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기독신문 주필 김영우 목사님께서 제45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 둘째날 오전에서 하신 내용입니다.

개혁주의란 

1. 개혁주의의 정의 

어떤 이들은 16세기 가톨릭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발흥한 신학운동을 통틀어서 개혁주의라고 부른다. 이 경우 북부독일의 루터 멜랑히톤 요하네스 부겐하겐, 남부독일의 마르틴 부써와 쟝스트롬, 스위스 북부 취리히의 쯔빙글리와 불링거, 스위스 남서부 제네바의 화렐 칼빈 베자를 비롯하여 자유교회파 제세례파 등이 다 포함된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견해가 아니다. 

통상 개혁주의를 나눌 때 독일 개혁주의로는 스트라스부르구와 팔라틴 개혁주의로, 스위스 개혁신학으로는 취리히와 제네바 개혁주의로 나눌 수 있다. 로버트 레담은 “16세기 개혁자들 중에서 취리히의 쯔빙글리와 불링거, 스트라스부르구의 부써와 피터마터 버미글리, 제네바의 화렐 칼빈 베자 푸랑스와 뒤르땡 및 아만두스 폴리누스 등이 저술하고 시행한 것들과 그들이 작성한 신앙고백을 개혁주의라고 부른다.”고 했다. 

윌리엄 스탠포드 리드는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루터파와 재세례파로부터 칼빈주의자들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서 쯔빙글 리가 기초를 놓고 그 위에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정립한 신학과 성경주석을 통해서 발전시킨 개신교 신학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개혁주의는 스위스와 독일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그 주 무대는 제네바였고 칼빈이 주역이었던 바 그에 의해 정리되고 연구된 신학 작업의 영향 속에 형성 발전되어온 교회와 신학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개혁주의의 논의가 칼빈으로 마감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 대열의 중추로 가장 큰 공을 세웠을 뿐 완성자는 아니었다. 마치 사도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복음을 월등하게 파악 전달했던 것처럼 칼빈이 당대의 다른 어떤 개혁자들보다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 인해 개혁주의 노선의 대표로 인정되었다는 뜻이다. 


2. 개혁주의의 주요교리 

개혁주의의 주장이라고 해서 모든 게 여느 교파 내지 신학 경향과 다른 것은 아니다. 기독교 일반의 주장과 같은 것들도 있고 다른 것들도 있다. 다시 말하여 보편적인 기독교 교리도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교리가 있다. 

그러면 먼저 공통적인 교리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이나, 니케야신경(Nicene Creed, 325), 또 칼세돈신경(Creed of Chalcedon, 451) 그리고 아다나시우스신경(The Athanasian Creed)에서 고백된 신앙노선을 개혁주의는 기본으로 삼는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잘 외우고 있으니까 생략하기로 하고, 니케야신경은 삼위일체의 관계를 규정한 것으로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분으로 완전한 신 되심을 강조하고 있다. 주로 동방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더 다듬어진 문서로 만들어졌다. 

칼세톤신경은 아폴리나리우스, 네스토리우스, 유티케스 등이 주장한 극단적인 그리스도의 단성론과 양성론을 배격하고, 신성이 인성 안에서 혼합, 혼란, 또는 분리되지 않고 서로 온전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밝혔다. 

아다니우스신경은 아다니우스가 만들었다고 하난 실제로는 5세기경의 저자 미명의 신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시다. 성자는 완정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으로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시고 재림하시며 심판할 것이다. 동방교회는 이 신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개혁주의는 종교개혁자들이 공동으로 주장한 다음 원칙을 따른다. 
(1) 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2)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3) 오직 그리스도만(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로 의롭게 된다. 
(4)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모든 업적과 구원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 
(5)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다음으로 개혁주의 진영의 특색 있는 교리를 알아보자. 
(1) 제한속죄 구원론-개혁주의는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그리고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으로 구원론을 요약한다(돌트신경, 1618-1619). 칼빈주의의 득세를 반대하여 구원에 있어 인간 본유의 능력을 인정하는 반(半)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옹호하는 야콥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징계하면서 제한속죄 구원론을 완성하였다. 

(2)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개혁주의는 창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징벌,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마지막 심판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천명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는 말씀과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롤 있으리로다.”(롬11:36)는 성경 말씀을 의지한다. 

