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 바나바의 헌신”(행 11:22-26) 

오늘 직분자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착한 사람 바나바의 헌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바나바”를 말할 때에 앞에 붙는 수식어는 “착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특히 좋은 사람을 통해서 좋은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좋지 못한 사람이 주의 일을 하게 되면 교회의 발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며, 여러 성도의  믿음을 실족시키거나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지금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도 착한 사람입니다. 유능한 사람도 아니고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판단력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착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멸시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짓밟힘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할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믿음과 덕성이 좋은 훌륭한 성도를 택하여 중요한 직분을 맡기도록 노력해야 하며, 중책을 맡은 일꾼들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좋은 일꾼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교회와 성도들과 자신에게 유익하지 못하여 심각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나오지만 오늘은 착한 사람 바나바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바나바는 참으로 모범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인물의 전형이라고 평가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성도였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24절에서 그를 착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착한 사람”이란 여러 영어 역본들을 보면 “a good man”(좋은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KJV, NIV) 이로 볼 때 바나바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딤전 1:19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말씀처럼 바나바는 착한 양심을 갖고 계신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나 바울 사도는 전면에 나타난 위대한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삶에 관하여는 너무도 많이 들어서 익히 알고 있지만 바나바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을 했기 때문에 그의 위대한 업적이 가려져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인물의 숨은 삶을 조명하며 현대를 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반성하고 본받을 수 있다면 매우 값진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착한 사람 바나바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직분을 감담 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1. 착한 사람 바나바는 다른 사람을 권위(權威) 하는 일로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행 4:36) 
행 4:36에서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착한 사람 바나바는 권위자였습니다. 
바나바는 지중해 가운데 있는 작은 섬 구브로라는 섬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레위 족속에 속한 사람으로 그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한 사람이었는데 사도들이 그의 별명을 “바나바”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라바라는 말은 권위자 혹은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권위자”(勸慰子)란 말은 권면하고 위로하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역본에는 “the son of consolation"곧 위로 혹은 위안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또 어떤 성경은 “the son of encouragement" 곧 격려 혹은 장려의 아들이란 뜻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나바는 위로와 격려와 권면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위로한다는 말은 슬픔을 당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낙심된 사람을 격려하여 주고,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더 일을 잘하도록 칭찬하여 주는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사람의 말로 위로하는 길이 있고, 사람의 행위로 위로하는 길이 있습니다. 살전4:18에 보면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말에는 창조적인 힘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에 큰 위로와 힘을 주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의 기를 살리기도 하고 기를 죽이기도 합니다. 남을 비난하는 말을 힘쓰는 사람이 있고,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힘쓰는 자도 있습니다. 말에 독이 있는 사람이 있고, 말에 약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말로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위로자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행위로서 위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전16:15 이하에 보면 스데바나의 집에서 물질로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4:32 이하에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성도들 사이에 물질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여 준 기록이 있습니다. 바나바는 바로 물질로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이런 위로자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교회에서는 일 처리에 유능한 인물도 필요하지만 자상한 어머니가 자녀를 돌보듯이 성도들을 잘 살피고 때에 맞는 위로나 격려나 사랑의 권면을 잘 하여 성도의 믿음을 세워주는 인물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러한 분들이 많이 있어야 교회는 편안하고 행복한 교회가 되어 흥왕하게 됩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 되는 사람들이나 오래된 성도들은 이와 같은 덕성을 갖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재능은 있는데 이러한 덕성이 결여되었을 때 재능은 오히려 많은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어 믿음을 실족케 할 우려가 많습니다. 바나바는 이러한 의미에서 초대교회에서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훌륭히 해낸 모범적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착한 바나바처럼 위로와 격려와 사랑의 권면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상대의 약점이나 실수를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과 실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많은 문제들이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실수 혹은 잘못을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하거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이해해주지 못하고 보고 들은 대로 판단하여 정죄하고 비난하며 억지로 교정하려는 데서 발생합니다. 
 이러한 방법은 설혹 문제 해결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상호간의 믿음,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화목에 훼손되어 더 큰 상처를 가져다주고 교회의 화합과 단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약점을 서로 담당하면서 이해해주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4:1과 15:1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문제를 최소화해서 교회의 화합과 단결을 이루어 교회가 건실히 발전할 수 있는 길이 됩니다. 

