합니까? 오직 모래 바람 날리는 사막 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서라 하시면 서야 하고 가라 하시면 가야하는 하나님 중심의 삶만을 살아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면 먹고 안 주시면 굶어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한마디로 육신의 욕망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것이 큰 축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광야 길을 가는 동안 철저히 낮아져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철저히 낮아져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면서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왜 광야의 고난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겸손한 자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들어갑니다. (마 11:29)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로 우리 자신을 낮추게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도 밤에도 떠나지 아니하시고 항상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아주시고, 행할 길을 지시하셨습니다(신 1:33).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며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의 낮은 무척 뜨겁습니다. 태양의 자외선에 노출되면 타버립니다. 구름기둥이 그늘을 제공하시며 인도하셨습니다. 광야는 일교차가 심하여 밤에는 춥습니다. 어둠에 실족하지 않게 빛을 비춰주실 뿐만 아니라 따뜻하게 온기를 조성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광야로도 인도하셔서 낮추게 하심을 곧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게 하시기 위함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로, 아버지로, 왕으로 항상 돌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마 28:20).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롬 8:14).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광야학교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세속적인 옛 사람을 빼어 버립시다. 애굽의 죄성을 버리고 천국 백성답게 그리스도로 옷 입읍시다.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인격을 가집시다. 영적 전쟁을 위한 전사로 믿음의 훈련을 합시다.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와 돌보심을 믿고 의지합시다. 광야생활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2.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기 위해서 때때로 광야의 길로도 걷게 하십니다.(2절) 
본문 2절의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고난 길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시험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시험, 하나님의 저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 부르짖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는, 고난 속에서 자포자기하고 원망과 불평 속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범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욥은 하나님의 시험 속에서 그 마음이 범죄 하지 않고 신앙을 잘 지킴으로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강하고, 흥하게 하려는 축복의 열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의 고난 가운데서 두 가지 시험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고난을 받게 되면 잘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그 마음을 살펴보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에 임하는 그 마음 자세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독한 마음은 분노를 낳게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그들은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 왔을 때 10명이 그 땅을 악평하는 소리를 듣고 다 울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우리는 그들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으며, 광야에서 그들의 최후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마음가짐을 바로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 중에서도 기뻐해야 합니다. (빌 4:7)
그러므로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고난을 참고 견디어 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오히려 더욱 가까이 하나님 앞으로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고난도 빨리 끝나고 약속의 땅을 밟는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가운데서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더욱 가까이 하였더라면 다시 광야의 고난 속으로 돌아가서 죽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에 대해서도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며 인도 하셨습니다. 불기둥이나 구름기둥이 뜨면 지체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과 살림도구를 챙겨서 출발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며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는가의 여부를 시험 하셨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출발과 멈춤도 하나님의 시험이요, 모세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그들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실 때도 하나님은 토요일에는 두 배로 내리시고 안식일에는 거두지 말라고 하시며 만나를 내리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거두러 나갔습니다. 평소에는 그 날 먹을 것만 거두라고 했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배로 거두었다가 그 다음날 다 썩어 버리는 일들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광야의 고난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이 있다고 하여서 순종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자세입니다. 고난 중에서도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은 쓰지만 그 결과는 달콤합니다. 그래서 시 119:67과 71절에서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광야의 길을 걷을지라도 결코 불평, 불만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시험에 승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 교회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인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따라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질 때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시험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훈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①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훈련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생활규범인 율법을 광야에서 주셨습니다. 춥고, 덥고, 목마르고, 배고픈 광야 생활을 통해 매일, 매순간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인내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원망하는 버릇을 가진 백성들이 감사하는 백성으로 훈련되어야했습니다. 원망은 과거에 주신 은혜를 잊고 감사할 줄 모르는 ꡒ악성 건망증ꡓ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훈련하십니까? 출 19:4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독수리처럼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하듯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훈련하셨습니다(출19:4, 신32:11-12). 독수리는 높은 곳에서 어린 새끼를 떨어뜨려 강제로 나는 훈련을 시킴으로 강한 날개를 가진 새끼를 길러냅니다. 어려움은 미래를 위한 훈련입니다. 경험한 만큼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방주사는 후에 병원균이 침투해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합니다. 
욥은 극한 고난 중에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단련하신 후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욥 23:10).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광야학교의 훈련은 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고전 10:13).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롬 8:28). 

② 우리의 사역을 훈련하십니다.
특별히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러야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전쟁의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전쟁은 필수적이었습니다. 홍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적을 멸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싸워주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말렉과의 전쟁에는 여호수아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워야하는 경험을 하게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우리의 노력 없이 주시는 승리도 있지만, 우리를 싸우게 하심으로 주시는 승리도 있습니다. 아울러 모세와 아론과 훌의 기도의 동역으로 기도와 팀 사역의 중요성을 배우게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하여 약속의 말씀을 붙잡게 하십니다(19). 하나님께서 요셉의 유언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권고하사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창 50:24-25). 요셉의 해골을 메고 나온 것은 과거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성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민 23:19).