(3) 하나님의 예정-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예정과 선택을 어거스틴이나 멜랑히톤처럼 믿는다. 칼빈이 이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자 예정론은 개혁주의자를 비난하는 빌미가 되었다. 평자들은 인간을 마치 하나님의 정해진 프로그램에 맞춰 기계처럼 움직이는 존재로 만든다면서 운명론자로 몰아붙인다. 그러나 예정론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교리로서 신적 구원의 확실성을 담보해준다. 

(4) 언약신학-제네바의 베자에 의해 철벽이 된 예정론보다 구원의 확실성을 담보하는 온건한 주장이 독일 남부 지역과 스위스 자치 도시에서 개발되었으니 그게 바로 언약신학이다. 연약신학은 구원을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관계로 성찰하면서 인간은 믿음을 통하여 이 언약에 참여하는데 구속 계시의 점진적 발전과정과 통일성이 그것을 가리켜 준다고 하는 것으로서 구약의 각종 언약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체결되는 새언약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쯔빙글리 불링거 칼빈 올레비아누스, 우르시누스, 애임스, 코케이우스, 롤록, 카트라이트, 클로펜부르크, 윗시우스, 조나단 에드워즈, 헤르만 바빙크, 게할더스 보스 등이 언약신학의 공헌자다. 

(5) 그밖에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교리들이 개혁주의의 특색으로 간주되고 있다(John Leith).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 
-우상 숭배에 대한 신랄한 비판 
-역사 속에서 이룩되는 하나님의 목적 
-거룩한 신자의 생활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서의 생활 
-설교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권징과 훈련된 생활 
-조직된 교회의 중요성과 목회적 관심 
-예배와 생활의 단순성 


3. 문명의 흐름과 개혁주의 

19세기 신칼빈주의의 지도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문명의 흐름에서 개혁주의가 최고봉을 장식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고대문명의 발생지를 흔히 네 곳으로 잡는다. 아시아의 중국과 인도요, 서남아시아의 바빌론, 아프리카의 이집트 등이다. 
우리와 가장 근접하고 있는 중국문명은 보편윤리적 측면에서 볼 때 세계의 다른 문명들에게 별로 뒤질 게 없다. 오죽 했으면 1970년대 초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이 죽의 장막이라는 중국에 들어가 모택동과 주은래 등 공산지도자들을 만나고 와서 중국 지도자들에게는 철학과 경륜이 있다고 했겠는가. 또 요즈음 서양 지성들이 문제가 시원하게 풀리지 않을 때 중국의 성찰에 기대어 보려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거다. 

존재의 본래적 무엇에 신뢰를 부여해 놓고선 사람이 괜히 그것의 그것 됨을 그르치고 말 어떤 함(爲)을 덧씌우는 건 노상 헛된 짓거리라는 노자(老子)의 일러줌이나, 사람이란 학습의 산물이기에 훌륭한 스승을 만나 성의와 인내를 가지고 배우고 익혀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자태를 가다듬은 중국문명은 어떤 의미에서 우람하고 찬란했으나 황해로 유임되는 장강(長江)처럼 중국 밖으로 흘러가지는 못했다. ‘중화주의(中華主義)’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으로 자처했다. 따라서 유수(流水)일 필요가 없었다. 호수(湖水)로 충분했다. 이렇게 중국은 그저 자기인 채로 그냥 서 있기만 하면 됐다. 중국 문명의 정체성(停滯性)은 이런 사고방식에 기인했다고 본다. 

그러나 인도문명은 그와 달랐다. 인도문명은 중국문명보다 동적(動的)이었다.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는 히말라야를 넘어 중국으로 뻗었고, 동남아로 흘러갔으며, 서남아시아를 넘나봤다. 불교로 갱신된 인도문명은 중국의 도교와 관념론적 사고를 같이 하면서 영향력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헌데, 중국이나 인도보다 훨씬 역동적인 문명이 있었으니 그게 이집트문명과 바빌론문명이다. 양 문명은 중국․인도 문명보다 더 빈번히 교섭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두 문명은 중국․인도 문명처럼 자기 모습을 고수하지 않고 그리스와 로마 문명으로 탈바꿈했다. 오늘날 서양문명의 할아버지가 이집트․바빌론문명이라면 아버지는 그리스․로마문명이다. 

그런데 바빌론과 이집트 문명의 사이에서 조용히 또 하나의 문명이 배태되고 있었다. 그게 히브리문명이다. 이 문명은 오랫동안 규모와 영향력에 있어 눈에 띄지 않았으나 기독교적 성취를 통해서 삽시간에 그리스․로마문명에 필적하였다. 

