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들의 성경해석 원리와 적용 
 
  
서창원  
 

1. 이끄는 말

청교도주의 (Puitanism)는 잉글랜드의 정치적인 격변기에 순수한 신앙운동으로 이어진 성경운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상‘신·구약 성경 밖에서 찾아지는 가장 성경적인 사람들’을 배출시킨 그 원동력은 그들이 붙든 성경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이 세상이 소유한 가장 고귀한 자산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경건심은 곧 성경을 향한 경건성을 의미하였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곧 성경에 순종하는 것을 뜻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인간의 이성, 교회의 전통, 또는 신비적인 체험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신적 권위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큰 모독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무지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가장 큰 존경을 표하는 진실한 행동은 성경을 귀하게 여기고,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며, 그 말씀대로 살며, 성경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매일 성경읽기와 성경강해 사역에 열중하였던 것이다. 청교도주의의 보증 수표는 패커(J.I.Parker) 박사의 지적처럼“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극렬히 사랑하고 존귀히 여기며, 이 성경을 더 알며, 성경에 기술된 대로 행하려는 헌신적인 관심”(The Puritans as interpreters of Scripture, in A GODLY HERITAGE, 1958 Puritan Conference Papers, p. 19)이었다.

본 글은 패커 박사의 논문과 월리암 퍼킨즈(1558∼1602)의「The Art of Prophecyings」를 중심으로 청교도의 성경해석의 원리와 방법 및 적용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월리암 퍼킨즈 목사는 17세기 청교도주의 형성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영향을 준 인물들 중 한 사람으로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사역을 가장 중시한 청교도들의 설교 원리학이라 불리울 수 있는「The Art of prophecyings」를 라틴어로 1592년에 출판하였다. 이 책은 1617년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Ⅱ. 청교도의 성경관

소요리문답 2번의 답변을 보면“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할 것인지를 지도하는 유일한 법칙”이라고 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 이“하나님의 직접적인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써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다”라고 하였다.  

청교도들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존 오웬(1616∼1683) 목사는 성경을‘전체로서의 하나님의 교통행위’(The communicative action of God as a whole)로 보았다. 즉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 자신을 죄인들에게 알리시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결국 청교도들은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되 기록된 말씀에서 하시며, 우리 인간은 기록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범위 안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요리문답3번의 질문과 답변의 요지인 것이다. 즉,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믿을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 무엇인가 함이다. 이것을 오웬 목사는‘하나님의 교통행위’또는‘의사전달 행위’로 말한 것이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발언(the utterance of God)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글로 전개된 것이요, 인간의 교육을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글로 펼쳐진 것이며, 하나님의 생각들이 선포된 것들이다.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기록되고 해석되는 역사적 전개 과정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형성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외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측면에서“기록되어 주어진 성경은 하나님의 심장에 영원부터 기록되어 있는 성경으로부터 취해진 발췌요 복사들인 것이다”(Thomas Goodwin, Works, IX, p.28).  

그러므로 다양한 배경들과 성품을 지닌 수많은 인간 저자들에 의해서 전달되고, 문체와 문학 형태의 다양성안에서 주어진 성경은 비록 복잡한 면이 있기는 하나 하나님의 단일한 마음의 통일된 발언이요, 완전하고도 일관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의 계시로 받아들여지고 연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청교도의 성경연구자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이 발설하신 예언들이요, 기록된 역사들이고, 하나님이 설명하신 교리들이며, 선포하신 찬양이요, 기록된 비전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청교도 연구가는 성경이 단순히 오래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야기로 읽지 말고 모든 시대의 독자들에게 여전히 말씀하시는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 토마스 왓슨 목사는“당신이 읽는 모든 절절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생각하라”(Body of Divinity, 1890, p.25)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요,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도저히 다 측량할 수 없는 깊은 것이 많고 아직도 우리에게 발설하실 것이 그의 거룩한 말씀들 안에 여전히 많이 있기 때문에 성경 안에 무한한 심오함이 있음을 모든 성경학도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 구드윈 목사는 우리가“절대로 충분한 지식을 소유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말씀을 더 온전히 연구하여야 한다”(Works, V, p.537)고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계시와 가르침을 위하여 하나님 자신을 전적으로 의존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겸손을 유지시키신다. 또 이 세상이 말씀에서만 이해되고 발견할 수 있는 바를 어떠한 영혼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없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겸손케 하신다(Owen, Works,Ⅶ, p.409). 청교도들은 어거스틴이 말한 것을 자주 인용하였다. 즉 성경에는 어린양이 건널 수 있는 얕은 시냇물이 있는가 하면, 가장 경건하고 박식한 사람조차도 푹 잠겨버리는, 코끼리도 수영하는 깊은 곳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의 지식이 적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더 배우기를 사모하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열어 보여주시도록 더욱더 하나님을 우러러 보며 성경연구에 임해야 한다.

