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설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45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 셋째날 새벽예배에서 오정호 목사님(새로남교회)께서 하신 설교입니다.  
 
  
본문 : 고린도전서 15:8-11 
제목 : 주인님의 은혜를 확대재생산하라! 


최근, 우리나라에 짧은 기간 상영된 영화중에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영국의 양심, 그리고 반노예제도의 선구자로 불리는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영웅적인 일대기를 그려낸 격조 있는 작품입니다. 

윌버포스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 찬 305장)의 작사자이며 그의 믿음의 멘토였던 존 뉴튼(John Newton)과의 긴 대화 이후에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의 목표를 놓아 주셨습니다, 하나는 노예무역을 금지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풍습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1787.10.28 일기)/ A Hero for Humanity / 윌리엄 윌버포스 세상을 바꾼 그리스도인 , 케빈 벨모트 / ‘좋은씨앗’ p.125 ) 

윌버포스와 뉴튼의 만남은 하나님께서 정치적으로는 자유인이었지만 영적으로 묶여있던 영국민에게는 양심의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었고, 쇠사슬에 묶여있었지만, 영혼은 자유로운 흑인 노예들에게는 정치적인 자유를 선물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윌버포스의 헌신과 확신을 통하여 노예들은 물론 전 영국민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확대재생산되도록 하였습니다. 윌버포스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주님의 제단위에 올려 드리도록 움직인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Amazing Grace! 세기를 넘어 믿음의 열매를 회상하는 우리 가슴속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Amazing Grace! 

동일한 원리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펄펄 살아 움직이는 한사람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사도바울입니다. 바울은 이천년전의 사람이었으나, 그가 온 몸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는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이 새벽에 우리의 영혼의 골짜기에도 강력하게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생임어있음을 실감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8절)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내게도'= 'one abnormally born' (NIV) 'one untimely born' (NASB))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너무도 부적절한 자신의 모습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맨 나중에"(last of all)라는 어구를 문장 첫머리에 두어 “주목할 가치가 없는 존재”였던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을 그의 세포 하나에까지 새겨 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와 “조산아(早産兒)”라는 단어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싫어하여 회피하는 단어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잘 준비된 존재인가를 다른 이들에게 부각시키며 애쓰는 모습을 봅니다. 자신의 영적 일천함에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애통하는 자에게 부어지는 원리를 발견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하여 통절하게 가슴을 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비로소 자리 잡습니다. 

9절은 사도바울 자신이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I am the least of the apostles)임을 적나라하게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애쓴 수많은 사도들과는 달리 자신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자였기에,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진실로 어울리지 않는 자신이 지금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황공스러운 일인가를 뼈에 새기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사랑과 조우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역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가 소망임을 고백합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이성(理性)을 뛰어넘어 베풀어집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동역자들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실체는 우리가 결코 포기하지 않는 “나는 너보다 낫다”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는 하나님의 사도로 부름 받은 진실을 선언합니다. 
그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ἀλλα ἡ χάρις τοῠ θεοῠ / but the grace of God)임을 밝히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면 인간적인 것이 물러갑니다. 반면에 인간적인 것이 활개 치도록 방치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매몰됩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에 얼마나 깊고 온전히 사로잡혀 있는가는 10절 한 절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연거푸 세 번이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결코 억제할 수 없는 찬탄이 분수처럼 힘차게 뿜어져 나옵니다. 이러한 진리를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라 명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적 은혜로 낳은 자녀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목회자와 장로가 되었습니다. 

사도는 그의 인격과 사역 어느 한 부분도 주님의 은총의 빛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감사함으로 풀어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의 종들의 주님 섬김을 통하여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공허한 말의 성찬에서 멈추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은혜가 일하도록, 은혜의 힘으로 사역하도록, 스스로를 몰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역자의 알파(Α)라면 하나님께 영광은 사역자의 오메가(Ω)입니다. 우리는 은혜라는 단어의 홍수속에 있지만 실상은 은혜의 샘이 메말라 가는 것을 목격하는 아픔이 늘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도는 그와 함께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더 드러내고자 합니다. 사도의 삶과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도하는 삶과 사역(The Grace of God driven Life & ministry)이었습니다. 

