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으로 가득 찬 룻기"
                                                 룻기 4:13-17

[성경본문]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찌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한글 개역). 


[설교전문]

룻의 이야기는 가치체계를 뒤집어 없는 이야기입니다. 룻의 이야기가 들려지게 된 시대는 바벨론에서의 포로기가 끝난 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일에 대해 매우 좋지 못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유대인 남성이 외국 여성과 결혼하고, 유대인 여성이 외국 남성과 결혼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방인이나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금지하고 있었지만, 결혼 당사자가 모압 사람일 경우는 더욱 심하였습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모압 인은 하나라도 야웨의 회중(會衆)의 일원으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십대 자손에 이르기까지라도 야웨의 회중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왜 안 된다는 것일까?  
왜 신명기는 모압 사람들을 그렇게 심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일까? 역사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날 때 모압인들은 비정하게도 
    그들에게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모압인들은 발람이란 예언자를 고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신 23:4-5)

만일 여러분이라도 그런 박대와 멸시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사막의 뜨거운 용광로를 지나면서 배고프고 목말라 기진맥진할 때 누군가 여러분을 저주하고 욕설을 퍼붓는다면, 그것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그들에게 이방인들과의 결혼은 모두 금지되었으며 특별히 모압인들과의 결혼은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자,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압 여자인 룻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한단 말입니까?
  ·룻이라는 여인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법들에 따라 게임을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룻이라는 여인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야기의 문법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복잡한 문법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룻의 이야기가 전개되어감에 따라, 여러분들은 이 모압 여인을 사랑하지 않은 수 없게 됩니다. 그녀의 성품을 기억해 보십시오.
  ·유대인 시어머니에 대한 그녀의 극진한 신실함을 기억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그녀의 지극한 헌신을 기억해 보십시오. 
바로 이런 것들이야말로 한 유대인 남성이 한 여인 안에서 발견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한 유대인 남성이 한 여인 안에서 발견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 그 자체였습니다.

룻기는 마음 깊이 깔려있는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에 대한 일종의 일격(一擊)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격을 가하는 도구는 
  ·설교를 통해서도, 
  ·혹평을 통해서도, 
  ·징벌을 통해서도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편견에 대한 일격은 단순히 어느 유대인 치고 자신의 영혼에 고통을 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저주할 수 없는 '이야기', 즉 한 모압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가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룻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각 유대인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서 모압인은 제외시키는 것이 옳은가?
  ·우리가 그렇듯이 하나님도 모압인 여인을 참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정해놓은 규칙들에 의해 움직이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자, 룻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지 십년 즈음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기근, 가난, 이주, 한 가족 안의 세 명의 남자들의 죽음, 남겨진 세 명의 과부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재앙의 연속이었습니다. 룻기에 들어선 지 겨우 다섯 절 안에 세 명의 여인들은 이미 각자의 남편들을 이국 땅에 묻었습니다. 특별히 그 당시의 사회적 정황으로 볼 때 이것은 감당키 어려운 비애(悲哀)였습니다.
 
한 남편의 죽음 뒤에는 불쌍한 한 여인이 보호받지 못한 채로 남겨져 있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남편의 죽음이란 남겨진 여인으로부터 모든 사회적 보호장치를 다 떼어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남편의 죽음은 곧 
  ·정체성의 상실이며, 
  ·인간적 권리의 상실이며, 
  ·사법적 정의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독자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자연스런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오미가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오르바가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룻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누가 그들을 향하여 보호의 날개를 펼칠 것인가?
  ·어디로부터 그들의 도움이 올 것인가?

그러므로, 이야기의 결론 부분을 주의 깊게 들어보십시오: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이야기의 끝 부분에 이르면, 룻은 보아스의 보호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결혼하여 다윗 왕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조상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룻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놀라운 은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관장하시는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통제하시는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때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행하시는 
    '예측치 못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압 여인인 룻을 자신의 구원 계획 속에 포함시키시고, 심지어 예수의 
    족보에까지 올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들어보십시오! 룻기가 우리에게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보잘것없고 중요치 않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 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 각자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룻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모압 여인으로서 그녀는 하나님의 계획과 디자인 바깥에 내버려져 있는 것으로 끝이 날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의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 혹은 교회로부터 점점 떠나버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커다란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출애굽의 이야기
  ·예수의 십자가 달리심과 부활의 이야기.
그들은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야. 그것은 진짜 이야기야"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궁금해하는 점이 있다면, "그 이야기가 나에게도 사실인가?"
그들이 알기를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 이야기 어느 곳에 맞는가?"

룻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커다란 이야기의 주변에 서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바깥에서, 즉 모압 땅에서 시작합니다.
  ·이 야이기는 나오미와 룻의 고난과 함께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고난과 고통들을 아름다운 직조물(織造物)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끝 부분에 이르게 되면 여러분은 앞서 일어났던 고통들을
    대부분 잊게 될 것입니다.