히브리사상으로 두 축은 유대주의(Judaism)와 기독교정신(Christianism)이다. 유대사상은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이미 지나간 사상, 다시 말하면 구약성경 안에 갇혀 있는 박물관적 사상이 아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볼 때 상당히 유력한 사상처럼 보인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경쟁력을 보아서 알 수 있는 일이다. 

유대사상은 선민주의(選民主義)를 강하게 표방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네 유대인을 주(主)로 확신하고 나머지 세계인들은 객(客)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에 의한 세계 지배를 꿈꾼다. 그들은 지금도 세계 최대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진 국가 지배, 세계의 에너지시장 지배, 세계의 식량시장 지배, 세계의 금융 지배, 세계의 정보 통신의 발신원과 정보 통신망 지배를 통해서 그것을 이루려고 한다. 자기들을 그처럼 특수한 백성으로 만든 것은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야훼에 의해서였다는 부동의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겨오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보편성이 결여된 사상이다. 독선적인 데가 있다. 

순전히 사상적 측면에서 볼 때 기독교 사상은 유대사상에다 보편성을 곁들인 사상이다. 왜 그런가 알아보자. 예수님이 오시기 300년 전에 지중해 연안을 통합해 사람들의 생각을 지역주의에서 국제주의로 바꾸어준 이들이 있다. 알렉산더대왕을 필두로 한 헬라인들이었다. 헬라인들의 세계 정복은 강자로서의 지배욕을 채우려는 데 있었던 것보다 어떤 이상을 펴고자 하는 꿈 때문에 기도됐다는 측면이 엿보인다. 그 꿈이 무엇이었던가? 헬라문화제국 건설이었다. 헬라문화의 보편화에 대한 비전이 그들로 하여금 정복전쟁에 나서게 했다. 따라서 그것은 군사행동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유대사상을 최고 가치로 생각했던 것처럼 헬라인들은 헬라문화를 최고의 가치로 믿었다. 유대인들이 선민의식에 젖어있었다면 헬라인들은 우월의식에 빠져 있었다. 플라톤과 같은 헬라 최고의 지성까지도 자기가 헬라인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어떻든 그건 그렇다 치고 헬라인에 의해 보편주의가 등장하였다.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제국은 헬라인들과 같은 문화보편주의를 갖지 못했었다. 세계 모든 거류민이 동포라는 사상, 이 사해동포주의는 헬라인들의 산물이었다. 수백년간 헬라의 지배를 받으며 헬라문화 익숙하게 된 일부 히브리인들이 자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되묻게 되었다. 새롭게 열리는 세계와 자기들 유대인의 관계를 재정립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민족적 편협성 안에 감금되어 신의 특수성이 아니라 세계적 보편성으로 열려있는 신의 특수성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사고가 바야흐로 형성되고 있었다. 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일부 유대인의 보편적 사고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견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 관찰에 의하건대 그렇다는 것일 뿐 그것이 논의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할 수는 없다. 

이처럼 깨어난 유대인의 보편주의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 전개에 오래 전부터 나타나고 있다. 유대 선민주의의 시조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은 벌써 ‘만민’을 염두에 두고 계셨다.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질 강한 나라는 만민의 구원을 지향하고 있는 한시적 나라였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다”(시50:1)고 했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만민이 기도를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비록 그 만민이 이스라엘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할지라도 종족이나 신분, 계층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보편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상은 유대사상을 극복, 완성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월등한 사상체계와 삶의 질을 약속하면서 등장한 기독교문명은 희랍문명과 더불어 서양문명의 쌍벽을 이루었다. 중세의 가톨릭 스콜라사상은 기독교정신과 헬라사상을 한 지붕 아래 동거케 하려고 웅대한 사상적 구조물을 만들었다. 이제 스콜라신학의 노력 속에서 예루살렘은 아테네를 발아래 두고 한 식구가 될 수 있다고 자부하자 아이러니하게도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닌가. 결국 맹주가 되려는 가톨릭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것이 인문주의의 발흥과 종교개혁으로 나타났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독일의 루터, 스위스의 칼빈과 쯔빙글리에 의해 주도됐으나 문화배척론자인 루터와 문화수용론자인 쯔빙글리의 힘은 문화변혁론자인 칼빈에 비해 약했다. 막스 베버가 앞의 두 사람들보다 칼빈의 영향력을 서구 자본주의 발전의 주인(主因)으로 보는 것도―그의 주장에 내가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그런 이치에서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개혁주의는 로마 가톨릭과 더불어 서양인들의 사고와 삶에서 결정적 작용을 하는 두 지렛대가 되었다. 11세기 중반 서(西)의 가톨릭과 서로 분립한 동(東)의 올토독스가 동유럽의 일부 지역과 러시아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서구 사회 전반에 대한 영향력, 특히 근대적 영향력에 있어서는 가톨릭주의와 개혁주의에 병립할 수 없었다. 

