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깊은 은혜를 주심은?”(딤후 4:17-18) 

본문의 말씀은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와 함께 목회서신 중의 하나로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주신 권면의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 가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다가 출옥된 이후에 쓰여 진 편지라면 디모데후서는 로마 감옥에 두 번째 투옥되어 죽음을 앞에 놓 고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날을 기대하면서 마지막 작별을 고하면서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충격적인 것은 죽음을 앞에 놓고 쓴 개인적 작별을 고하는 편지이었지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주 당당하 게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로마 감옥에 죄수의 몸으로 갇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아 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숙한 성도라면 사도 바울처럼 환경을 초월하여 범사에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께 오직 영광을 돌 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모습으로 세 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통치하는 삶을 살도록 축복권을 가진 존재이었으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 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래적인 목적과 책임을 상실한 채로 살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救主)로 아낌없이 주셨고, 누구든지 예 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nbsp3:16) 그러기에 이제는 우리들은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被造物)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새롭게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래적인 의도하신 목적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 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본문&nbsp18절 하반 절에서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 다. 아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nbsp6:33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 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고전&nbsp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 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 에 있는 성도라면 마땅히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하며(마&nbsp6:33),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 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고전&nbsp10:31) 

그렇다면 당시의 사도 바울의 상황(狀況)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만한 그러한 환경과 처지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세상을 떠 날 때가 쓴 성경입니다.(딤후&nbsp4:6) 세상을 뜰 때가 가까워진 늙은 종 사도 바울은 그를 버리고 떠나는 자들이 많 이 있습니다. 딤후&nbsp1:15,&nbsp4:10,16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시아에서는 부겔,허모게나가 떠 났고,데마와 그레스게 그리고 디도가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 갈라디아, 달마디아로 각각 떠났습니다. 지금은 사도 바울의 동역자 들이었던 사람들이 다 떠났고, [누가]만 남았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의 마지막 노년 길은 참으로 곤고하며 감당할 수 없는 배신 감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이러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원동력 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깊은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① 행&nbsp20:24 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 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② 고전&nbsp15:10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 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③ 고 후&nbsp12:9에서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 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④  빌&nbsp1:7에서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 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 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⑤ 빌&nbsp1:20에서 “나의 간절 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 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등 참으로 많은 말씀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 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주님께서 베푸신 깊은 은혜가 무엇이며, 그 깊은 은혜를 베푸신 이유 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깨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1. 주님께서 바울에게 베푸신 깊은 은혜는 무엇입니까? 
① 바울을 버리지 않고 그의 곁에 계셔 주셨습니다.(17절 상) 
본문&nbsp17절 상반에서 “주께서 내 곁에 계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고마우신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 을 버리지 않고 그의 곁에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떠나지 아니하셨습니다. (참 고 행&nbsp23:11,&nbsp27:23) 
그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지금 사도 바울과도 함께 하시고 있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임마누엘의 역사로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 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nbsp16:33) 
우리는 여기에서 아브람은 아브라함되게 하시고, 야곱을 이스라엘 되신 하시고, 사울을 바울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 나님께서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의 곁에 계셔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임을 받았을 수 있었던 것입 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그들에게 실패가 전혀 없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지 아니했습니까? 아닙니다. 참으로 형편없는 자들 이었습니다. 특히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수제자로 인정을 받은 자였지만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함으로 시험에 빠졌고, 결국 예수님을 모 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베드로를 결코 버리 지 아니하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옛날 어부의 모습으로 돌아간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를 함께 하셨고, 책망보다 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아마 도 베드로는 세 번의 질문을 받으면서 자기 자신이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던 때를 깨닫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참으로 형 편없는 우리들이 용기를 가지고 매순간마다 담대하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우리 곁에 계 시기 때문임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② 바울을 강건 되게 하셨습니다(17절 하) 
본문&nbsp17절 하 반절에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을 떠나지 않 고 그의 곁에 계셔 주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강건되게' 하셨습니다.(참 행&nbsp9:22,살전&nbsp22,딤 전&nbsp1:12) 