Ⅲ. 청교도의 성경해석 원리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어떻게 가르치고 전해야 하는가는 성경해석과 적용이란 측면에서 다루어진다. 청교도들은 성경본문의 조직적인 분석과 적용에 의하여 강단 사역으로부터 진리의 선포와 가르침을 추구하였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성령 하나님의 발설하는 것으로써 전파되어져야 한다. 진리를 전파하는 기본적인 방법은 월리암 퍼킨즈의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설교자는 본문 메시지를 위한 대변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전하고자 하는 본문을 섬겨야 한다.  

설교자는 먼저 본문의 내용을 평이하게 설명하고, 문맥의 연결점을 찾으며, 본문의 구조와 구성이 어떠한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것을‘대지 나눔’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작업은 청중들로 하여금 성경 저자가 의도한 의미와 전체 범위가 무엇인지를 청중들이 잘 이해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 다음에는 본문으로부터 본문이 나타내거나 암시, 또는 전제하거나 예증하는 한 두 개의 교리적 명제들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퍼킨즈 목사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단 진술된 교리들은 본문에 대한 더 상세한 분석과 다른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대비시킴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교리들은 예상되는 오해의 소지나 난제들을 대비하여서 명백히 진술되어야 하며, 청중들의 마음 속에 야기될지도 모르는 반대 의견들을 대비하여 확실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 다음 단계는 적용단계에 이르는데 이 부분은 설교의 적용 측면을 다루면서 언급하기로 한다.

이상이 청교도들의 설교준비 과정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들의 성경해석 원리들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들의 성경해석 원리는 모두 5가지이다. 물론 청교도들은 성경해석 원리를‘성경에서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대전제 하에서 한가지 의미뿐이라고 보았으나 나머지 네 가지는 한가지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한 보조적인 준비단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 문자적 문법적 해석

중세시대의 성경해석은 다양한 영적 (Allegorlcal) 의미를 선호하다 보니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경시해 버렸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은 풍유적인 해석을 배격하고 성경의 문자적 의미, 즉 문법적이고 자연스러운, 그리고 저자의 의도를 밝히는 해석만이 성경이 지니고 있는 유일한 해석으로 믿었다. 문자적 의미는 본문의 문맥과 문법을 세심하게 살피는 강해에서만 찾아진다고 생각하였다.  

이같은 주장을 청교도들은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월리암 퍼킨즈 목사는 로마교의 문자적 해석, 은유적 해석, 비유적(tropological)해석 및 신비적(anagogical) 해석 등 네가지 해석을 버리고 첫번째에 해당하는 문자적 해석을 취하면서 나머지 세가지는 문자적 해석을 확실히 하는 방편으로 간주하였다(Woks,Ⅲ, p. 651, 1617). 존 오웬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경에는 실질적으로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들 속에 담겨진 의미 외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생각을 해석함에 있어서 먼저 그가 말하고 기록한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말한 언어, 관용어구, 표현의 통상적인 사용과 취지들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는 한 그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직시할 수 없습니다… 많은 강해자들, 특히 한 번역본만 의지하여 설교하는 설교자들이 원어에 무지하여 얼마나 많은 혼란과 오해 및 잘못된 해석을 하는지 모릅니다”(Works,Ⅲ, p. 489).

물론 청교도들도 성경에는 문자적 의미가 풍유적인 의미 자체인 경우도 있음을 알고 그 실례로 아가서를 들었다. 제임스 더람(James Durham) 목사는 이 주제에 대하여 좋은 논평을 주고 있다.

“나는 아가서에 문자적 의미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문자적 의미가 성경의 역사서에 나타난 것처럼 금방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풍유적이고 비유적인 해석에 의한 영적인 해석이 아가서의 문자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문자적 의미는 말씀 안에서 성령께서 의도하신 대로 적절하게 사용되든지 또는 은유적으로 사용되든지 성경 자체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며, 마치 비유들, 풍유적이고 은유적인 성경 본문들의 강해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처럼… 문자적 의미는 모든 표현들의 전체로부터 모아지는 것입니다”(아가서 강해, 1840, Banner판 1982, p.28).