싫든 좋든 또 하나의 강력 주체가 있다. 7세기에 일어난 사라센세력이 그것이다. 이 또한 이집트와 바빌론 문명의 후손으로 유대․기독교문명의 영향 아래 일어섰다. 이렇게 해서 희랍의 이교철학, 로마 가톨릭, 이슬람교, 칼빈주의 등 네 개의 세계관들이 자취를 뚜렷하게 자리 매김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개혁주의는 민중이 깬 곳에서 시발되었다. 학자나 정치권력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6세기의 제네바가 그랬다. 그 민초들이 종교적․정치적 깨달음을 가지고 교회를 개혁하고 시민정부를 세웠던 것이다. 그들의 초청으로 칼빈이 가담하여 종교개혁과 민주주의적인 그들의 모습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존 칼빈이 창안한 게 아니다. 칼빈은 그것을 분명히 의식한 최초의 인물일 뿐이다. 

한편 마르틴 루터는 독일에서 제후들의 지원 아래 종교개혁을 했다. 거기에는 제네바와 같은 민중의 자각이 없었다. 당시 독일 민중의 처지는 농노와 같았다. 자결권이 없었다. 또한 가톨릭교회나 정교회에서는 고위 성직자들이 교회를 전횡하고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국가의 각종 자원을 나누어 가졌다. 민중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민중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커녕 교계(敎階)와 제의, 성물․성상숭배에 빠뜨려 몽매케 했다. 

그러나 개혁주의 국가들, 이를테면 스위스, 화란, 영국의 한 때, 미국 등을 보라. 시민들의 손에 의해 정치가 실시되고 신앙의 결정들이 나오지 않는가. 그것은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백성, 바로 그들의 것이었다. 


4. 국가․민족의 성숙의 표지인 개혁주의 

아브라함 카이퍼가 1898년 프린스턴신학교 교수회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스토운재단의 주최로 ‘칼빈주의 강의’라는 특강을 하기 위해서였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실시된 그 강의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민족생활은 유년기로부터 성숙기로 발전한다. 민족이 성년기에 이르면 국민은 스스로 자각 하여 그들이 권리를 위하여 미래 사건의 진로를 제시하는 운동을 일으키는 단계에까지 도달한다. 칼빈주의가 일어나므로 민족이 성년기에 도달된 것처럼 보인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 나라에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가 꽃피워졌다면 그 민족이 성숙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카이퍼의 말에 얼른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문명의 흐름과 개력주의, 즉 개혁주의는 민중이 깬 곳에서 일어난다는 걸 알면 고개를 끄덕일 줄 안다. 개혁주의는 학자나 권력층, 이른바 엘리트의 산물이 아니다. 일반 대중에 의해 이루어졌다. 16세기의 제네바를 보자. 그때 제네바는 존 칼빈의 지도를 받고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칼빈이 가담하기 전에 벌써 시민들의 각성이 있었다. 그 민초들이 종교적․정치적 깨달음 아래 교회를 개혁하고 시민정부를 세웠던 것이다. 그들의 요청에 응한 칼빈이 거기 이미 존재하고 있는 개혁신앙과 의회민주정부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했을 뿐이다. 