이야기의 끝 부분에 이르면 비로소 모든 것의 총체적인 의미가 뚜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한 부분 한 부분들이 서로 짝을 이루며 커다란 그림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개의 이야기들]

우리 각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개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거룩한 역사를 모두 포괄하는 '긴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마침내 모든 것들을 ―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들 모두를 ― 다 연합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한 '짧은 이야기들'이 필요합니다. 즉 우리에게 좌우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장소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 우리도 그 '긴 이야기' 속에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짧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룻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주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긴 이야기 속으로 나의 길을 찾아가는 것에 관해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전혀 기대하거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긴 이야기 속으로 자신들의 길들을 찾아가고 있는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경고의 이야기]

룻의 이야기는 사람을 고정관념으로 바라보지 말 것을 경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
"국외자,"
"이방인,"
"변두리 사람,"
"문제 거리 사람,"
"골칫거리 사람,"
"겉도는 사람" 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이 이야기는 룻기의 저자가 그 당시 사람들을 바라보던 방식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람들을 쳐다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전 세계적 구원의 드라마에 
    한 막에 등장하는 중요 등장 인물로 바라보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힘]

  ·이야기들은 놀라운 일들을 합니다. 이야기들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인도합니다.
  ·이야기들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삶을 의미로 가득 찬 삶으로 관을 
    씌웁니다.
  ·이야기들은 무명의 사람들의 삶을 의미로 채웁니다.
  ·이야기들은 매력적이지 못한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씌워줍니다.
  ·이야기들은 사람들을 무명의 군중들 가운데서 들어내어 모든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높입니다.

룻의 이야기는 말합니다:
  ·룻을 바라보라! 그녀를 자세히 쳐다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녀의 삶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시고 계신가를 쳐다보십시오!
  ·마치 암탉이 알을 품듯이, 하나님께서 그녀의 삶을 품어 그것을 어떻게 
    새로운 창조물로 만드셨는지를 쳐다보십시오.

룻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 믿음이 적은 자들이여! 하나님께서 모압 여인 룻에게 그렇게 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위해 그렇게 못하실 이유라도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강하게 질타합니다.

룻기 2:2-3을 들어보십시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찌어다 하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은 보아스에 밭으로 가라는 하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보아스의 밭으로 가보라는 환상을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우연히' 그 밭에 가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우연히 가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룻이 남편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나오미의 기도에 응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룻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타합니다:
"오 믿음이 적은 자들이여! 만일 하나님께서 룻의 삶의 세부적인 일에서도 그녀를 인도하였더라면, 어찌하여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의 세부적인 일에도 여러분을 인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각 사람마다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각자의 '길들'을 찾아야할 것입니다. 어느 두 길도 동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부분 가장 예기치 않은 각도에서 그 안으로(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오미와 하나님의 이야기]

나오미는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평생 잊지 못하는 비극적 사건이었습니다. "나를 더 이상 '즐거움'(나오미)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나를 '괴로운 여자'(마라)라 불러주십시오. 전능자가 나를 심하게 다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오미의 고통과 쓰라림, 괴로움을 모아 그분의 이야기 속으로 뜨개질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배경을 만들어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잘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동네 여인들이(룻이 남자아이를 출산한 후에) 외치기를, "아들이 나오미에게 태어났다!"(룻 4:17)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은 나오미의 삶의 쓰라림을 뒤바꿉니다.

동네 여인들이 "아들이 룻에게 태어났다!"라고 외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외치기를,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한 것입니다.

동네 여인들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 나오미의 한 많은 쓰라림은 다 풀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오미는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룻과 하나님의 이야기]

그렇다면 룻은 어떻게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습니까?
  ·전통과 인습에 과감히 도전하고 저항함으로써,
  ·나오미의 구체적인 지시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이야기의 끝 무렵에 이르면 나오미는 자신의 죽은 남편인 엘리멜렉의 친척들 중 부유하고 착한 총각 농부인 보아스, 그리고 시형제 결혼 제도에 따르면 룻의 안녕에 대해 책임이 있는 보아스란 사람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관해 가르쳐줍니다.  

시형제 법에 따르면, 만일 어떤 여자가 과부가 되면 그녀의 남편의 가족원들은 그 가문의 지속을 위하여 그녀를 위해 새 남편을 얻어 주어야합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의 친족중의 하나였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만일 그들이 그들의 카드를 올바르게 사용만 한다면, 보아스가 룻을 불쌍히 여겨서 그녀와 결혼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오미와 룻은 가난과 빈곤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나오미는 룻에게 다음과 같이 코치합니다. (3:2-4)

네가 함께 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워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룻은 그녀의 시어머니가 말해주는 것들 중 마지막 지시사항만을 빼놓고 다 그대로 행동했습니다. 마지막 지시사항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룻은 보아스가 자기에게 할 일을 고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대신에 그녀는 먼저 이니셔티브를 잡고 보아스에게 그가 그녀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을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녀가 보아스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가까운 친척입니다. 따라서 당신은 나를 돌보아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발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물론 그 말을 들은 보아스는 그대로 했습니다.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룻은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즉 나오미의 지시한 각본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룻은 예수의 조상 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룻이여! 당신은 참으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중의 복된 자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태의 열매이신 예수도 복된 분입니다.

룻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신약성경에 다시 이야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 첫 번째 장에, 그것도 예수의 족보가운데 그녀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유별나게 그녀의 이름이 호적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창녀로 변장하여 자신의 시아버지 유다를 속였던 가나안 여인 
    다말과 함께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첩자들을 숨겨준 가나안의 창녀 라합과 함께 말입니다.
  ·다윗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던 밧세바와 함께 말입니다.

룻, 다말, 라합 그리고 밧세바, 바로 이러한 네 여인들에 대한 성경의 언급과 기록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하나님은 끊어진 끈들과 버려진 실들을 주워서 자신의 구원 이야기 속으로 
    아름다운 직조물을 만들어 가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좋은 소식'(福音)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