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시 23 : 1 - 6 

신학교 시절 같은 반 동료와 함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부잣집 딸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자기는 ‘가난한 집 딸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돈을 밝히는 속물 신학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가 왜 부잣집 딸과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잘 알고 있지만 무조건 가난한 집 딸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역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부잣집 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도 있지만 반대로 가난한 집 딸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문제점들도 만만치 않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점으로 그때 그 친구가 이야기해 준 것들은 대개 부정적이고 공격적일 수 있어서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결혼의 조건을 바꾸었습니다. 그날 이후 제 결혼의 조건은 ‘부자이지만 부자 티가 나지 않는 여자와 가난하지만 가난의 티가 없는 여자’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가난하지만 가난의 티가 없는 여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제가 염려하였던 것은 부자의 티였습니다. 부자의 티는 참 사람을 힘들게 하고 역겹게 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가난의 티를 벗지 못한 사람들도 사람을 참 피곤하게 하고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과 부함은 그 자체로서 어떠한 조건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날 이후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정식으로 교제하기 이전에 편지 한통을 받았습니다. 어떤 남자와 선을 보기로 하였다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그때 저는 직감적으로 ‘아 이 여자가 나에게 관심이 있구나’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 후 또 편지가 왔습니다. 선을 보았는데 남자가 너무 부자여서 만나지 않기로 하였다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저는 그 남자와 만나지 않기로 하였다는 말에 기뻤으면서도 짐짓 표현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부자이기 때문에 만나지 않겠다는 것은 가난하기 때문에 만나지 않겠다는 것과 똑같이 잘못된 것이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습니다. 

저는 좋은 친구와의 대화로 가난함과 부함에 대한 나름대로의 바른 생각을 청년 때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가난함과 부함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을 그냥 무조건 가난한 사람이냐 부한 사람이냐를 놓고 함부로 재단하고 판단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자는 무조건 가난한 자를 우습게 여기려하고 가난한 사람을 무조건 부한 사람을 돈만 아는 악한 사람으로 치부하려고 하는 성숙하지 못한 생각들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안정되지 못하고 혼란 속에 있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다 못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하지만 참으로 잘사는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하다고 다 잘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부하지만 못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이라고 다 잘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물질적으로도 가난하고 정신적으로도 가난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난하기도 하고 못살기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부한 사람이라고 다 악한 사람도 못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부하면서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을 무조건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리배 취급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잘못 된 부자티를 벗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강하고 부하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함부로 교만해져서 가난하고 약하고 낮은 사람들을 깔보고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바로 잘못 된 부자티를 벗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세상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낮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고 씻을 수 없는 한을 쌓게 하여 세상을 억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한 세상으로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잘못된 가난의 티를 벗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과 시기로 가득 차 매사 부정적이고 공격적이며 삐뚤어지고 모난 성격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부자 티와 가난한 티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부자 티를 벗지 못한 부한 사람들의 행동이 가난한 자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가난한 티를 벗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의 성숙하지 못한 행동들이 부한 자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러면서 점점 부자 티를 내는 성숙치 못한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의 부정적인 티를 내는 가난한 사람들을 늘어나게 합니다. 세상은 그와 같은 악순환 속에서 점점 더 갈등 속에 나빠져 가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아주 근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한 마디로 부하지만 부한 티가 없는 사람, 가난하지만 가난의 티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하지만 부한 티가 없는 사람이란, 강하고 부하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입니다. 늘 가난하고 약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자주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은 저희 아버지는 학교 수위이셨습니다. 학교 수위는 학교 선생님들에 비하여 가난하고 약하고 낮은 지위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단지 자기는 선생이고 우리 아버지는 수위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를 깔보고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님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수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버지와 정말 좋은 친구로 지내주신 선생님들이 몇 분 계셨습니다. 일과 후 아버지와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스스럼없이 농담하고 웃으시던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별것 아닌 일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저는 지금까지 그와 같은 선생님들이 정말 훌륭한 선생님들이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와 같은 선생님 못지않게 좋아하고 근사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가난하고 약하고 낮은 자리에 계시는 분 이셨지만 언제나 비굴하지 아니하고 당당하셨습니다. 한번도 자신이 수위라고 기가 죽어 보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저는 선생 티 안내는 선생님들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전혀 수위 티가 안 나는 우리 아버지도 참 좋았습니다. 

저는 선생이라고 기고만장하여 수위 우습게 보는 건방진 선생님들이 싫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기가 팍 죽어서 앞에서는 비굴하고 뒤에서는 용감한 수위들도 싫었습니다. 

