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도록 안겨 주시는 복을 받으려면”(눅 6:38) 

하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되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복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신명기 28장에 나타난 복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하신 말씀으로서 본장 27절에서 시작된 원수 사랑과 용서에 관한 가르침의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따라서 “주라”는 말씀은 “용서해 주라.”,“도와주라.”,“구제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희생하고 봉사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혼자 가지고 있지 말고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령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아무리 상하고 아플지라도 이웃을 용서해야 하고,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사랑을 베풀며 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주는 것은 손해(損害)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넘치도록 안겨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누어 주는 것보다 더 풍성하게 보상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해”를 왜 죽은 바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움켜쥐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는 다릅니다. 얼마나 풍요롭습니까? 그 속에 수많은 물고기 떼가 뛰놉니다. 주변에 있는 수목들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이 고여 있지 않고 계속해서 순환하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을 통해서 자기의 물을 내려 보낼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죽음의 바다처럼 적막하고, 무가치한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중심으로 주님께서 왜 우리에게 주라고 명령하시는지?, 왜 우리가 주되 무엇을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 주는 자에게 어떤 복을 주시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가 왜 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까?
첫째는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마 10:8)
우리가 남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과 세상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베풀며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을 베풀어 주셨고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거저 받았습니다.(눅 10:8) 하나님께서 “주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태어날 때에 빈손 들고 왔습니다. 우리를 길러 주시고,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는 청지기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지기에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노력해서 번 재산이다”고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벌 수 있는 능력과 재능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다만 “관리권”만 있습니다. 소유권은 하나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소유권이신 하나님께서 관리자인 나에게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분부하시는 것은 너무도 지당하신 것입니다. “안되겠습니다.”라고 할 이유도 염치도 우리 인간들에게는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서 자기의 것을 주는 것처럼 하는 것은 청지기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둘째로 사랑을 실천하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주는 것은 사랑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대강령입니다. (마 22:39)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일 3:18에서 행함으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내가 네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0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행위의  끝이며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롬1310) 

우리는 주님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게 사랑만 있으면 주지 아니하고서는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손으로 주지 아니하고 입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사랑으로써 일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샘을 열어 놓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의 빚을 진자들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마땅히 보답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의 능력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능력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연습하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웃과 세상에 대해서 모든 것을 베풀며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을 베풀 수 있는 사랑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의 필요한 모든 것을 주는 당연한 일입니다.  

셋째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되기 때문입니다. 
받기만 하면서 살아가는 자보다는 이웃의 필요한 것을 주면서 살아가는 자가 더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행 20:35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된 까닭은 남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니 복되고 나로 하여금 받게 되는 자가 기뻐하며 내 자신도 기뻐서 복되고 베풀면 더 많이 내게 채워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소망이 있어서 복되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기억할 것은 이웃에게 주는 것은 곧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마25:40) 
이웃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은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하여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을 주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어려운 이웃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 주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는 것은 바로 주님에게 하는 것입니다.(마 25:42)라고 말합니다. 만약 어려운 이웃을 보면서 등을 돌리고, 돌아보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주님에게 하지 아니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주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플 근처의 장막문에 앉았다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고운 에바를 취하여 떡을 만들고 기름진 송아지를 취하여 음식을 만들어서 융숭한 대접을 했습니다.(창 18:1-12) 그런데 이 나그네는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함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을 들었고, 복을 받았는데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복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 13:2에서 "손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행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메아리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부메랑 법칙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면 자신도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고, 남을 행복하게 하면 자신도 행복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하면 자신도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 67에서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에스겔 선지자는 겔 18:20에서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11:24-25절에서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화)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여우가 어느 날 황새에게 "맛있는 음식을 하였으니 우리 집에 놀러 오시오"라고 하고 초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황새가 여우의 집에 갔을 때 식탁 위에는 두 그릇의 맛있는 고기 국물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국물은 납작한 그릇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에 황새는 쳐다보기만 하고 먹지를 못했습니다. 초대를 받았다가 굶고 온 황새는 단단히 화가 나서 복수할 궁리를 하다가 며칠 뒤 여우를 초대하였습니다. “여우 씨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였으니 우리 집에 놀로 오세요.”초대에 응한 여우가 황새가 안내하는 식탁에 앉았을 때 식탁에는 생선 토막이 차려져 있었고 그 냄새가 몹시 구미를 당겼지만 여우는 한 점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생선토막이 목이 긴 병 속에 넣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우는 배고 푼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웃을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 4:7,9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고 권면하고 있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나그네를 대접한 자는 주님께 높임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 5:10) 그러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웃에게 항상 선을 베풀고 주는 일을 생활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어떤 방법으로 주어야 합니까?
첫째로 이웃의 어려움을 살피면서 선대하면서 주어야 합니다. (33,34절)
본장 33,34절에서 "너희가 만일 선대 하는 자를 선대 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을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이웃의 어려움을 살피면서 선대하면서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받은 만큼 주고, 준만큼 받으며, 이웃과 함께 살아갑니다. 선한 은혜를 받으면 선한 것으로 은혜를 갚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여 보복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천국 백성은 이웃에게 선하게 주고받는 삶 이상으로 선대하고 줄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①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을 선대하며 살아가는 인간관계를 갖기를 권면하십니다.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나를 아껴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더 아름다운 모습은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무연고자, 혹은 나에게 손해가 되어도 이익은 될 수 업는 이방의 객이나, 고아, 과부 등을 천대하지 말고 사랑하는 관계가 대접하는 자의 덕목인 것입니다(레19:34,23:32,신14:29)