은혜의 복음은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 전파되어 믿어져야 합니다.(11절) 바울은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안에 가두어 두지 않았습니다. 멈추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결코 동결시키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은혜의 증거와 흔적을 가진자만이 복음전파자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에 영혼이 적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여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11절)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동일하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꽃 피어 열매맺겠습니까? 


Ⅰ. 목회자와 장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샘물이 늘 펑펑 솟아나오도록 영혼을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와 노회 그리고 나아가 총회가 은혜의 풍성한 현장이 되기 위한 급선무는 우리 자신의 은혜 회복이 그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시작이 좋으며(Starting Well) 끝도 좋은(Finishing Well) 성경의 인물의 공통분모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개인적인 관계를 하나같이 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임재와 만남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깨어있는 영성을 소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에서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아가 우리들을 이끌도록 방임하면 반드시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영혼에 비수를 갖다 들이 댈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무장된 영혼이 우리의 자아를 강력하게 이끌도록 합시다. 우리 각자가 섬기는 당회는 성령님의 강한 임재와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고 있습니까? 기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당회를 장악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과거 지향적 전통이나 몇 몇 사람들의 합의가 당회를 이끌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확대재생산해야 할 첫 번째 현장은 당회입니다. 우리 모두 교회와 성도를 복되게 하는 주님의 은총의 도구로 쓰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흔적이 목회자와 당회원의 영혼에 깊이 아로 새겨지기를 소원합시다. 당회의 수준과 영성은 당회원의 영혼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총에 젖어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인정합니다. 


Ⅱ.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성취해야 할 과제는 지역복음화의 사명입니다. 

공동체의식을 회복하여 우리 예장총회에 소속된 교회들이 흩어져 있는 지역에서 여러 다른 형제교단의 교회들의 귀감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수년간 부산교계가 연합정신으로 똘똘 뭉쳐 부산지역의 부흥과 성장을 위하여 총진군하는 일에 우리 교단 교회가 견인차로 쓰임 받았습니다. 남도교회, 부산중앙교회, 부전교회, 성동교회, 수영로교회, 신평로교회, 초량교회, 해운대제일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칭찬하는 소리에 우리 모두도 덩달아 기쁩니다. 

다른 교단에서는 우리 교단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로부터 명분만 화려한 교회가 아니라 영적인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이루어내는 교회의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모든 교회가 은혜를 유통하여 지역사회에서 인정받고 신뢰받는 교회상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지역의 복음화 없이는 민족복음화는 한낱 구호에 그칠 뿐입니다. 우리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에서 신실함의 표상으로 우리교단의 교회가 존경받기를 소원해 봅니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주님께서 세우신 자리에서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Ⅲ. 하나님의 은혜는 교단의 정치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쓰나미처럼 밀어 닥친 디지털시대에 하나님의 주권이 통치해야 할 영역은 우리 교단의 오랫동안의 기도제목인 무지역노회의 지역노회화입니다. 이 문제는 주님의 뜻을 진지하게 묻는 일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합니다. 처음 제도를 도입할 때는 좋은 뜻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겨레의 통일과 민족 복음화를 향한 열망의 표출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과정과 결과 역시 아름다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와 민족과 교회 앞에서 이 문제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의 무지역노회의 상황이 원래 그 제도가 시행될 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세상에 감동을 창출하려면 적어도 세상적 표준은 뛰어 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개혁주의자들의 신앙적 유산을 물려받아 강력하게 성경적 표준(Biblical Standard)을 세워야 합니다. 말로만의 개혁은 힘이 없습니다. 삶으로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순종에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라는 요소가 반드시 담겨져 있습니다. 개혁에는 반드시 내부의 저항이 있기 마련입니다. 적지 아니한 불편함도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였던 바울에게도 유대인의 간계가 있었습니다. 개혁자 윌버포스 역시 수많은 정적으로부터 도전과 협박 그리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이제 거대 교단으로 성장한 우리 교단의 모습이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의 계승자라고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교단정치 문제에 대해서 우리 교단이 진정 우리나라 국민과 사회로부터 존경받고 신뢰받으려면 우리의 개혁성이나 안목이 남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는자의 도덕성이 최소한 그들의 윤리지수를 뛰어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청렴도보다 더 청렴해야 합니다. 세상에 감동의 폭탄을 던지기 위해서는 더 큰 개혁의 폭탄을 우리 스스로 짊어져야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합동 교단이 한국교회의 영성회복과 부흥의 선봉장으로 쓰임받도록 합시다. 우리 합동 교단이 민족복음화의 기수로 드려지도록 합시다. 민족과 열방을 향한 부흥의 전진기지가 되도록 주님의 제단에 올려드립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은혜가 골짜기마다 메아리치고, 일터마다 역사하도록 우리의 욕심을 비우고 싶습니다. 우리교회와 우리 교단의 영적 품격이 상향조정되고 전향적으로 열매 맺는 미래를 열어가려면 다시 한 번 주님의 은혜에 송두리째 붙잡혀야 합니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주의 은혜 사슬 되사 우리 교단을 주께 매소서!” 

