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주시는 은혜”(신 32:9-12)

오늘은 지난 상반기 6개월을 마치고, 하반기 6개월을 새롭게 시작하는 첫날이기도 하고, 7월 달을 시작하는 첫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는 지금까지도 지켜주시는 것처럼 이제 남은 시간들을 지켜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 원하는 마음으로 본문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기도의 제목을 삼기를 원합니다. 

신명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될 법도에 대한 말씀을 재조명 하고 확인하기 위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애굽을 떠나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교훈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 신명기 32-34장은 신명기의 결론부분이 됩니다. 신명기의 결론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하고 있으며 모세가 죽기 전에 각 지파를 축복한 것입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한마디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10절 하반 절에서 “자기 눈동자같이 지켜 주신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되 자기 눈동자같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지켜주십니까?

1,열악한 환경과 위기에서 지켜주십니다.(10절)
본문 10절 상반 절에서 "여호와께서 그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열악한 환경과 위기에서 지켜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했던 광야는 사람이 거처하거나 통과하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일교차(日較差)가 커서 낮에는 일사병으로 쓰러질 만큼 폭염(暴炎)이 계속되다가 밤이 되면 추위가 몰아 닥칩니다.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죽기 십상이고 독사와 맹수들이 들끓기 때문에 언제 기습을 받을런지 예측불허입니다. 거기다가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본문은 그곳을 "황무지,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그토록 열악하고 위험천만한 황야를 횡단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단 한명도 목말라 죽었거나 일사병으로 죽었거나 배고파 죽었거나 추위에 얼어 죽었거나 맹수에 물려 죽은 일이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었지만 그들이 죽은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한 죄 때문이었지 황무지와 짐승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32:21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라고 했고, 22절을 보면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라고 했습니다.

환경이 그 사람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환경이 좋은데 타락하거나 잘못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환경이 열악한데 바로 되고 잘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열악한 환경을 탓하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경이 어렵기 때문에 주님을 더욱 가까이 하고 믿음을 굳세게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 잘 벌고 성공하고 잘 살게 됐기 때문에 주님 외면하고 교회를 등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사하고 감격해서 신앙생활을 더욱 잘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일이 되든지 안 되든지,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황무지와 짐승이 울부짖는 광야에 들어섰을 때보다 더 철저하게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은 그들이 사잘굴과 풀무불 속에 들어갔을 때 사자의 입을 봉해 주었고 풀무불이 사르지 못하도록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언제, 어디서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함부로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과소평가(過小評價)하고, 사람의 능력이나 그 역할을 절대 평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사람은 대단한 것으로 평가하고 하나님은 소홀히 취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32:39을 보면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죽이기도 하시고, 나를 살리기도 하십니다. 그러기에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시편 121:1-2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눈을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까?
본문 9절에서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자기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을 선택하라고 추천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신이 우리를 선택해 달라고 부탁한 일도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의도와는 상관도 없는 일방적 선택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식을 낳은 부모는 자식을 기르고 지키고 가르칠 책임을 전적으로 져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또 다른 이유는 언약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지키겠다 사랑하겠다 인도하겠다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습니다. 