이 점에 있어서 개혁주의와 루터주의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마르틴 루터가 활동한 독일은 16세기 당시 제후 국가였다. 거기에 제네바 같은 민중의 자각은 없었다. 민중은 자신들의 종교나 정치 생활에 대한 실제적 권리, 곧 자결권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봉건제후 아래서 농노와 같이 살고 있었다. 루터가 바티칸을 향하여 종교개혁의 봉화를 들었을 때 그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일반 민중이 아니다. 정치까지 간섭하는 바티칸에게 불만을 품어온 일단의 제후들이 그의 신변을 보호해주며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독일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등 스칸디나비아 5개국이 루터교회를 국교로 삼고 있는 건 이런 연유에서다. 제후의 협조 속에서 개혁된 교회는 바티칸의 손에서 그들의 손안으로 이전되었던 것이다. 여전히 하나님 백성의 교회가 되지 못하고 세속적인 국가의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 국가들, 이를테면 스위스, 화란, 영국의 한 때, 미국 등을 보라. 시민들의 손에 의해 민주정치가 실시되고 교회의 개혁이 진행되지 않았는가. 정부나 교회는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것이었다. 

가톨릭교회나 정교회 쪽을 보면 민중은 볼모로 담보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고위 성직자들이 교회를 전횡하고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국가의 각종 자원을 나누어 가졌다. 이렇게 되자 민중은 무지한 채 노예같이 일만 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교계제도나 제의중심, 또는 성물․성상 숭배에 빠뜨려 몽매하게 만들었다. 이건 성경의 정신에 어긋나는 짓들이었다. 

구약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출범 시에 벌써 성경을 주셨다. 이 성경의 백성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살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거기에 백성의 상하 구별이 없었다. 모두가 평등하였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하셨다. 예수님의 품에 거절되는 계층은 없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나 남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하나님 나라에 차별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사랑과 관심, 참여와 누림의 대상에 너나가 따로 없었다. 

개혁주의는 이렇게 가톨릭교회나 정교회와 달랐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의 동반자인 루터주의와도 같지 않았다. 그래서 개혁주의가 가는 곳에 국가․민족의 성숙한 모습이 나타날 수 있었다. 문명의 흐름에서 개혁주의는 진정 우월과 성숙의 표지였다. 


5. 개혁주의, 근본주의, 복음주의 비교 

개혁주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한국에서는 왕왕 개혁주의 진영을 근본주의자들의 집체로 보곤 한다. 근래와 와서는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를 혼용하기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근본주의나 복음주의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란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뭔가 고집불통이고 우겨대기 일쑤며 편협한 원리주의자처럼 치부되기 때문이다. 독일의 신정통주의자 에밀 부룬너는 1949년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은 복음에 대하여 열려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한국을 기독교적으로 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는 모든 신학에 있는 예수의 메시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만든 유대주의적 이론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 뒤 당시 감신대의 홍현설 학장과 한신대의 김재준 학장, 장신대의 이종성 학장 등도 근본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몽매주의, 청교도의 윤리, 분파적인 완전론”이라면서 홍현설 학장이 맹공격했고, 김재준 학장은 “객관적인 비판의 여지가 없는”것으로 몰아붙였으며, 장신대의 이종성 학장은 “신바리새주의”라고 폄하하였다. 

그렇다면 근본주의는 무엇인가?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가르쳤던 하비 칸 교수에 의하면 “광범한 의미에서 근본주의는 단순히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 곧 초자연적인 복음의 변호와 전파에 대한 또 하나의 이름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흔히 이런 의미에서, 아시아에서는 보수주의(conservatism), 영국과 유럽에서는 복음주의(evangelicalism)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특수한 역사적 운동으로서는, 근본주의는 좀 더 좁은 의미를 가졌다. 역사적 현상으로는, 그것은 기독교의 20세기의 표현이요, 미국의 표현이었다.” 
19세기말부터 급속히 세력을 얻어 20세기 초에 와서는 미국교회의 새로운 맹주 노릇을 하려고 덤빈 유럽의 자유주의와 싸운 동맹군을 일컬어 근본주의자들이라고 했던 것이다. 1909년에는 「근본요소들(The Fundamentals)」이란 제목으로 12권의 총서가 출간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광범위한 대변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초기 근본주의 운동은 경건주의와 세대주의, 개혁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다양한 교파가 연대하였다. 

유럽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집중적 세례를 받고 영국의 진화론과 미국의 산업화에 힘입어 발흥한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보수주의의 기치를 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시간이 흐르자 근본주의 진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와서다. 기독교인의 자유와 세대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가 주원인이 되었다. 그레샴 메이천 진영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칼 맥킨타이어 진영의 페이스신학교가 그 대표였다. 후자는 전자의 세대주의에 대한 공격을 전천년설에 대한 공격으로 생각했다. 양 진영의 골은 갈수록 깊어져 급기야 갈라섰다. 성경장로교회와 정통장로교회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분열은 비단 장로교 진영의 예로 그치지 않았다. 침례교 등 다른 교파로 번져가서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와의 싸움 이상으로 내분에 시달려야 했다. 이것을 학자에 따라서는 신근본주의(neo-fundamentalism)라고도 한다. 1941년 맥킨타이어가 주축이 되어 기독교연합회(A.C.C.C 후에 I.C.C.C)가 결성되었다. 