새 정부 출범 후 처음 열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방부 장관이 육해공군해병대 지휘관을 향하여 우리 국군이 군인 본연의 자세를 회복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였습니다. 

국방장관이 “정예화 된 선진 강군을 향하여”라는 주제의 기조연설을 통하여 “우리 군은 현재 군의 존재목적(存在目的)을 경시하면서, 강한 군대보다는 편한 군대를 선호하고 마치 편한 군대가 민주군대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고 아픈 가슴으로 질타했습니다.(2008. 4. 11 국방부대회의실 “군지휘관회의”) 국군이 전투형 군대의 본연의 사명을 잊은 채, 관리형 군대로 변질되고 있는 군에 자각과 개혁을 촉구한 메시지였습니다. 국방장관은 오늘밤 당장 전투가 개시되더라도 승리할 수 있는 “Fight Tonight(파이트 투나잇)군대로 우리 국군이 환골탈태(換骨奪胎)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였습니다. 야전성(野戰性)을 상실한 군인은 이미 군인이 아니다 라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 믿음의 선배 사도바울이 강단에 서서 메시지를 전한다면 어떤 메시지를 전할 것인가 생각해 보셨습니까? 
만약, 이 자리에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 오셔서 한국교회 최대의 교단을 자랑하는 우리의가슴에 담아주기를 원하는 메시지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현재 한국교회는 고난기피증에 걸려 있습니다. 은혜에 대한 각성은 고난을 정면돌파하도록 우리에게 새 힘을 공급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의 주인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신다면 어떤 메시지를 우리의 심장에 새겨주실까요? 여러분께서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강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게 하라! 
하나님 은혜를 확대 재생산하라. 지역교회에서 당회에서! 노회에서! 총회에서! 
우리 모두는 이렇게 기도할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주 예수님! 저를 은혜의 불덩어리가 되게 하셔서 가는 곳마다 불신앙과 불순종을 태워버리게 하소서! 우리교회를 은혜로 사로잡으셔서 지역사회의 부흥의 진원지가 되게 하소서. 

