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일의 열광자 /디도서 2:14
 
 

흔히 ‘나무통 속의 철학자’로 알려진 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 B. C. 410-323)를 알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그는 일종의 궤변 철학자(?)로 많은 일화를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그 중에도 당시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대화는 유명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를 징벌하고 고린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그리스 정치가나 학자들, 고명한 인사(人士)들은 왕에게 인사(人事)를 하려고 알렉산더 대왕을 알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만나보기를 원했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오질 않았습니다. 참다못한 왕 자신이 직접 그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디오게네스는 양지바른 곳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대왕이 그에게 찾아갔는데도 그는 곁눈질 하나 주지 않고 태연하게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대왕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대왕 알렉산더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개(dog) 디오게네스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왕은 “너는 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디오게네스는 왕에게 반문하기를 “그대는 선한 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대왕은 “그렇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디오게네스는 “그렇다면 선한 자를 내가 왜 두려워하겠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왕이 “그대의 소원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디오게네스는 한 손을 쳐들어 대왕을 떠밀어내듯 하면서 “나를 비추고 있는 햇빛을 가리지 말아 달라.”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이때 왕의 신하들이 화가 나서 디오게네스에게 다가가자 대왕은 저들을 막으면서 감개무량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일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나는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되는 것을 원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러한 대화를 아주 높이 평가하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멋의 양식으로 삼으며 매력적 대화로 손꼽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1623년 6월 19일 프랑스 중부지방 끌레르몽에서 출생하여 1662년 8월 19일 39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저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 파스칼(Blaise Pascal)이 있습니다. 그는 12세 때 기하학의 원리를 증명하고, 16세 때 원추곡선론을 쓰고, 19세 때 계산기를 발명하고, 23세 때 고대자연학의 큰 오류를 타파하고, 그 후 전과학계를 연구한 천재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러나 파스칼의 파스칼 된 그의 이름은 기독교신앙을 변증하기 위하여 쓴 팡세(Pensees생각하는 것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온 세상 사람들의 명성을 한 몸에 받으면서 어느 사교파티에 참석했다가 만취 상태에서 마차를 몰고 귀가하던 중, 바퀴 하나가 세느강 다리에 부딪히는 바람에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 그는 유유히 흐르는 세느강을 바라보면서 ‘죽음과 영원’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죽음이 무엇이냐? 너의 천재성, 명성, 젊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그때부터 그는 영원을 바라보며 신음하고 고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밤에 은혜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날 밤의 체험을 ‘불의 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타고난 허약 때문에 두통과 복통, 두 다리의 마비 등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은혜체험 후에 그가 받은 여러 질병은 ‘은총으로 주시는 죽음의 연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에 ‘사람은 갈대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존재하는 전 우주는 사람을 생각할 수 없어도 사람은 우주를 생각하는 피조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는 그가 남긴 팡세 중에서, ‘이 세상에는 오직 세 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첫 번째 유는 하나님을 이미 찾고 그를 위해 사는 사람, 둘째 유는 아직 하나님을 찾지 못했지만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 셋째 유는 하나님을 찾지도 못하고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 종류 가운데 첫째 유의 사람은 멋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유의 사람은 불행하지만 도리에 맞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 유의 사람은 어리석고 불행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1662년 8월, 그 나이 39세로 임종을 맞으면서 “주여, 저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남기고 운명하였습니다. 

저는 설교 서론에 두 매력의 사람을 소개하였습니다. 철학자라고 하는 이름의 매력 그리고 생각하는 갈대의 매력을 말해보았습니다. 확실히 매력(kalov")이라는 성경의 단어는 눈의 시각과 관계하고 있는 멋과 맛, 아름다움, 우아함, 선함, 사랑스러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붙여진 여러 이름들 앞에 선(매력, 착함)이라고 하는 단어 칼로스(kalov")가 붙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Ⅰ. 예컨대 교회의 직분을 가리켜 ‘선한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1절에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선한 일’(kalou' e[rgou)은 매력적인 삶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 ‘감독의 직분’은 교회 장로의 직분을 의미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13절에는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아름다운 지위’(baqmon kalon)는 역시 사람을 이끄는 매력(이름)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장로직이나 집사직은 칼로스(kalov")해야만 한다는 내용입니다. 바로 그것은 세상을 교회로 이끄는 힘이 된다는 말입니다. 