더람 목사는 이같은 해석이 중세기의 불합리한 풍유적 해석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성경의 풍유적 해석과 풍유적 성경의 해석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2. 일관되고 조화적인 해석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일관된 신적 마음의 표현이라면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은 진리여야 하며 부분과 부분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월리암 브리지 목사는 명백한 모순을 반복해서 말한다는 것은 진짜 불경스러운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세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이 서로 싸우고 있음을 보았을 때 그는 애굽인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두 이스라엘 사람이 싸우고 있음을 보았을 때 그는 내가 가서 화해시키리라. 왜냐하면 그들은 형제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했습니까? 모세가 선하고 의로운 자라서요? 성경이 애굽인과 싸울 때 우리는 애굽인을 죽여야 합니다. 위 경을 소멸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 성경이 서로 다른 곳에서 싸우고 있음을 볼 때에 우리는 이들이 서로 형제이기 때문에 화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을 화목시키기 위해 내가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성경의 외관적 차이를 악용하려고 할 때는 이렇게 말하십시요. 이 책에 서로 모순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봅니까? 그렇다면 화목시키려고 하지 마시오. 논쟁을 보이는 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보이는 것뿐이니 조심하시오”(Works,Ⅰ, p.459).

이처럼 성경이 하나의 신적 마음의 통일된 표현이라면 성경해석의 무오한 원칙은 성경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이 원칙적인 해석자이가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의 진정한 그리고 완전한 의미가 문제시될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보다 더 명확히 말하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찾으며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유추할 수 있다. 하나는 성경의 모호한 내용이 명확한 본문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또 하나는 지엽적인 모호한 표현들은 근본적으로 확실한 것들과 조화시켜 해석하는 원칙이다. 즉 기독교 교리나 요리문답의 가르침들,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 및 성례론 등에 비추어 볼 때 어딘가 이상이 있다는 것은 절대로 올바른 강해라고 볼 수 없다(R.Bemard. The Faithful Shepherd, 1607. p.28, Parker qouted, p.23).

3. 교리적 및 하나님 중심적 해석

성경은 교리적인 책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과 연계되어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 관하여 가르친다. 브리지 목사의 지적처럼 우리가 거울을 볼 때 세 가지(우리, 나 자신, 방안에 있는 것들)를 보는 것처럼 성경을 볼 때 성경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관련된 진리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보여주며 더러운 내 얼굴과 그리고 나와 더불어 함께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 중심적인 가르침이다. 타락한 인간은 우주의 중심을 인간 자신에게 두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인간을 포함한 각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써 각 종류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청교도들의 유산은 그들이 확고히 붙든 바로 하나님 중심의 성경관이다.

4. 기독론적 및 복음적 해석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문제이다. 기록된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매 이파리마다 예언되고, 예표되며, 예시되고, 드러나고, 확증된 전체 성경의 종합이다”(T. Adams, Works,Ⅲ, 1862, p.224).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의 목적과 범위와 내용으로써 우리의 눈에 그리스도를 굳게 고정시켜야 한다. 모든 성경은 아기 예수를 싸고 있는 강보와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예표와 그림자들의 진리요 본체이며, 은혜언약의 실체와 일상적인 활동의 내용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성경의 약속들이 만나는 중심지요 만남의 광장이다. 그리스도는 신구약 성경에 표시되고 봉해졌으며 제시된 분이시다. 성경의 족보들은 그리스도의 참다운 식구의 자리로 인도하며, 성경의 역대기는 그리스도의 시간과 연대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성경적 복음은 그리스도의 빛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들으며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은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성경의 내용이며 골수이며 정수요, 하나님의 위로의 영, 영광의 영이 함께하는 모든 것이다.

5. 경험적 및 실천적 해석

어떤 측면에서 보면 성경은 영적 체험서이다. 청교도들은 비할 데 없는 심각성과 통찰력을 가지고 이 경험의 차원을 연구하였다. 번연의 천로역정은 이 방면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즉 믿음, 의심, 유혹, 절망, 소망, 두려움,죄와의 싸움, 사단의 공격, 영적 기쁨의 절정, 영적 버림의 황폐함 등을 세밀히 연구하였다. 또한 성경은 실천적인 책이다. 성경은 마치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타락하여 절망적으로 서 있는 것처럼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서 인간에게 도전하는 책이다. 

 인간이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영적 강건함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청교도들은 이 같은 실천적 가르침들이 강해설교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야 한다고 믿었다. 교리적 가르침들은 성경 자체가 증거하고 있는 기준으로부터 가르쳐져야 하며, 설교자는 성경 자체가 목적하는 바를 바르게 적용시켜야 한다. 이제 끝으로 청교도들의 설교적용 문제를 살피기로 한다.