둘째로 체휼해 주어야 합니다.
히 4:15과 벧전 3:8에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체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체휼이란 말의 원문의 뜻은 "함께 고통을 당하다"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의 고통, 실수, 잘못 등을 체험적으로 느끼며 이해해주는 자비롭고 따뜻한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을 때 상대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권면 할 수 있는 것이 그렇지 않고 바리새인들처럼 상대의 잘못 실수 약점 등을 송곳으로 후비듯이 파헤치고 비난해서는 결코 위로나 권면이 되지 않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고난을 당한 욥을 위로하러 멀리서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욥을 위로한다는 위로가 오히려 욥에게 더 큰 심적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들은 욥이 그러한 큰 고난을 당한 것이 배후에 숨겨진 어떤 죄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욥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욥은 그들이 생각하는 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잘못된 사상과 오해로 인하여 의로운 욥을 천하의 불의한 자로 몰아붙여 회개를 강요한 것입니다. 곧 그들은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위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괴롭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그들을 가리켜 [쓸데없는 의원],[번뇌케 하는 안위자]라 했던 것입니다.(욥13:4,16:1)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셨습니다.(요11:35) 성난 군중의 야유와 죽이기를 요구하는 살기등등한 상황 속에서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동정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요8:1-11) 이러한 예수님의 체휼하심 때문에 성도는 죄에서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날마다 그의 용서하심을 받고 살게 되었으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 4:16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감싸 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 실수, 고통 등을 이해하고 체휼 했다면 당연히 그것을 감싸주고 안아주어야 합니다. 바나바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에 동행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전도여행이라는 중대한 일에 동참했으나 중도에 포기함으로써 심각한 잘못을 했던 것입니다.(행13:13) 1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을 준비했습니다. 

그때 바나바는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고 주장했고 바울은 마가의 동참을 적극 반대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큰 다툼이 일어나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나뉘어 전도여행을 떠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옳은가 바나바가 옳은가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도 주의 일을 위한 깊은 뜻이 있었고 바나바도 역시 주를 위한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착한 사람 바나바는 마가의 중대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의 잘못을 감싸주어 성업에 기꺼이 동참하도록 배려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마가는 그의 실수를 훌륭히 극복하여 초대교회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한 때 실수 했던 마가를 다시 데리고 그를 인정하여 함께 선교의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만일 이 때 바울의 생각대로 마가를 완전히 버렸다고 하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와 같은 인물은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바울도 마가를 인정하게 되었고, 바울은 마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했습니다. 바울은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나의 동역자 마가”,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고 했습니다.(딤후4:11, 몬1:24, 골4:10) 그리고 마가는 예수님의 일생을 최초로 기록한 마가복음을 쓴 위대한 저술가가 되었습니다. 비록 잘못을 한 마가였지만 그가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되도록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마가의 위대해짐과 더불어 바나바의 업적도 위대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잠 19:11 하반 절에서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착한 사람 바나바는 물질로 크게 봉사하며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행 4:37)
행 4:37에서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착한 사람 바나바는 물질로 크게 봉사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린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밭이 있으매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재정 사용의 결정을 사도들이 했고 그 집행을 집사들이 했습니다. 재정 사용의 결정을 목회자가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헌물은 거룩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와 초대교회 성도들이 재물을 바치되 그 재물 사용의 권한을 자기 손에 두지 않고 사도들의 손에 두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재물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면서 자기의 뜻에 따라 사용하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바나바는 재물에 대한 소유권도 포기했고 사용권도 포기했습니다. 모두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바나바는 재물과 관련하여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나바는 자기의 귀한 재산인 밭을 팔아 교회를 위하여 기꺼이 연보하였습니다. 재산을 팔아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가 재산을 팔아 바친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헛된 명예심(名譽心)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감격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데서 나온 순순한 신앙적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행5:1-11) 

초대교회가 그렇게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아낌없이 바쳤기 때문입니다. 교회 발전의 3대 요소는 성령의 인도, 인재, 재물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위해서는 모든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은사를 잘 발굴하여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발전과 전도에 부족함이 없도록 성도들이 연보하는데 좀 더 정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연보를 잘 할 수 있는 것도 훌륭한 은사입니다. 이러한 은사 있는 성도가 교회에 많아질 때 교회가 원만하게 운영될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바나바는 교회의 훌륭한 모범이 되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연보는 귀한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을 동반하는 은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바친 연보의 그릇으로 반드시 후하게 보답을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눅 6:38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이러한 연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 지라 에바브로디도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8-19)고 말씀하시면서 연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반드시 풍성하게 다시 채워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처럼 물질로 크게 봉사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 교회는 부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릴 때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많이 받게 됩니다. 물질적인 축복과 영적인 축복을 아울러 받게 됩니다. 

3. 착한 사람 바나바는 화목의 사람이었습니다.(행 9:26-27)
행9:26-27에 있는 말씀을 보면 바나바가 화목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의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가서 아나니아라는 선지자에게 기도를 받는 동안 눈에 있던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는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을 만자고자 하였지만 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던 자인 줄 아는 사도들은 그를 만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자 예수 믿게 된 것을 믿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때 바나바는 바울이 거듭나 새 사람이 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바울의 새사람이 된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말해줌으로서 바울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만 하고 다른 사람과 친밀하게 협력할 수 없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 사람들의 의심과 비판을 받았을 때 바나바는 사울을 적극적으로 변호했습니다.(행 9:26-27) 