공산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한통의 편지를 공개하면서 오늘날 신자들의 헌신이 공산주의에 바치는 헌신보다도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함을 촉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본래 이 편지는 공산주의 사상에 매료된 한 청년이 공산주의 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자기 연인이었던 여인에게 헤어지자고 쓴 편지였습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사망률이 높습니다. 
총에 맞고 교수형을 당하고, 조롱당하고 직업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 중 상당한 퍼센트는 이미 죽었거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집, 좋은 자동차를 가질 여유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간, 모든 재산, 모든 재능을 
아낌없이 당을 위해 바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가리켜 광신자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신자입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하나의 목적, 
세계 공산화의 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내가 죽도록 갈망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가 실현된 세상입니다. 
공산주의 전파는 이제 내 삶이요, 내 사업이요, 
내 종교요, 내 취미요, 
내 연인이요, 내 아내요, 내 애인이요, 
내 빵이요, 내 고기입니다. 
나는 낮에 그 일을 하고 밤에는 그것을 꿈꿉니다. 
나에게 이제 이 비전을 떠나서는 
나의 어떤 다른 인생도, 우정도, 사랑도, 대화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비전을 위해 감옥에 갇힐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사형대에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Logos Vol.52 P.347-348 재인용) 

적어도 공산주의 사상은 한사람의 젊은이 가슴에 불을 질러 놓았습니다. 그 불은 어떤 연인이나 제도나 조직도 결코 깨뜨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은 과연 어떤 불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불이 아니라면 어떤 불이라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동역자 목사님 장로님 여러분! 
나 한사람 은혜 받는다고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인가? 우리 스스로 염려할 수 있습니다. 위축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적 포기는 결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기상학자이며, MIT공대 교수로 재직했던 에드워드 로렌츠 박사가 “나비효과”개념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개념은 초기의 미미한 변화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브라질에서 나비 한 마리가 일으킨 날개짓이 대기흐름을 변화시켜 미국 텍사스주에서 토네이도가 발생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로렌츠 박사가 자연세계에서 “나비이론”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영적세계, 믿음의 세계에서 “은혜이론”을 말해야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한 사람 사도 바울과 또 한 사람 윌버포스의 삶에 부어진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기독교 역사를 변화시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염되었던 영국에 희망의 빛을 찬란하게 비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찌 이 일이 작은 일이겠습니까? 무모한 일이겠습니까? 장로교회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은 어두운 조선에 진리의 빛을 선물하였습니다. 그 결과 영적 황무지가 생명의 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개인적으로 한 지역교회의 담임목회자로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를 담대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예배실 본당이 지하에서 12년 동안이나 있었습니다. 칼바람 같은 시험도 없지 않았습니다. 부임 초기 교회내부에 파당이 나누어져 소용돌이치던 때도 있었습니다. 많은 성도의 가슴이 상처를 받고 멍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혼자 남겨두신 당회원이신 김 장로님과 그 가족 그리고 신실한 교우들에게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어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목적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김 장로님과 교우들은 기쁨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당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뜨거워졌습니다. 주님 앞에서 그리고 교우들 앞에서 ‘정도목회(正道牧會) 목양일념(牧羊一念)’으로 초지일관하기로 손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우리 교회가 대전 시민을 품고 섬기는 교회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안디옥교회처럼 쓰임 받는 것이 모든 교우들의 소원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지난번 이단 구원파 박옥수측과의 법적 소송에서 하나님께서는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심령의 담대함과 재정적 합심 후원, 교회의 단합이라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끈질기게 도전하고 음해하는 박옥수측을 대법원의 승소로 꺾어 주셨습니다.(2007. 10. 26 대법원 형사재판승소) 오직 주님의 은총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은혜에 민감했던 우리 교회 장로님들과 교우들의 주님사랑, 진리사랑, 교회사랑, 목회자사랑의 열매였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선배목사님 여러분,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눈물과 땀으로 지역교회를 섬기시는 장로님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생명줄이 되게 합시다. 
우리 사역의 에너지원이 되게 합시다. 
은혜의 힘으로 주님 허락하신 직분을 감당합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 교회와 노회 그리고 총회를 이끌도록 합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에게 내어 주신 은혜가 우리를 통해 확대재생산되도록 합시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우리 주인님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완전히 통치하는 날을 소망합시다. 

주여! 우리 인생을 주의 은혜로 다스려 주소서. 
주여! 우리 총회를 주의 은혜로 충만케 하소서. 
주여! 우리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의 복이 되게 하소서. 
할렐루야! 아멘!