게다가 근본주의자들은 점점 수구적으로 변해가서 세상의 변혁(transformation)에 대해서는 손발을 거둬들였다. 일반대학에 가는 것보다는 성경대학(Bible college)에 가는 것이 낫고, 세속사회의 직분을 경시했으며, 과학과 문화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가질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경건주의적 색채가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근본주의는 따지기만 좋아하며 사랑이 없고 학문과 사회에 관심이 없는 ‘골통’으로 따돌림 받게 되었다. 근본주의에 대한 매력이 상실되고 비난과 외면이 거세어지자 근본주의 진영 안에서 반성의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그 결과 1942년 엘윈 라이트와 해롤드 오켄가 등이 미국복음주의협의회(NAE)를 조직했고, 빌리 그래함, 칼 헨리, 해롤드 린셀 등이 가세했다. 

오켄가의 말을 들어보자. “새로운 복음주의 운동은 근본주의의 모든 정통주의를 포용하지만 근본주의 운동에서 상당히 결여되었던 사회적 의식과 책임을 현시하려는데 있다. 새로운 복음주의 운동은 개인 구원, 교리적 진실…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인종, 전쟁, 계급투쟁, 알코올통제, 청소년범죄, 부도덕, 그리고 민족적 제국주의와 같은 문제에도 관심을 갖는다. …새로운 복음주의 운동은 정통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 측면에서의 자신들의 책임도 포기할 수 없다고 믿는다.” 

원래 복음주의란 로마 가톨릭을 반대하고 나선 마르틴 루터 그룹을 두고 붙여진 이름이었으나 영국에서는 한국의 보수주의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고 있다. 미국에서는 근본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선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여졌다. 좀 더 엄격히 구분하여 오켄가의 동류들을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라고 하기도 한다. 1948년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풀러신학교의 개학식에서 그가 ‘신복음주의’라는 새 단어를 도입하여 썼기 때문이다. 

우리 개혁주의는 근본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성경의 정확무오와 기독교의 초자연적 요소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신근본주의에 대한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 또 개혁주의는 복음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문화와 사회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참여에 있어서 그렇다. 그러나 신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도에 있어 은총(grace)과 정의(justice)의 동시적 구원을 굳게 지향한다. 이런 맥락에서 1974년 7월 16일로부터 25일까지 세계 150여개 나라의 2,700명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스위스 로잔에서 모여 가졌던 세계복음화국제대회에서 만들어진 복음주의선언서인 소위「로잔언약」의 ‘우선순위(priority)’ 문제에 대해 아쉬움을 갖는 것이다. 

확실히 알자. 근본주의든 복음주의든 그 안에는 루터주의도 알미니안주의도 세대주의도 신비주의도 다 들어 있다. 한편 은총에 몰입하든, 반면에 정의를 지향하든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 입각한 역사적 기독교신앙으로서의 칼빈주의에 굳게 서야 한다. 근본주의나 복음주의란 말은 개혁주의란 말에 비해 두리 뭉실한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요즈음 한국에서는 ‘개혁주의’보다 ‘복음주의’가 더 성가를 올리고 있는 듯하다. 개혁주의 진영의 지도자들 중에서도 개혁주의자 편협한 사람으로 여겨질까 봐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6. 한국과 개혁주의자의 소명 

지금까지 우리는 개혁주의를 대략 살펴보았다. 
종교개혁기 스위스 자치 도시 일대와 독일 남부 지역에서 발흥하여 제네바에서 칼빈에 의해 집대성된 개혁주의 신앙 시스템은 프랑스. 벨기에-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보하였다. 
그 가운데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퓨리턴이 각각 자기 나라에서 주류 기독교신앙으로 자리 잡지 못했지만 퓨리턴의 경우 영국에서 못다 한 개혁신앙의 꿈을 미국 동부에서 활짝 꽃피웠다. 