살다보면 수위로 살 때도 있고 선생으로 살 때도 있습니다. 수위로 사느냐 선생으로 사느냐도 물론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생과 어떤 수위로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별것도 아닌 선생 티를 팍팍 내면서 수위의 마음에 한과 상처를 주는 선생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수위와 스스럼없이 소주잔 주고받으며 수위와 좋은 친구하는 선생으로 살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수위라고 기가 팍 죽어서 선생 앞에서는 비굴하게 꼬리를 내리고 뒤에서는 온갖 잡소리를 다해가며 저들을 저주하는 수위로 살 것인가 아니면 수위이지만 전혀 기죽지 아니하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사는 수위로 살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건방진 선생들이 세상을 나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기죽고 당당하지 못한 수위들도 똑같이 세상을 나쁘게 만듭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다 선생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도 있어야하고 수위도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좋은 세상이 되려면 선생 티 안내는 좋은 선생과 수위 티 안 나는 좋은 수위가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다 선생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왕이면 선생이 되는 것이 저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 좋은 수위가 되는 것도 이 세상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편이 좋습니다. 시편 중에도 특히 다윗의 시편이 좋습니다. 시편을 공부할 때 중요한 용어 중의 하나는 ‘삶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 시편을 쓴 기자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 그와 같은 시를 썼느냐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형편과 처지를 삶의 자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인 시편 23편의 삶의 자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양과 같은 연약함’입니다. 그것은 시편 23편뿐만 아니라 다윗의 거의 모든 시편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그와 같은 형편과 처지에서 시편을 기록하였고 실제로 다윗의 삶을 살펴보면 고난과 역경과 환난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리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어려움을 뼈저리게 인정하고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리지만 중요한 것은 한번도 기죽은 다윗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에서도 그와 같은 표현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시는 도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로다. 
하나님께서 원수 앞에서 상을 베푸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실 것이로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저는 다윗의 이와 같은 표현들이 너무 좋습니다. 저는 다윗의 이와 같은 삶의 자세가 너무 좋습니다. 저는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도 좋지만 이와 같은 시편을 쓸 때의 다윗이 너무 좋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다윗의 모습을 ‘기죽지 않고 당당함’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저는 부자의 교만하지 않고 거만하지 않음도 좋아하지만 가난한 자의 기죽지 않고 당당함도 좋아합니다. 그 둘은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는 아주 완벽한 아름다움과 훌륭함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윗의 기죽지 않고 당당함을 신약의 바울에게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 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 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8-12) 

이 본문의 ‘삶의 자리’도 시편 23편과 마찬가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 
답답한 일을 당함. 
핍박을 받음. 
거꾸러뜨림을 당함. 
죽음에 넘기 움. 
이와 같은 것들이 본문의 삶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 속에는 기죽지 않은 당당함이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날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져 있으면서도 기죽지 아니하고,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당당한 까닭은 무엇일까? 도대체 어디서 그 힘이 오는 것일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기죽지 않고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까지 받아도 까딱하지 아니하고 당당할 수 있었던 까닭도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답을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보배가 있었기에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세상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처지를 절망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기죽지 않고 세상과 역경에 대하여 큰 소리 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강하고 부한 자들을 교만하게 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기죽고 비굴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강하고 부한 자들을 겸손하고 따뜻하게 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저는 믿습니다. 

살다보면 가난해 질 수 있습니다. 약해 질 수도 있습니다. 낮아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해도 부하게, 약해도 강하게, 낮아도 높게 사는 축복을 주십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낮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기죽지 않고 당당할 뿐만 아니라 세상과 사람들을 밝고 긍정적으로 보며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저주 대신 오히려 세상과 사람들을 축복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강하고 부하고 높은 사람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들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진정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을 갖게 됨으로 겸손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 세상과 사람들을 축복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 된 자들이 많이 출석하실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 때문에 별것 아닌 세상의 것에 대하여 기죽지 아니하고 당당하며, 밝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축복하며 노래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다시 한번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사고를 생각합니다. 혼자 죽기는 억울하다며 그 끔찍한 사고를 일으킨 사람이 예수를 믿었더라면, 예수님 때문에 가난하고 약하고 낮지만 기죽지 아니하고 당당하고 밝게 살 수 있었더라면 그와 같은 사고는 없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이 세상과 사람들의 상처와 한을 풀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임을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기 이전에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먼저 정말 예수를 믿고 사십시다. 예수를 믿음으로 부자가 되어도 좋지 못한 부자 티 나지 아니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어도 부정적이고 좋지 못한 가난한 티 나지 않는 그런 삶을 사십시다. 

돈 때문에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때문에 잘 사는 사람이 되고, 가난 때문에 기죽고 못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때문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고 당당하고 근사하게 잘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