우리에게 능력을 공급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주신 사명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自 暴自棄)할 때도 많이 있지만 우리가 새롭게 용기와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다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시시 때때로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독수리치며 날개를 치며 올라갈 수 있는 새로 운 힘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nbsp40:27-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능력이 있다고 교만한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있기를 바랍니 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누가 봉사를 잘 한다”고 칭찬할 때에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립할 수도 없고, 존재할 수 없는 참으로 무능하고 무력한 자들임을 철저히 인식할 수 있기 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 힘이 없다고 의기소침(意氣銷沈)한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공급하시는 주님 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강건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③ 바울을 모든 악에서 건져내셨습니다(17 하,&nbsp18절 상) 
본문&nbsp17절 하 반절과&nbsp8절 상 반절에서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모 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사 도 바울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딤후&nbsp3:11)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시 험에 들지 말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 우리들을 모든 악에 서 구원하여 주시지 아니하신다면 우리는 결코 한발자국도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입니 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요,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존재, 마른 막대기보다 못한 존재”임 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마우신 주님께서 시시때때로 바울을 모든 악에서 건져 주신 것처럼 우리들을 건져 주셨기 에 여기까지 온 줄 믿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④ 바울을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여 주셨습니다.(18절 하) 
본문&nbsp18절 하반절에서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고마우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에서 해방 받아 가나안 땅으로 향했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지 않는 백성들 은 단 한 사람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입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론에서 설명하기를 성부 하나님께서는 구원(救援) 을 계획(計劃)하셨고, 성자 예수님은 구원을 성취(成就)하였고, 보혜사 성령께서는 구원을 적용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 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아무도 자랑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nbsp2:8,9)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악(罪惡)으 로 얼룩져 있고 지옥 불에 떨어졌던 우리들을 향하여 구원의 손기를 펴시고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 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어찌 말로 다 기록할 수 있 겠습니까? 우리는 오직 감사, 감사, 감사할 따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매사에 불평, 불만을 갖고 있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인식하므로 깨닫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그러면 주님께서 왜 바울에게 이처럼 깊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본문&nbsp17절 중반절에서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 근본적인 이유는 사도 바울을 무척이나 사랑하신 연고이지만 하 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恩惠)와 능력(能力)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일 곧 복음 전파의 일에 위해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 로 택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유대인을 위한 사도로 택한 그릇이었다면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택함을 받은 그릇이었습니다. 그래 서 사도 바울은 롬&nbsp1:5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 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기에 사 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딤후&nbsp4:2 상 반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 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원칙적으로 하나입니다. 전도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 이것 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려 하실까요? 하나님은 복음으로 세상을 구원하 려 하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 동네로 복음을 전하러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엔 성령을 보내셨고 성령은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은 복음을 전 하려고 하는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어떨 때 우리는 바울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전서&nbsp9장&nbsp16절에서 바울은 부득불 복음 을 전할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즉, 하기 싫어도 억지로 전한다는 것입니다.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 어 쩔 수 없이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도 인간이니까 전하지 않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핍박을 받기 싫어 도망가고 싶을 때나 육신 이 약해 쉬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일임을 알았기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는 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도 바울과 같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전해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누가복음&nbsp24장&nbsp45 절에서&nbsp49절에는 우리가 왜 전도해야 하는지, 전도하기 위해 하나님 이 우리에게 주신 세 가지가 무엇인지 나와 있습 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도하라고 주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첫 번째로 하나님은 복음을 주셨습니다. 즉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누가복 음&nbsp24장&nbsp46,47절) 어떤 면에서 이것을 기쁜 소식이라 함은 하나님 편에서의 얘기 같기도 합니 다. 우리는 눈앞에 것만을 보지만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저주받은 신분인가를 알고 계시고 또 이대로 살다가 가 면 죄 값을 치룰 심판이 얼마나 크고 잔인한가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운명을 다 읽고 계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님을 믿기 만 하면 구원받고 죄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누가복 음&nbsp2장&nbsp10절) 하나님이 보실 때 기쁜 소식, 이것이 복음(福音)입니다. 하나님이 기쁘다고 하시 면 우리에게도 또한 엄청나게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이 기쁜 소식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수건에 쌓아 서 땅에 묻어 놓는 어리석은 종이 될 것이 아니라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전도하라고 소명을 주셨습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함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복 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소명입니다. '나 같은 평신도에게 무슨 소명인가?'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 게는 무의미한 것도, 사소한 것도, 못 쓸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거룩한 제사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평범하게 날마다 반복하는 가 정생활도 거룩한 것이요, 직장생활도 거룩한 것입니다. 나의 가정을 통해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 땅에 이뤄지기를 소원 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나의 직업, 재산, 재능, 모든 시간이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는 소명자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령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nbsp24장&nbsp49절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란 곧 '성령(聖靈)'을 의미합니다. 