아직도 영국에 개혁주의의 신앙이 성공회 일부와 감리교 그리고 침례교 등에서 만만찮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개혁신학의 경쟁력에 대한 반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독일 남부의 개혁주의는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발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개혁주의 강국은 발흥지인 스위스를 비롯하여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다. 이러한 나라들은 지금 유럽의 강소국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데 이는 개혁주의의 성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나라들은 산골 혹은 해변에 위치하고 있는 16게기 당시 유럽의 시골지역이었다. 스위스 네덜란드는 남으로 라틴 여러 나라들을 발치에 두고, 북으로 게르만 제국을 머리에 이고 있다. 스위스-벨기에-네덜란드 벨트는 라틴과 게르만의 경계선과 같다. 

라틴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접한 곳으로 가톨릭교회가 확고히 장악하고 있다. 게르만은 그 규모로 볼 때 라틴의 유일한 라이벌이 될 수 있는 곳이다. 라틴의 가톨릭에 대하여 ‘그게 아니요!’라는 반명제를 들고 나올 수 있을 정도로 게르만은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런 게르만의 힘과 정서 위에 서 있다. 

이렇게 볼 때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마치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 낀 토끼와 같았다. 인구도 면적도 문화의 발달을 볼 때도 라틴에는 어림도 없거니와 게르만과도 상대가 되지 않은 그야말로 소국(small country)들이다. 바다 건너 스코틀랜드도 이와 비슷한 처지다. 스코틀랜드는 늘 영국에 시달려온 산악지대에 있는 나라다. 어느 모로 보든지 영국에 많이 뒤떨어진 소국이었다. 

유럽의 개혁주의 벨트를 생각하노라면 북의 바벨론과 남의 이집트에 끼어 있는 이스라엘이 떠오른다. 하나님은 바벨론이나 이집트 같은 대국에 자신의 친백성을 위한 나라를 세우지 않고 그 사이에 있는 아주 조그만 지역 가나안을 택해 거점을 삼게 하셨다. 가나안의 옛언약 백성을 통해 새언약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했고, 16세기에 이르러 그 하나님 나라 복음의 중흥을 유럽에서 가시화하실 때 유럽의 대세인 라틴이나 게르만보다 그 사이에 끼여 있는 소규모의 스위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를 들어 쓰셨다. 

이 개혁주의가 미국을 거쳐 19세기 후반 아시아로 건너올 때 한국이 그것의 대문(gate)이 될 줄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사실로 나타났다. 한국은 북에 러시아와 중국을, 남에 일본을 두고 있는 나라인데 이것은 이스라엘이나 스위스․네덜란드․스코틀랜드와 비슷한 처지이다.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개혁신학을 공부하고 온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들의 손에서 훈련된 최초의 목사 7인이 안수될 무렵 한국의 오늘을 만들어낼 중요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으니 그게 바로 저 1907년 평양대각성운동이었다. 

첫째, 당시의 한국개혁주의는 서민들을 모아 ‘민족구원을 위한 회개운동’을 주도(主導)하였다. 교회는 한국 서민들에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도록 감동적인 설교를 하였다. 그 서민들은 국가의 주권상실 원인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며 회개했다. 당시 일본을 대리(代理)했던 초대 조선통감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국교회에게 독립운동을 못하게 하는 강요문서를 보냈다. 선교사들 중 일부는 이를 찬성했으나, 한국 성도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주권상실의 책임을 스스로 안고 회개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러한 회개운동의 선봉(先鋒)에 ‘평양 장대현교회 부흥운동’이 있다. 

둘째, 한국개혁주의는 그 서민들에게 새로운 언어를 주어 의식혁명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교회는 무지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어머니 겸 스승이 되어, 한글과 서민언어(庶民言語)를 그릇 삼아 그 안에 번역된 성경을 담아주고, 그 언어로 신교육(新敎育)을 해 주었다. 동시에 그 서민언어에 기독교의 신앙과 도덕률과 풍부한 문화를 담아주었다. 그래서 한국을 이끄는 중심언어는 양반 계급의 한자 언어(漢字言語  輸入言語)에서 서민들의 순수 한국 언어(韓國言語)로 바뀌었다. 이러한 언어를 줄기차게 솟아나게 한 샘은 교회의 설교와 회개운동 및 신교육이었다. 이에 자극과 격려를 받아 교회 밖에서도 서민들을 상대로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고취(鼓吹)하는 연설회, 웅변대회, 한글신문 및 출판물, 신문학 운동, 신교육 운동이 나타난 것이다. 평양의 부흥운동은 이런 모든 활동의 첫 번째 충격이었고, 원뿌리이다. 