▶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조건과 제한과 약점과 허물을 넘어서고 덮어줍니다. 이스라엘과의 약속 때문에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기 보다는 사랑하기 때문에 덮어주시고 용서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약속은 엄밀하게 보면 냉정한 것입니다. 한쪽이 약속을 어기면 약속은 깨어지는 법이고 그 책임은 어긴 사람 쪽에 있는 것입니다. 약속을 어긴 사람은 대접을 받기도 어렵고 용서를 받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을 넘어섭니다. 그리고 용서와 관용과 도움을 받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을 어겼습니다. 하나님만 섬기겠다던 약속도 ,하나님만 사랑하겠다던 약속도, 결코 한눈팔지 않겠다던 철석같은 약속도 제멋대로 깨트려 버렸습니다. 대접은 커녕 매 맞고 내쫓기고 버림받을 일만 골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때문에 용서받고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 사랑으로 눈이 가려지면 세상만사(世上萬事)가 아름답게 보이는 법입니다. 사랑을 하면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를 맞을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고 보호받는 이유는 순전히 사랑 때문인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기에 나를 지켜주십니다. 사랑하시기에 나를 선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어떻게 지켜 주십니까?(10-12절)
첫째로 구체적으로 지켜주십니다.(10절)
본문 10절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지켜주십니다. 여기에서 “만나시고”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로가 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나를 전폭적으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완벽하게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30만개의 회로가 있고 1억 만개의 신경세포(神經細胞)가 있어서 거리, 광도, 색상을 자동으로 조절한다고 합니다. 모든 신체의 기능이 완전 자동차화 시스템으로 되어 있지만 특히 눈의 기능은 전자동이라고 합니다. 눈꺼풀만 해도 완전자동 개폐식이어서 유사시에는 즉흥적으로 눈꺼풀이 덮이게 됩니다. 그리고 눈물샘을 만들어 언제나 안구운동에 지장이 없도록 촉촉하게 습도를 조절해 줍니다.
▶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신다는 것은 자기 눈을 보호하듯 철저하게 완벽하게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체 가운데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신경조직, 두뇌 판단, 눈 동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눈을 보호하듯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둘째로 홀로 인도하십니다.(12절)
본문 12절에서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되 홀로 인도하시면서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힘이 모자라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든지 연합전선을 펴서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홀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에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기병대를 동원하고 술객들을 동원해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고 괴롭혔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홍해를 가르셨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홀로 하셨습니다. 

▶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방법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독수리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라고 했습니다. 짤막한 한 구절 속에 독수리 훈련방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새 중 왕이 되는 것은 가혹한 훈련 때문입니다. 알에서 금방 나온 독수리는 병아리나 꿩 새끼와 다른 바 없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훈련을 통해 새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어미 독수리는 등지 안에 있는 새끼들에게 먹이를 물어다 줍니다. 그것은 어미의 보호본능입니다. 그러나 독수리 새끼의 어미 새는 보호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둥지를 흔들어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위기를 느낀 새끼들이 몸부림치며 등지 안에 머물려고 하면 날개를 너풀거려 떨어뜨립니다.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가 땅을 향해 떨어질 무렵 어미는 다시 받아 둥지로 옮겨 놓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반복합니다. 그 뜻을 모르는 다른 새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어미 독수리가 심술이 났다든지 정신이 돌았다고 수근 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독수리의 강훈련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훈련하셨고 오늘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의사들은 현대인이 건강을 유지하려면 하루 만보를 걸으라고 합니다. 그래야 하체가 튼튼해지고 신진대사가 잘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신체를 단련하고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십니다. 영광도 호롤 받으십니다. 축복도 홀로 하십니다. 지키시고 힘주시는 것도 홀로 하십니다. 인생을 살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동안 보금자리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둥지에서 떨어지는 아픔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파멸은 아닙니다. 그리고 종점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훈련이며 연단이며 훈련 방법입니다.

▶ 105인 사건으로 투옥된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 5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감옥은 이상한 곳이다. 강철같이 굳세게 되어 나오는 사람도 있고 썩은 들풀처럼 약해져 나오는 사람도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온실의 화초처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하듯 지휘관이 병사를 훈련하듯 감독이 선수를 훈련하듯 하십니다. 거기에 합격하면 강한 독수리가 되고 강한 병사가 되고 강한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結論)) 그러므로 지금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께서 감사를 드립시다. 구체적으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홀로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기에 충분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나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독수리의 새끼처럼 나를 강하게 훈련하시지만 그것은 나를 더욱 더 강한 그리스도인의 군사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방법이지만 알고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훈련 과정을 통하여 내가 정금처럼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