사도행 전&nbsp2장을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사람들이 달라진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남자 만&nbsp3000명이 삽시간에 예수 믿고 돌아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 앞에 예루살렘이 삽시간 에 함락됐습니다. 성령 충만한 집사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가 굴복됐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핍박을 받아 흩어지면서 복음 을 전하자 안디옥이 예수 믿는 도성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그것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이 가능합니다. 복음 은 성령이 전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은 사용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도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주신 세 가지. 복음, 증인으 로서의 소명, 성령의 능력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성령을 충만케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 게 더 큰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완악한 심령을 돌아오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 님은 '복음'을 통해 시흥&nbsp4동을, 금천구를, 이 나라를 다시 새롭게 세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물었다.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 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 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우리 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이웃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그 실천방법. 그것은 바 로 '복음'이라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자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누가복 음&nbsp24 장&nbsp45절 ~&nbsp49절 말씀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도하라 고 주신 세 가지. '복음' 자체와 증인이 되는 '소명'과, '성령의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로서 주님의 지상 최대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우리가 순 종해도 되고, 순종하지 아니해도 되는 선택적인 권면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는 복음 전파를 우리에게 지상 최대의 명령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행&nbsp1:8에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 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에게 권능을 주 신 목적은 복음 전파의 목적으로 주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복음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 은 ① 가르치고 ②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고 ③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주요한 핵심은 천국 복음 전파에 있었 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첫 마디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라고 말씀하셨고, 각종 병든 자들 과 약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그들을 고쳐 주신 목적은 바로 천국 복음 전파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음 의 주체요 핵심임을 만천하에 들어내기 위해서 행하신 표적들인 것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 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여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천국 복음이 전파하는 일들을 감당하셨으며, 이러한 일들을 이제 는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천국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사명을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요 신성한 일임을 깨달아 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단&nbsp12장&nbsp32절 하 반절에서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 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천국 복음 전파하는 일에는 결코 예외자가 없으며, 결코 불평, 불만하거 나 등하시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 복음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등하시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하나님 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며, 성령 하나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만 약 어떤 경우에도 할지라도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일이므로 결 코 용서함을 못하는 성령 훼방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nbsp12:31-32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 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 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 한 상황과 형편에서든지 천국 복음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거나 멈추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일을 방해받아서는 안됩니다. 방해를 받는다 고 할지라도 결코 의기소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일을 사람들을 비유나 기쁨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 는 우리들의 최선의 삶의 모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nbsp10장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입과 발 이 아름답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딤전&nbsp1:12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 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귀한 사명을 맡겨주 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인정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충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행위 일 뿐만 아니라(고후&nbsp6:1)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개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데 하물며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충성하고, 헌신하는 자리에 동참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 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다시금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라도 다시금 충성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너 무 늦기 전에 돌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부탁드립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고마우신 주님께서 ① 바울을 버리 지 않고 그의 곁에 계셔 주시고 ② 바울을 강건되게 하시고 ③ 바울을 모든 악에서 건져내셨고 ④ 바울을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 여 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지상최대의 명령인 천국 복음 전파하는 일 임을 깨닫고 천국 복음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국 복음 전파는 우리가 주님께로 받은 사랑과 은 혜를 표현하는 신앙의 고백이며 실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 나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참 좋으신 주님께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우리의 마땅하 사명이요 명령임에도 불구하 고 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등 세상에서 받을 수 없는 각종 면류관이 예비되 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바라기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최대의 일 곧 천국 복음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이 와 같은 축복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전도하는 일을 등하시 하거나 방관자가 되지 말고 복을 받을 수 있는 주인공 이 되셔서 자자손손(子子孫孫)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복된 가정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