Ⅱ. 그리스도인은 선한 군인으로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8절에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선한 싸움’(kalhn strateivan)은 아름다운 싸움, 멋진 싸움, 영전(靈戰)을 가리킵니다. 바로 디모데전서 6장 12절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마귀(정사와 권세)와 싸우는 싸움을 가리킵니다(엡 6:11~12).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선한 군인이 되어야 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딤후 2:3)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딤후 4:7)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좋은 군사’, ‘선한 싸움’은 모두 칼로스(kalov")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에서 기사적 기질과 용맹이 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깨어있는 의식(각성)과 행동을 보여줍니다. 조직과 질서와 규모있는 삶을 보여줍니다. 자기가 아닌 군사로 모집한 자를 위하여 싸우는 목적적 삶을 보여줍니다. 개인적 이기주의의 삶이 아닌 이타적 희생의 삶을 보여줍니다. 언제나 확신과 정열과 승리의 쾌감 속에서 약동하는 생명의 희열을 가지는 삶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러한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히 매력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사령관 그리스도의 명령에 살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죽는 일사각오의 충성심에서 사는 삶을 보여줍니다. 


Ⅲ.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6절에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선한 일꾼’(kalo" diavkono")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땀흘리는 노역이 있습니다. 주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기 감사가 있습니다. 일꾼이라는 이 헬라어는 ‘먼지 속을 통과하는 자’란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죽기까지 하는 충성과 희생의 봉사가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향한 미소짓는 감심적 봉사, 여유있는 후덕과 인내의 봉사, 결과를 가지고 주인을 기쁘게 하고야 마는 결과론적 열매의 봉사를 말합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는 성화적 봉사를 말합니다(벧후 1:5~7).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한 봉사를 말합니다(벧후 1:8). 바로 이러한 일꾼이 교회의 매력적 존재, 곧 선한 일꾼입니다. 


Ⅳ. 그리스도인은 선한 교훈을 받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6절 중에 또 말하기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선한 교훈’(th'" kalh'" didaskaliva")은 바로 구원의 복음, 믿음의 복음, 전파되어야 할 전도의 복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죄인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훈이 기쁜 소식, 곧 복음인 것입니다. 스티븐슨(R. L. Stevenson)은 그의 일기 속에 가장 특별한 사건이었던 것처럼 ‘오늘 교회에 갔으나 나는 풀이 죽지 않고 살아났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솨펠(C. G. Chappel)은 말하기를 ‘청중을 무기력한 사람으로 내좇아 버리는 설교를 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낙담시키는 설교는 사악한 설교이다. 낙담되는 사람은 재산이 아니고 부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던지는 교훈은 죄인을 구원에로, 절망인을 소망에로, 실패한 자를 재기의 길로 이끄는 부활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찾고자 하는 자는 그 누구도 그 무슨 이유로도 그리스도 앞에서 절망하며 낙망하고 돌아가지 않습니다. 바로 교회는 칼로스적인 교훈, 곧 구원의 복음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Ⅴ. 그리스도인은 선한 증거를 해야만 된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13절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선한 증거’(thn kalhn oJmologivan)는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나타낸 증거이고, 바울과 디모데도 이미 많은 경우에 많은 사람 앞에서 나타낸 증거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선한 고백’을 뜻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주가 됨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사람 앞에 던지는 그리스도인의 매력이요, 아름다움이요, 선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만이 가지는 자랑이요, 영예가 됩니다. 


Ⅵ.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이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선한 청지기’(kaloiv oijkonovmoi)는 ‘매력있는 집의 관리인’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아, 때를 따라 주인의 뜻을 따라 집안 식구들에게 나누어주는 멋(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매력은 ‘서로 봉사’함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디도서 2장 14절에는 ‘선한 목자’(o poimhvn o kalov")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선한 일에 열심하는’(xhlwthn kalw'n e{rgwn)이라는 말은 ‘선한 일에 대한 열광자’ 곧 선한 일에 미쳐버리는 자를 뜻합니다. ‘선한 목자의 희생’은 ‘선한 일에 미쳐버리는’ 그리스도인을 낳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선한 감독(장로)의 직분에 열광하는 자, 선한 군인으로서 선한 싸움에 열광하는 자, 선한 일꾼 됨에 열광하는 자, 선한 교훈에 열광하는 자, 선한 증거에 열광하는 자, 선한 청지기의 사명에 열광하는 자를 낳고 말았습니다. 이로 이것들이 교회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요, 멋이요, 매력입니다. 바로 복음 선교의 무기요, 수단이요, 교회부흥의 수단입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소유한 최선의 무기들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에 이끌림 받는 첩경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선한 일에 열광하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