만약 어떤 사람이 의심과 비판을 받을 때 그를 변호하기는커녕 함께 덩달아 비판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내 세우고 그리고 그 사람과 협력할 줄 아는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자기보다 유능한 사울을 그리고 허물 많은 과거가 있는 사울을 귀하게 여겼고 앞에 내 세웠고 그리고 함께 협력했던 참으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는 안디옥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면서 그 사람들을 돌볼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파송하였습니다.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바나바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자 교회는 더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자기보다 능력이 많은 유능한 일군이 생각났습니다. 그가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본문 25-26절에 보면 "바나바가 사울울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거듭난 사울을 믿지 않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 바나바는 그를 인정하고 사도들에게 소개하여 줄 뿐 아니라 자기와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그를 불러 함께 일했습니다. 바울은 어떤 점에서 성격이 좀 과격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불러다가 함께 일년간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처럼 화목의 사람 바나바는 사람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넓은 마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화목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착한 사람 바나바는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 헌신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행 11:25-26)
본문 11:25-26에서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나바는 교회에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 헌신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내 세우고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지역인 안디옥에 믿는 사람들이 생기자 예루살렘에서 바나바를 파송하여 목회를 하도록 했습니다. 바나바의 훌륭한 목회로 안디옥 교회가 많은 부흥을 하게 되었습니다.(행11:24) 그렇게 되자 바나바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거의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바울을 몸소 찾아가 안디옥에 데려와 협력 사역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나바는 바울 사도의 탁월한 은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사심 없이 바울을 자기의 동역자로 삼고 바울의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교회 성장과 전도를 위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한 바울 사도가 회심했을 때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의심하여 만나려 하지 않았지만 바나바는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하여 교제하게 했던 적도 있습니다.(행9:26-27)

뿐만 아니라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이방에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행13:1-3) 바나바는 신앙의 경륜 면에서 바울보다 훨씬 오래된 선배이며 예루살렘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이러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바울 사도의 재능을 인정하여 이방 선교의 주도권을 그에게 넘기고 조력자로서 기꺼이 협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그의 순순한 열정 때문에 자신의 권리나 위치를 주장하지 않고 포기할 수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러한 지도자들이 있는 교회는 화목이 넘치고 사랑이 넘칠 수 있습니다. 
교회 발전에서 협력 혹은 협동은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협력 혹은 협동의 결과로 짧은 시간에 엄청난 발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행 1:14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행 2:46-47에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행 4:32에서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교회가 초대교회처럼 부흥될 가능성이 있는 교회임을 믿습니다. 구원의 진리에서 뿐만 아니라 믿음생활에서도 초대교회처럼 끊임없이 노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교회발전, 전도, 하나님께 영광을 목표로 나를 죽이고 희생하며 기꺼이 협력하여 우리의 공동목표를 달성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5. 착한 사람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헌신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행 11:24)
본문 24절에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착한 사람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헌신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과 성령 충만은 모든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공통 조건입니다. 특히 지도자들이 더욱 추구해야 할 중요한 덕목입니다. 주님의 일은 단지 그 사람의 능력이나 덕성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인간적 능력이나 덕성도 중요하지만 믿음과 성령 충만은 더욱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들이 구비될 때 인간적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나바처럼 먼저 믿음과 성령 충만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일곱 집사를 뽑을 때에도 그 조건으로 믿음과 성령 충만을 보았습니다.(행6:5)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성도들이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통하여 주권적으로 일하시므로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바나바의 사역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첫째,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롬 10:17)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성도의 생각과 인격을 변화시키십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은 정상적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듣고 연구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할 것입니다.(행17:11-12)

둘째, 기도에 열심이어야 한다(행 4:31)
기도는 말씀을 통하여 얻어진 지식적 믿음을 체험적 믿음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지식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이는 능력 있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와 체험적 믿음을 얻게 될 때 그 믿음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생활을 통하여 더 큰 믿음과 성령 충만을 갖게 될 때 주님께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될 것입니다.
 
셋째, 자기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행 16:6-10)
행 13:2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나바는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이방의 선교사로 파송하라고 말씀했을 때 즉시 순종하며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또한 행 16:6-10에서 의하면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성령이 허락하지 아니하여 성령의 지시를 따라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마게도니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충만함을 지속적으로 누리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자신의 뜻과 고집을 버리고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 때문에 초대교회에 영향력을 미친 결과는 대단하였습니다. 
(예화) 일본 동경 지하철 역에서 술에 만취하여 선로에 뛰어든 어떤 일본 사람을 구해내고 스스로 목숨을 잃은 이수현 씨를 가리켜 일본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이요 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지금도 이수현 씨를 추모하며 기리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지금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도 착한 사람입니다. 유능한 사람도 아니고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판단력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착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멸시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짓밟힘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할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착한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착한 사람 바나바처럼 ① 다른 사람을 권위(權威) 하는 일로 헌신하고 ② 물질로 크게 봉사하며 헌신하고 ③ 화복의 사람이었고 ④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 헌신하고 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이 민족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