② 이웃에게 베풀되 조건 없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하고(마10:8)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왔으니 어려운 이웃에게 대가를 바라지 말고 주라고 하십니다.(욥1:2,에11:6)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너희에게 억지로 오리(5)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10)리를 동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야 할 경우라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요구하는 것이  상을 베풀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베풀어야 기쁨과 행복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③ 선을 행한 후에도 그 이웃에게 시험을 받거나 고통을 받을 경우에라도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 주는 일이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복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벧전 3:9)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악한 이웃, 무능한 이웃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면서 까지도 선대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선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을 선대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의도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들의 영혼을 치유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경계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웃과 다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사소한 수치나 모욕을 당할 때 화내거나 복수심을 가지지 말고 대범하게 대처하는 그리스도의 자세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은 인간의 가장 원색적인 감정입니다. 심리학적으로는 마음을 사랑의 한 변형으로 이해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할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살인은 미움에서 온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기 때문에(마521,22) 선행의 결과가 상처로 오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함께 대립하여 맞서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을 미움으로 갚는 자, 선을 악으로 갚는 자,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 자들은 다 악마의 심성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들 보다도 한순간 한순간을 더 많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소외 자들을 살피면서 부름 받은 자로서의 우리의 역할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둘째로 남의 허물에 대하여 비판하지 말고 주어야 합니다.(37절)
본장 37절에서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남의 허물에 대해서 비판하지 말고 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만을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장점을 살피면서 높여 주고 격려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정죄할 권한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요, 우리에게는 죄를 범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마614,15)  형제의 눈에 들어 있는 티를 향하여 비난만 하지 말고 자기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들이 반란을 일으켜도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에 걸린 현대인들의 잘못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된 생활을 지적하면서 마 23:24에서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예화)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학자이고 지혜로운 스승으로 알려진 ‘힐렐’에게 젊은 제자가 찾아와서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율법의 핵심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힐렐은 한마디로 대답하기를 "너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게 하지 말라. 이것이 모든 율법의 전부이다. 나머지는 이 율법에 대한 해설에 불과한데 너는 가서 배운 대로 꼭 실천하도록 하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존대 받고 칭찬 받고 격려 받을 때 기뻐합니다. 그러나 비판이나 조롱을 받을 때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이루기 이해서나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이웃의 장점을 살피면서 격려하고 높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인간관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의 승패가 결정되어집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장, 단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는 다른 측면의 어떤 장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3. 어떤 자세로 주어야 합니까?
첫째로 자신에게 하는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9:19) 사람들은 자신에게 관계된 것에만 관심이 있고 그 의(義)에는 무관심한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봉사는 자신의 관심을 이웃에게까지 넓힐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둘째로 헌신하는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상대방이 자신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여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각오를 가지고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세로 실천한 사람이 있습니다. 롬 16:4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평신도 사역자인 아굴라 부부는 “자기 목이라도 내어 놓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주는 생활을 했습니다. 

셋째로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내 것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열등의식을 갖지 않도록 주어야 합니다. 내 자랑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받으면서 왠지 기분이 안 좋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받는 것도 잘 받아야 하지만 주는 잘 주어야 합니다. 아주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마치 자기의 것을 주는 것처럼 동냥하듯 주면서 안 됩니다. 