Ⅳ. 청교도들의 설교적용 원리

청교도들의 성경해석 문제는 충실하고 실제적인 적용이 언제나 뒤따랐다. 교리의‘활용(uses)’을 논하는 것은 성경 강해의 한 부분이다. 성경해석은‘말씀을 여는 것이요, 성경의 문장을 펼쳐 보이는’것이다. 다시 말해서 청중에게 성경이 아무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미있고, 연관이 있는 말씀으로 만드는 작업인 것이다. 이 작업은“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딤후 3:16) 관계성이 드러날 때까지 진행되어야 할 작업이다. 

청교도들이 사용한 적용의 활용은 다섯 가지였다.

①지식 전달의 활용법
이 방법은 진리의 전달을 통하여 심성을 교훈하는 일에 적용되어지며,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도와준다. 그리하여 성도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향한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확정하도록 도움을 받는 것이다.

②권고, 또는 간언의 활용법
이 방법은 청중에게 교리적 조명을 통하여 무엇을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탄원과 호소의 활용법
이 방법은 설교자가 전하는 진리의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지 않는 눈멀고 어리석은 청중들에게 탄식과 호소를 통하여 감명을 주며 자신들을 위하여 진리를 굳게 붙들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④위로의 활용법
이것은 의심과 불확실성으로 대두되어 온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이 진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⑤자기점검의 활용법
설명되는 교리(아마도 중생한 성도들의 특징들, 또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나 의무사항 등)에 비추어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평가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강해적 용법이 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설교적용은 한결같이‘교리(말씀강해 )+적용’이라는 논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존 오웬 목사는“교리의 활용이 없는 설교는 고상치 못한 설교이다”라고 하였다. 이들의 적용은 아주 실제적이었다. 설교자는 성경이 사람들이 있는 곳에 선포되도록 만들어지는지를 유의해 보아야 한다. 어제의 적절한 적용이 오늘의 상황에는 안맞을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 만톤(1620∼1677) 목사는“옛날의 오류들이나 현재 사용하지도 않고 실행되지도 않는 것들을 열변을 토하며 공격하는 것은 싸구려 열심일 뿐이다. 우리는 현 시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숙고해야 한다”고 말했다(Woks, V, 1871, p.103).

성경을 진실로 적절하게 그리고 철저히 적용시키려는 설교자의 작업은 의심할 바 없이 신중함과 열심과 묵상이 요구되는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설교준비는 언제나 청중들의 상황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 성경연구에 항상 성도들에 대한 연구가 끊이지 않았다. 퍼킨즈 목사는 설교적용 문제를 계획함에 있어서 일곱 가지 유형의 성도들의 상태를 분석 제시하고 있다(Works,Ⅱ, pp. 665ff).

첫째는‘무지하고 가르치기 어려운 불신자들’이 있는데, 이들에 대한 전략은 그들 중에 있는 분명한 죄를 꾸짖어 마음을 찌르고 죄책감을 느끼게 함으로 그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가르침을 받을 수 있기는 하나 여전히 무지한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설교뿐만이 아니라 문답교육을 활용하여 기본적인 복음을 착실히 가르쳐야 한다.

셋째는‘지식을 가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겸손하지 못한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을 어떻게 정죄하고 있는지를 들을 필요가 있다.

넷째는‘겸손한 자’들이다. 이들은 신앙과 회개의 교리 및 복음의 위로 등을 들을 필요가 있는 자들이다.

다섯째는‘분명히 믿는 자’들이다. 이들은 우선 칭의와 성화 및 성도의 견인을 언급하는 복음과 또한 저주가 없는 율법을 들음으로 회개에 알맞는 새로운 순종의 열매들을 맺도록 배워야 할 자들이다.

여섯째는 진정한 믿음, 또는 진정한 의로부터‘타락한자’들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죄악을 직접적으로 입증하고 되풀이하여 지적하거나(또는 사정없이 내려치는) 교훈을 받되 회개를 촉구하며 동시에 형제의 따뜻함을 더불어 훈계받는 것이 필요한 자들이다.