3. 하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때때로 광야의 길로도 걷게도 하십니다.(3절) 
본문 3절의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광야의 길로 걷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①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먹여 주셨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정만 60만 명이었습니다. 거기에 어린아이와 여자 그리고 중다한 잡족까지 포함한다면 대략적으로 약 200만 명 정도가 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래사막 한가운데서 40년을 살았다는 것은 그야 말로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먹고살았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먹고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배고플 때 명하시니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만나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첫 열매를 먹을 때 멈추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힘쓰고 애써야만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사막 한 가운데서 만나를 내리셨던 능력, 그리고 메추라기 때를 몰고 오셨던 말씀의 능력, 반석을 치게 하여 샘이 솟게 하셨던 하나님의 능력!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이것을 가르치고 교육시키기 위해 광야로 현장학습을 40여 년간 내보내셨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육신을 위한 만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만나로는 결코 우리의 영적 주린 심령을 채울 수 없습니다. 생명의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요 6:27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40여 년 동안 의복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4절)
우리는 종종 의식주를 걱정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의식주문제를 광야에서 모두 해결해 주셨습니다. 광야 40여 년 동안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의복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고 그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이방인이 구하는 것입니다.(마 6:31-32)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옷이 얼마나 질기고 좋습니까? 그러나 수천 년 전에 의복은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천도 낡아서 잘 찢어지고 뜯어지는 형편없는 옷감 들 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인한 역사입니다. 
왜 계절이 순환합니까? 왜 낮과 밤이 계속됩니까? 왜 바다가 육지로 덮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조그만 씨를 심었는데 크게 자랄까요? 우연입니까? 그것은 창세기 8장22절을 보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지금도 살아 역사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으로 인하여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풍성하게 체험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광야의 길을 걷게도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① 낮추시고 ② 시험하시고 ③ 생명의 만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광야의 길을 걷는다고 할지라도 결코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8:11-17) ① 광야에서도 가나안의 소망이 있으니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② 광야일수록 간증거리가 많으니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③ 광야의 고난을 통하여 훈련하신 후에는 반드시 축복해 주실 것이기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④ 지치고 피곤 할 때에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심으로 실망치 말아야 합니다. ④ 광야 길의 고통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시기에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에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광야는 결코 버림받은 곳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관문으로 하나님의 훈련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을 통해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은 겸손과 순종과 말씀 절대 신앙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40년이 걸리시더라도 훈련 하셨겠습니까? 아니 그 과목을 합격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광야에서 멸망시켜버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즉 겸손과 순종과 말씀 절대 신앙이 없이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행진은 참으로 의미 있는 행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훈련시키고, 연단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① 모세의 40년 광야생활은 자기를 죽이는 겸손의 훈련장입니다. 그 훈련을 통해 하나님은 애굽 왕자로서의 자신을 의지하는 지식과 명예와 권세와 젊음을 다 빼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겸손할 때 사용하셨습니다.
② 다윗의 광야생활은 순종하는 훈련장입니다.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다윗은 하나님 앞에 신실했습니다. 말씀에 절대순종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친히 사울을 제거하시고 다윗을 세워주셨습니다.
③ 예수님의 40일 광야생활은 말씀 절대 신앙 훈련장입니다. 굶주림과 마귀의 유혹에 대해 주님은 돌을 떡이 되게 하실 수도, 성전 꼭대기에서 안전하게 뛰어내릴 능력도 있었으나 말씀을 의지하여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겸손으로 다윗은 인내와 순종으로 예수님은 말씀 절대 신앙으로 광야훈련을 통과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앞에 혹독한 시련이 놓여 있습니까? 나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고통스런 문제가 있습니까? 내 힘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을 만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훈련을 통해 여러분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어깨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큰 날개를 달아주실 것입니다. 광야 없는 가나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광야는 반드시 영광된 가나안의 상급과 함께 끝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광야행진! 모세와 같은 광야생활입니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며 주 만 전적 의지하므로 통과합시다. 다윗 같은 광야생활입니까? 신실함과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시다. 예수님 같은 광야생활입니까? 말씀을 붙잡고 의지하므로 통과합시다. 겸손과 순종과 말씀 절대 신앙만이 광야를 통과하는 열쇠입니다. 이 진리를 기억하고 한 주간의 광야행진도 겸손히 주 만 바라보고 순종하며 말씀을 의지하여 축복의 가나안을 들어가는 승리 행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