넷째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주는 것이므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함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는 주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치 아니할 때가 있습니다. 받는 사람이 마땅한 것을 받는 것처럼 받으면 그것 열이 조금 오릅니다. 그러기에 받는 사람도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무조건적으로 주어야 합니다. 주는 것에 대한 어떤 종류의 보답도 기대하지 말고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복된 방법입니다. 

4. 어떤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까?(도와 주어야 할 대상)
첫째로는 가장 긴급을 요하는 사람의 순서대로 주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는 정말 긴급을 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먼저 주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살리는 일에는 우선적으로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화) 지난 국민일보 8월 21일자 기사를 보니 김다비다 전도사님께서 평생을 복음 전파에 바치면서 헌신하였는데, 당뇨병와 패혈증으로 말미암아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등 고통을 겪고 있으나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당뇨로 인한 합병증로 인하여 패혈증세까지 왔고,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에 따라 김 전도사님은 국립의료원에서 오른쪽 다리를 허벅지 부분까지 절단했지만 병세가 워낙 악화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고 잠적, 수술비와 입원비를 마련하지 못해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딸이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지만 월급의 50%가 아버지의 부채 상환에 쓰이고 있어 생활조차 어려운 상황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먼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8월 25일자 국민일보를 보니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김 전도사님의 병원비로 써 달라고 500만원을 내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두 번째로는 내가 있는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부터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내 주변에 있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가장 잘 도울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을 나에게 붙여 주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내게 도움을 구하여 찾아오는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게 보내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 선지자가 온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게 도움을 구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든지 주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주는 삶을 살고, 직장에서도 주는 삶을 살고, 학교에서도 주는 마음으로 살고, 교회에서조차도 우리가 늘 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언제(whenever), 어디서나(wherever), 누구에게든지(whoever) 주고자 하는 마음이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의 삶은 그만큼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5. 주는 사람에게 어떤 복이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 주십니다.(38절 중)   
본문 38절 중반 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행이나 구제 등은 하늘나라 창고에 보화를 저축해 두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마 6:4,19,20) 우리가 자신을 위해 땅에 저금을 하면 그것은 결국 언젠가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이웃을 위해 구제와 선을 행하면 물 한 그릇의 선행도 잃지 않고 다 갚아주십니다.(마 10:42) 사람은 시간이 오래되면 다 잃어버립니다. 기억력이 점점 희미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결코 잊지 아니하십니다.(히 6:10) 그러기에 현재 여러분 중에 혹시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는 분이계시다면 그 일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깨닫고 계속해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아니 하십니다.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러기에 "내가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었는데 주어도 아무런 소용도 없더라! 인사도 안하더라! 감사의 말 한 마디 없더라!"고 하면서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수준이 그것 밖에 되지 아니하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심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갚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손이 크겠습니까? 하나님의 손이 크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손이 더 크시지요. 그러니 하나님이 보상해 주시고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것이 더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서 보상받지 못했다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 6:9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화) 19세기 중엽 미국에 존 록펠러(John Rockefeller 1839-1937)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장차 이 세계에서 제일 돈을 많이 번 갑부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철이 들면서부터 돈을 버는 일에 완전히 혈안이 되어 살았습니다.   그는 일찍이 유전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리해서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젊은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백만장자의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뒤 43세에, 그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기업군을 형성해서  세계에서 가장 큰 재벌 기업의 총수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뒤 53세에 그는 세계에서 단 한 명밖에 없는 억만 장자가 되었습니다. 정말 그의 소원대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돈 벌레처럼 돈을 버는 일에 동분서주했습니다. 그에게 돈은 많았지만 결코 풍요로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쓰러졌습니다.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머리카락이 다 빠져 버렸습니다. 잠을 자지 못해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가 하루에 먹는 것은 기껏해야 우유 한잔과 비스킷 몇 조각이 전부였습니다. 의사는 그를 진단해 보니 일년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그 동안 돈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원수도 많았습니다. 그가 죽기를 바랐던 사람이 그 만큼 많았습니다. 드디어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놓고서 한마디 한마디 깊이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결정적으로 자기의 삶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의 삶을 180도로 바꾸게 했던 구절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움켜쥘 줄만 알았지 풍요로운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심정으로 손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재산의 일부를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뜻있는 일에도 많은 금액을 희사 했습니다. 그는 돈을 기부해서 시카고 대학도 세웠습니다. 드디어 1931년에는 자선사업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 록 펠러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 뒤 그는 계속해서 뜻있는 일에 돈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그가 손을 펼치고 나니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마음에 평안히 찾아 왔습니다. 잃었던 잠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입맛도 돌아왔습니다. 건강도 서서히 회복되었습니다. 의사는 분명히 54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록 펠러는 98세까지 건강하게 장수했습니다. 일평생 동안 그가 자선사업에 희사한 돈이 5억 달러가 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다섯 아들을 통해서 수십억 달러가 자선사업을 위해서 쓰여 졌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무슨 모양으로든지, 누구를 통해서든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빚지고 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사르밧 과부처럼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후히 되어 누르고 넘치도록 주십니다.(38절 중) 
본문 38절 하반 절에서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우리에게 안겨주십니다. 
본문의 말씀은 곡물 시장에서의 매매 장면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를 후회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일반 곡물 시장에서는 되를 깎거나, 눈물을 속이거나, 분량을 줄이는 것이 상거래의 관습이었다면 하나님께서 마치 되에 곡물을 듬뿍 담고 그것을 꼭꼭 다져서 좋은 말로 주듯이 넘치도록 주십니다. 