셋째, 한국개혁주의는 교인들 사이에서 사회적 차별의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게 하였다. 이로 인해 교회 밖으로도 계급과 성별과 빈부와 지방색과 혈연의 장벽을 허무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새로이 통합된 민족의식을 움트게 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요소를 제거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교회 안팎을 물론하고 농어촌 계몽운동, 물산장려(物産奬勵)운동, 독립운동의 씨앗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 씨앗이 바로 ‘한민족이 거듭나게 하는 불씨’가 된 셈이다. 교회는 언제나 그 씨앗 자체였고, 그 씨앗의 보급로이기도 했다. 평양의 그 부흥운동은 이런 신앙과 윤리운동의 시발점이었고, 불변하는 본이 되었다. 

넷째, 한국의 개혁주의는 ‘인도주의적(人道主義的) 도덕성을 갖춘 민중 지도층’을 양성하였다. 이 지도층은 후일에 삼일 만세운동까지 주도하게 되고, ‘새로이 통합된 한민족 의식’을 이끄는 주류(主流) 지도층으로 일어서게 된다. 개신교의 등장 직전까지는 동학(東學)이 부패한 양반들의 지배체제를 무력으로 붕괴시키려 했다. 또 침략 외세에 침륜(沈倫)된 것으로 여긴 서학(西學天主敎) 교도들을 동학 측은자신들과 차별화했다. 그래서 천주교도들에겐 양반들과 다름없이 폭력적인 억압에 가세(加勢)했다. 그것이 동학혁명이었다. 그 결과로 민족세력은 통합되지 못하고, 외세의 무력개입을 자초(自招)하고 말았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반상의 벽을 무너뜨리고 비폭력 평화주의를 채택하였다. 이렇게 하여 교회가 우리 민족의 모체가 되게 하였다. 

이처럼 일제 암흑기 한국을 선히 인도한 한국개혁주의는 해방 후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의 노력으로 낙원을 세우고자 광분하는 공산주의의 허구와 맞서 싸웠다. 남한에 집중한 개혁주의 진영의 재건을 위해 힘쓴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신학적 자유주의자들과 내부 투쟁을 겪으면서 교회 분열의 아픔 속에서도 교회를 세우고 보수개혁신학을 지키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마르크스주의적 혁명 방식까지도 용인하는 해방신학 위주의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허상을 경계하면서 한국개혁주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구현에 앞장섰다. 비록 민주와 과정에서 선도자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아쉬움이 없지 않으나 그것도 보수 세력이 무너지면 반공에 금이 갈까봐 걱정하는 마음이 크다 보니까 조심스러워 했다는 것이 맞는 답일 것이다. 또 경제발전의 호기회를 놓칠까봐 염려하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 하여튼 선교 이래 줄곧 한국교회의 주도권을 잡아온 개혁주의 진영은 민주와 과정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고 우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민주정치와 경제발전을 상당히 이룬 지금 한국개혁주의는 나라의 선진화와 국토통일을 위해, 그리고 단연 앞서 나가도 있는 세계선교를 위해 다시금 선봉에 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혁주의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고 사역의 현장을 리얼하게 파악하며 변혁(transformation)을 위해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봉헌하기 위해 과감한 도전을 시도해야 한다. 

특히 우리 총회는 가장 큰 규모의 교단으로서 보수개혁주의의 맏이로 세움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독교 최고의 신학체계를 소지한 자부심이 점점 사라지고 ‘신학 없는 목회’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목회는 자세히 뜯어보면 어떤 목회든지 목회자의 신학적 표현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장로회제도를 신앙과 교회의 기준으로 채택한 목회자가 그런 ‘신학 없는 목회’로 나아갈 때 초래되는 교단의 혼란을 상상해보라. 그 일이 지금 우리 교단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아니요 라고 부인할 수 있겠는가. 교회사는 우리에게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신학적 성찰이 빈약한 목회는 결국 씨 없는 수박과 같은 골이 된다는 것을! 그러므로 보수개혁신학으로 단단히 무장하여 그 복되고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더욱 발전시키는 교단이 되자. 그럼으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신실하게 전하고, 그분에 힘입어 경건한 삶의 영위가 가능해질 것이며,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진정으로 선진의 대열에 올려놓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