일곱째는‘혼합적인 자’들이다. 교회에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당시의 영국교회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하면서 영국 국교회에 참석치 않는 천주교 신자들을 뿌리뽑기 위해 교회출석이 법률로 정해지고, 만일 어기면 상당한 벌금이 부과되며, 그래도 출석하지 않으면 더 심한 형벌이 주어지곤 했기 때문에 억지로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는 교인들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설교자는 정기적으로 모든 유형의 적용들을 여러 가지로 되풀이하여 말하여야 한다. 각각의 적용들은 어떤 성중들에게 적절한 것이 될 수 있으며, 적용자료의 우물은 결코 마르지 않을 것이다.‘귀향(home-coming, 이 용어는 알렉산더 화이트 목사가 사용한 것임)’적용의 많은 형태와 수준들은 설교자가 다루는 대부분의 본문에서 추론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청교도 설교자들은 일단 전파된 가르침들을 성도들이 오해하거나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동일한 본문으로 수많은 설교들을 해 왔으며, 때로는 한 본문에 수개월, 수년 동안 머물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이들의 설교집을 읽으면 당혹감이나 지루한 혼란을 주기가 쉽다. 그 이유는 패커(J.I.Paker)가 지적하는 것처럼(Among God's Giants, Kingsway pullications, 1991, pp.94∼95) 그들의 설교는 수많은 대지와 소지들이 있기 때문에 무엇을 말하려는지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가진 관심보다 더 성경 전체에 대한 아주 강력한 관심에 의하여 움직여졌다. 우리는 다른 성경구절을 최소한으로 인용하여 본문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에 집중을 하지만 청교도 설교자들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본문이 나머지 부분의 가르침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철저하게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가 당혹스럽게 여기는 또하나의 이유는 한 주제를 나타내는 우리의 방법은 그 주제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지하다는 가정 하에 출발한다. 그리고 선택한 출발점으로부터 귀납적으로 그 주제를 세워 가는 데 비하여, 청교도들은 그 주제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횡단분석에 의하여 그 주제를 쪼개는 데서 출발한다. 

16세기 프랑스 교육가인 피터 라무스(Peter Ramus)의 이분법이 어떤 주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청교도들은 이분법에 따라서 본문을 쪼개고 주제들을 모조리 이야기한 것이 되었다. 우리들에게는 이들의 방법이 상당히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나눈 대지들은 그들의 설교 구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모든 진리를 다 끌어내어 성도들에게 적용시키는 일에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일단 함축적인 의미와 적용들을 발견하기만 하면 멈추기가 어려웠다.

V. 끝맺는 말

이같은 청교도들의 설교는 타락한 영혼들에게 아주 반감을 사는 것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마음의 뜻과 생각의 감찰자로 느껴지도록, 또 만일 그들 중에 불신자들이나 무지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의 마음의 비밀들을 들추어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청교도들에게는 성경해석만큼 가혹한 훈련은 없으며, 더 가치있고 보람된 일은 없다고 믿었다. 

우리가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하나님 말씀에 대한 깊은 경외감과 아울러 끊임없는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월리암 퍼킨즈 목사는 이렇게 권고한다(Works,Ⅱ, p. 650).“설교자의 개인 경건시간에는 성경연구에 몰두하라.”퍼킨즈 목사는 이 일을 위하여 디모데전서 4장 13절, 베드로전서 1장 10절 및다니엘 9장 2절을 인용하고서 개인 성경연구의 네가지 자세를 말하고 있다. 

첫째는, 본문에 기술된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암기하라. 이 작업은 명제에 대한 정의와 분석 및 적용을 생각하는 일이다.  

둘째는, 성경 읽기에 주력하되 문법적, 수사학적, 논리적 분석을 하며 읽으라. 먼저 로마서와 요한복음을 읽고 나머지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용이하게 이해될 것이다. 또 구약에서의 교리적인 책, 특히 시편과 예언서(그 중에서도 이사야) 및 역사서(주로 창세기 )를 읽으라.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이사야와 시편을 많이 읽었다.  

세번째는 정통신학 서적을 읽으라. 최근의 신학동향 뿐만이 아니라 고전도 읽어야 한다. 사단은 과거 이단들의 사상을 재차 들추어내 사용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라. 모든 연구활동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간구해야 한다(시 119:18).

이같은 권고는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패커 박사는 그의 논문을 마치면서 본문강해를 위한 실질적인 질문 여섯 가지를 던져준다.

(1) 이 말씀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2) 이 본문에 대해 다른 성경이 어떤 조명을 주는가?
(3) 이 본문이 하나님에 대해, 인간에 대해 어떤 진리를 가르치는가?
(4) 이 본문이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본문 위에 어떤 조명을 주는가?
(5) 이 진리들이 어떤 경험들을 묘사하며, 서술하며, 창조하고 수리하고자 하는가? 성경에 이것이 기록된 실제적 목적이 무엇인가?
(6) 이 진리를 실제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내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상태가 무엇이며, 믿고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이상의 질문들은 강해설교의 적용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고 본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지 않는 한 그리고 성도들의 삶 속에 들어오지 않는 한 우리가 붙들고 있는 진리는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말 것이다. 설교자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말씀을 위탁받은 자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목회와 신학 199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