① "후히 되어" 옛날에 쌀가게에 가면 쌀장사가 쌀을 어떻게 되어줍니까? 위를 싹 깎아서 제일 끝에 0.5cm정도 산 모양으로 만들어 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때 그렇게 주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후히 되어." 많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② "누르고"입니다. 꾹꾹 눌러서 조금이라도 더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③ "흔들어"입니다. 곡식과 곡식 사이에 빈틈이 하나도 없도록 하나님께서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④ "넘치도록 하여"입니다. 쌀을 되면서 양쪽에 떨어지는 것을 구애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절대로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조금이라도 더 주시려고 하십니다. ⑤ "안겨 주리라"입니다. 우리가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축복을 한 아름 우리의 품에 안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만큼 하나님의 손길은 풍성한 손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 풍성하신 손길로 우리 모두에게도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주는 일에 힘씀으로 이러한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비록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엘리야 선지자가 떡 한 조각을 요구했을 때에 는 비록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엘리야 선지자를 대접했을 때에 가뭄이 다하는 날까지 3년 6개월 동안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왕상 1716) 
벳새다 광야에 한 어린 아이가 자신의 한 끼를 주님께 아낌없이 바쳤을 때(요 6:9)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 두 광주리나 되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38절 하) 
본문 38절 하반 절에서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많이 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도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 6:7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됫박이 작으면 받는 됫박도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됫박이 크면 클수록 훨씬 더 큰 됫박으로 되돌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물질을 바치거나 우리 이웃들에게 도움을 줄 때, 이것저것 따지면서 헤아릴 필요가 없습니다. 헤아리지 말고, 따지지 말고, 정성을 다해서 도와주고, 또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더 큰 것으로 우리에게 보상해 주시니까요.(눅 12:33)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의 우리의 구제와 자선이야말로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누리는 확실하고 복된 영적 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화) 여러분 가운데 세계적인 암 전문의 원종수 권사의 간증을 들어보신 분이 계십니까? 원 권사님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가 서울에 올라와 어렵고 힘든 가운데 아르바이트를 해서 첫 월급을 받았습니다. 너무 기뻐서 대전에 계신 어머님의 내복을 한 벌 사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터미널에 내리는 순간 피골이 상접하고 냄새가 풍기는 걸인을 만났습니다. 애써 지나치려고 했지만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인을 모시고 집에 가서 목욕을 시켜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어렵게 마련해서 준비해간 새 내복을 노인에게 입혀드렸습니다. 속으로 몹시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한참 지난 후에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꿈속에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종수야. 네가 터미널에서 만난 그 걸인이 바로 나였단다." 그는 걸인을 대접한줄 알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의 복을 주셨습니다. 세계적인 암 전문의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도움을 베풀 때, 친절을 베풀 때, 사랑을 베풀 때, 또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베풀 때, 이것저것 헤아리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셔서 늘 주기를 기뻐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삶이 더욱더 풍요롭고 풍성해 지기를 바랍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